스페인은 프랑스, 이탈리아와 위도상 비슷한 위치에 있는 유럽에서 손꼽히는 와인 명산지다. 와인에 문외한인 사람들은 유럽와인 하면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부터 떠올리지만 스페인도 생산량이나 품질만 놓고 보면 이들 나라에 뒤지지 않는다. 특히 세계 와인시장에서 스페인 와인이 독보적인 위치에 있는 것은 다른 나라와 달리 토착품종으로 만드는 와인이 전체 생산량의 80%에 육박해서다. 그란시아노, 카리네나, 팔노미노, 템프라니요 등 토종 품종으로 맛을 내는 스페인 와인은 그래서인지 맛과 향이 독특하다. 스페인 와인이 프랑스, 이탈리아에 비해 덜 알려진 것은 순전히 마케팅 활동이 부족해서다. 그러나 최근 스페인 정부가 전 세계 와인 애호가를 대상으로 와인 스쿨을 곳곳에 개설하면서 ‘스페인 와인 홍보’에 발동을 걸었다.

그중에서 와인 산지 리오와, 루에다를 대표하는 마르케스 데 리스칼은 명성이나 품질 면에서 스페인은 물론 유럽 최고급으로 꼽힌다. 스페인 3대 와이너리(포도밭)로 꼽히는 마르케스 데 리스칼은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간직한 이유로 현재 스페인 왕실의 공식 와인으로 지정돼 있다.

마르케스 데 리스칼은 포도나무 수령에 따라 포도를 구분지어 술을 빚는다. 가령 마르케스 데 리스칼 바론 데 시렐 리제르바 만해도 수령이 40년 이상 된 나무에서만 포도를 채취한다. 사용되는 품종은 템프라니요(85%), 그란시아노(10%), 마주엘로(5%)다. 이 중 ‘스페인의 메를로’라는 별명의 템프라니요는 향이 부드러우면서 탄닌 성분이 많다. 마르케스 데 리스칼 바론 데 시렐 리제르바는 시중에서 한 병당 30만원에 판매되고 있다. 바론 데 시렐 리제르바를 비롯해 이 와이너리에서 만드는 와인은 디캔팅(와인 뚜껑을 따 별도의 병에 담아두는 행위)을 하지 않아도 맛에서 중후함이 느껴진다. 마치 한편의 우아한 오페라 아리아가 연상된다고 할까.

스페인 3대 와이너리인 마르케스 데 리스칼

마르케스 데 리스칼은 품질에 있어서는 절대 타협하지 않는 와이너리다. 세계 최고급 와인을 생산하는 프랑스 샤토 마고의 수석 와인메이커 폴 퐁타이에가 자기 와이너리를 빼고 기술 컨설팅을 해주는 곳은 마르케스 데 리스칼이 유일하다. 그래서 스페인 와인 업계에서 마르케스 데 리스칼은 자국 와인 기술력을 2~3단계 끌어 올렸다는 찬사를 받고 있다.

 “우리(마르케스 데 리스칼) 전까지만 해도 리오와, 루에다 와이너리들은 스페인 방식만을  고집하고 있었어요. 반면 우리는 프랑스의 와인 제조 방식을 주목했죠. 프랑스 포도 품종을 도입하고 주조 과정 시 포도 줄기를 제거하거나 프랑스 보르도에서 사용하는 오크통에 와인을 담는 등 변화를 꾀한 겁니다. 1974년 프랑스 보르도에서 소비뇽 블랑을 들여와 루에다에서 처음으로 스페인산 소비뇽 블랑 와인을 만든 것도 우리가 처음이에요.”

가족기업 방식의 이 와이너리를 경영하고 있는 호세 루이스 무기로 공동대표의 설명이다.

최상의 와인을 만들기 위해 최신 기법 사용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스페인 토종인 템프라니요 등 3가지를 적절히 배합하는 것은 가문의 오랜 전통이자 철학이다.

“포도나무를 고사시키는 전염병 ‘프록셀라’가 유럽 전역에 창궐한 1850년대 프랑스 보르도와 가장 비슷한 기후조건, 토양을 가진 리오와에는 프랑스 와인메이커들로 넘쳐났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너무 비싼 기술 이전료를 요구했기 때문에 스페인 사람들로선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죠. 그때 우리 와이너리 설립자였던 카미오 아메자가가 당시 보르도 유명 와인메이커 쟝 피노에게 프랑스식 와인 제조법을 스페인에서 처음 시연하게 했어요. 그게 오늘날 프랑스식 스페인 와인의 효시가 된 거예요.”

마르케스 데 리스칼은 1895년 세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프랑스 보르도 와인 대회에서 최고상을 수상하면서 세계 와인업계 신데렐라로 떠올랐다. 당시 프랑스에서 열린 와인 대회에서 비 프랑스 국가 와인이 상을 탄 것은 이 와이너리가 처음이다.

이런 이유로 지금도 마르케스 데 리스칼이 만드는 와인에는 당시 수상 증서가 병 라벨에 표시돼 있다. 워낙 고가 와인인지라 병 전체가 황금색 줄로 둘러싸여 있는 것도 특징이다. 오늘날 위스키의 유사제품 방지 장치와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다.

무기로 공동대표는 자신의 와인 철학을 ‘세계 어느 음식에도 잘 어울리는 와인을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생산량의 60% 이상을 미국, 스위스, 영국, 호주 등에 수출하는 만큼 세계인들의 입맛을 가장 중시한다. 스페인 품종을 사용하더라도 맛은 프랑스, 이탈리아산 포도 품종에 전혀 뒤지지 않는 ‘유니버설(Universal) 와인’을 만드는 것이 그의 오랜 소망이다.

“그나마 우리는 수출 비중이 높아 사정이 낫지만 상당수 와이너리가 경기 침체로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어요. 레스토랑에서 소비되는 것보다 일반 소매점 판매 비중이 높아진 것도 이런 이유로 볼 수 있죠. 때문에 요즘 토양이 좋은 와이너리들이 많이 매물로 나오고 있어요. 우리도 지금 몇 군데를 알아보고 있는데, 모름지기 와인 메이커라면 철학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가 오랜 세월 스페인 최고의 와이너리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은 그만큼 기본기에 충실했기 때문이라고 봐요.”

마르케스 데 리스칼을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면 가장 많이 뜨는 단어가 마르케스 데 리스칼 호텔이다. ‘와인의 도시(City of Wine)’라는 별칭의 호텔 마르케스 데 리스칼은  전 세계 와이너리 호텔의 대명사다. 세계 최고급 부티크 호텔 체인 ‘럭셔리 컬렉션’ 소속으로 현재 스타우드 호텔&리조트 그룹이 운영 중인 이곳은 스페인 왕실은 물론 데이비드 베컴, 브래드 피트 등 세계 유명 인사들이 즐겨찾는다. 특히 호텔 개관식에 후안 카를로스 현 국왕이 직접 참여할 정도로 스페인 왕실의 사랑은 각별하다. 투입된 건축비만 6300만유로(약 900억원)였다. 전체 43개 객실로 구성돼 있는 이 호텔은 스페인 전통춤 플라멩코를 추는 무희의 드레스를 형상화해 건물 외관을 디자인했다. 호텔 전면부를 티타늄 강판으로 시공해 비춰지는 각도마다 햇빛이 다양하게 색깔을 내는 것도 특징이다. 

“몇 해 전 브란젤리(영화배우 브래드 피트, 안젤리나 졸리)부부가 변장을 하고 3박4일간 묵었는데 호텔에서 바라보는 포도밭을 보고 어찌나 좋아하던지요. 경기가 어렵다고 하지만 우리 호텔은 빈방이 없을 정도로 인기예요. 건물에서 걸어 나와 드넓은 포도밭을 걷는 이국적인 경치, 상상만 해도 아름답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