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이 부동층을 겨냥해 들고 나온 것은 바로 ‘경제민주화’다. 부동층은 주로 무당파나 중도층으로 확인되고 있다. 보수나 진보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이들은 여야의 대립에서 캐스팅보트 역할을 한다. 따라서 이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 어젠다를 내세워야 했다. 아울러 18대대선을 관통할 ‘시대정신’이어야 했다. 표에다 명분까지 얻으니 일거양득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경제민주화는 입맛에 딱 맞는 어젠다인 셈이다.
‘노무현 정부’ 때부터 양극화 문제는 우리나라를 짓눌러 왔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도 별반 다르지 않다. 정치는 국민에게 카타르시스를 주어야 한다. 또한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대통령을 뽑는 대선이라면 더욱 그렇다. 정치권은 양극화 해소를 위한 액션을 취해야만 했다. 복지를 확대하고, 재벌 개혁의 칼을 드는 것이 불가피했다. 이 시대에 경제민주화는 필연이었던 셈이다.
경제민주화가 여야의 공통 관심사였지만, 이번 대선에서 핵심 어젠다로 만든 것은 새누리당이다. 박근혜 후보는 지난해부터 재벌개혁론자인 김종인 박사와 접촉해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으로 영입하는 데 성공했다. ‘경제민주화 조항’이라고 불리는 헌법 제119조 2항을 만든 김 박사는 현재 박 후보 캠프의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을 맡아 경제정책 공약을 총괄하고 있다.
김 위원장을 품에 안은 박 후보는 경제민주화 이슈를 선점할 수 있었다. 이로써 ‘줄·푸·세’(세금은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질서는 세운다)로 대표되던 박 후보의 경제정책이 경제민주화로 확 바뀌었다. 그 결과 문 후보는 물론이고, 안후보마저 기선을 제압당했다. 문 후보는 그 당시 민주통합당 후보 경선을 치르고 있었다. 안 후보도 대선 출마 여부를 고 장고에 장고를 거듭하던 때여서 어젠다를 내세울 상황이 되지 못했다.
문 후보 캠프 이정우 교수, 안 후보 캠프 장하성 교수 영입
경제민주화 이슈를 뺏긴 문 후보와 안 후보는 만회를 위해 엄청난 노력을 들여야만 했다. 그래서 문 후보는 ‘노무현 정부’에서 정책기획위원장을 역임한 이정우 경북대 교수를 경제민주화위원장으로 영입했다. 이 위원장은 ‘노무현 정부’ 당시 토지공개념을 도입하자고 주장하는 등 개혁성향의 경제학자다. 특히 경제민주화의 대척점이라 할 수 있는 경제자유화에 ‘노무현 정부’가 경제정책의 방점을 찍자 바로 청와대에 사표를 냈던 인물이다.
이에 맞서 안 후보는 장하성 고려대 교수에게 경제민주화 위원장을 맡기며, 경제민주화 행보에 불을 댕겼다. 장 교수는 소액주주운동을 통해 기업의 지배구조 개선을 추진해왔다는 점에서 재벌개혁론자로 통한다.
이렇게 차례로 진용을 갖춘 뒤 가장 먼저 경제민주화 공약을 내놓은 곳은 문 후보다. 그는 지난 10월11일 재벌개혁 공약 10개를 발표했다. 문 후보는 재벌개혁을 크게 △소유지배구조 개혁 △재벌 총수일가 부당 사익추구 방지 △재벌반칙 엄단 등 3대 축으로 나눴다. 각론으로는 △재벌 순환출자 금지 △10대 대기업 출자총액제한제 재도입 △지주사부채비율상한 200%에서 100%로 강화 △금산분리 원칙 강화 △일감 몰아주기 제재와 과세 강화 △재벌 내부 견제장치 강화 △공정거래법 위반 손해액 3배 배상 △기업범죄 사면과 집행유예 제한 △범법자의 임원 취임 제한 △대기업의 중대한 반시장범죄 처벌 강화 등 10개 과제를 추진키로 했다. 상당히 강도 높은 재벌개혁 정책으로 평가되고 있다. 문후보 측은 “지난 7월 발표한 골목상권 보호와 중소기업 육성 대책에 이은 두 번째 경제민주화 분야 공약”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질세라 안 후보도 사흘 후인 지난 10월14일 재벌개혁을 골자로 한 경제민주화 공약을 공개했다.
안 후보는 △재벌 총수의 편법 상속·증여, 일감 몰아주기, 골목상권 침해 등 각종 불법 행위 방지 △총수 및 임직원의 불법행위에 대한 엄정한 법집행 △재벌 계열분리명령제 도입 검토 △금산분리 규제 강화 △순환출자 금지 △지주회사에 대한 부채비율 축소, 자회사에 대한 지분율을 상향조정해 지주회사 지배구조를 투명하고 단순화 △다중대표소송제 도입, 집중투표제 강화 및 국민연금 등 연기금의 주주권 행사 등 7대 재벌개혁 과제를 추진키로 했다.
특히 이 중 계열분리명령제 도입은 대기업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계열분리명령제는 체계적으로 중요한 금융기관(SIFI)이 거시건전성을 위협할 경우 재벌그룹이나 금융지주사에서 강제로 분리하는 것이다. 안 후보 측은 “SIFI에 대한계열분리명령제를 도입한 뒤 상황을 봐서 비금융기관에도 단계적으로 도입하겠다”고 했다. 안 후보 캠프의 전성인 홍익대 교수는 “금융기관에 대한 계열분리명령제는 재벌계열의 거대하고 복잡한 연계 많은 금융기관이 포함될 수도 있고, 거대 금융지주회사나 그룹이 포함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문재인, 안철수 두 후보는 이처럼 모두 강도 높은 재벌개혁을 기치로 내걸었다. 이는 앞서 설명한 것처럼 ‘경제민주화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는 김종인 박사를 새누리당에 뺏긴 후 선명성에서 뒤처졌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풀이되고 있다. 후발주자로서 더 강도 높은 방안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던 것. 실제로 안 후보 측 전성인 교수는 경제민주화와 관련, “김종인 위원장의 생각이 굉장히 강하다”고 실토할 정도다.
대권 후보 3인방이 이렇게 개혁성향의 인물을 전면에 내세워 경제민주화에 시동을 걸었지만, 각 캠프 내부에서 순조롭게 추진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 크고 작은 충돌이 있어 왔다. 경제민주화 추진이 단순히 표를 의식해 립서비스로 그치는 것이 아닌지 의구심이 들 정도로 실행의지를 퇴색시키는 사건들이 있었다.
경제민주화를 어젠다로 내세워 크게 앞서가던 박 후보는 문·안 후보가 경제민주화 공약을 발표한 뒤 열흘이 넘도록 공약 발표를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이는 경제민주화를 놓고 내홍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김종인 위원장과 이한구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끊임없이 대립했다. 경제민주화를 주장하는 김 위원장에게 이 원내대표가 딴죽을 거는 모양새가 계속된 것. 심지어 이 원내대표는 김 위원장이 정체불명의 경제민주화를 추진한다고 비아냥거렸고, 김 위원장은 이에 대해 “정서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인 것 같다”고 직격탄을 날리기도 했다.
급기야는 김 위원장이 박 후보에게 이 원내대표의 경질을 요구하며 당무 거부까지 했다. 결국 이 원내대표가 경제민주화에 대해 이론을 제기하지 않는 것으로 박 후보가 수습했지만, 대선 투표일까지 한 달 넘게 남은 상황이라 두 사람의 갈등이 다시 수면 위로 부상할 가능성은 상존한다.
캠프의 한 관계자는 “새누리당이나 캠프 내부의 기득권 세력은 아무래도 현 체제 유지를 선호한다”면서 “따라서 경제민주화를 위해 영입된 김종인 박사와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2007년 17대 대선 때 줄·푸·세를 입안한 김광두 국가미래연구원 원장이 이후에도 박 후보의 싱크탱크 역할을 해왔다는 점에서 김 위원장이 이들 기존 세력과 마찰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김광두 원장이나 이한구 원내대표는 시장과 기업에 대한 규제 완화에 방점을 찍고 있어 김 위원장과는 대척점에 서 있다. 박 후보 캠프에서 경제공약을 맡고 있는 안종범·강석훈 새누리당 의원도 김 원장·이 원내대표와 뜻을 같이하며 김 위원장을 압박하고 있다. 박 후보는 늦어도 11월 초까지는 경제민주화 방안을 발표할 계획이지만 이런 이유로 다른 두 후보보다는 수위가 높지는 않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경제민주화 방안에 부동층 표심 ‘출렁’
이에 비해 뒤늦게 출마선언을 한 안철수 후보 캠프에서는 현재 경제민주화를 놓고 불협화음이 나오지는 않고 있다. 다만,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를 끌어들인 후 외부의 비판이 있자, 장하성 교수를 다시 영입해 시작부터 오락가락한다는 비판을 듣기도 했다. 또 일각에서는 장 교수와 캠프의 고문을 맡고 있는 이 전 부총리가 대립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가령 정부의 시장 개입의 경우, 이 전 부총리는 해야 한다는 입장인 반면 장 교수는 하지 말아야 한다는 쪽이다. 안 후보는 <이코노미조선>과의 서면 인터뷰에서 “헌법 제119조 제2항은 소득분배의 공정, 시장지배력 남용금지, 일반 경제력 집중 억제 등 경제주체 간의 조화를 위해 필요한 개입과 조정을 허용하고 있다”면서 “시장실패 부분에 대해 헌법정신, 공동체 가치, 기득권체제 청산에 기초해 정부가 역할을 하는 것은 헌법적 가치를 구현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따라서 일단은 이 전 부총리의 손을 들어주고 있는 모양새다. 대권 3인방에게 내부 혼선만이 골칫거리의 전부는 아니다. 유권자나 외부의 반발도 의식해야 한다. 3인의 후보는 대선 승리를 위해 단 한 표라도 더 얻을 수 있는 쪽으로 움직여야 한다. 그렇다 보니 눈치를 볼 수밖에 없고, 경제민주화 정책이 본질에서 벗어나 엉뚱하게 변질될 수도 있다.
가령 안 후보는 계열분리명령제에 전경련 등이 강하게 반발하자 지난 10월17일 “모든 사람들이 동의하는 부분으로 1단계를 하고, 거기에 따라서 대기업들도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를 권고하는 것”이라며 “그리고 시정이 안 되면 2단계를 할 수도 있다는 것”이라고 한 발 물러섰다. 이는 무소속에다 비정치인 출신인 안 후보가 중도·실용층의 표를 의식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문재인 후보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문 후보는 지난 10월15일 전국상공인들과의 대화에서 참석자들이 경제민주화에 대해 강한 불만을 드러내자 “경제민주화, 좋은 일자리 늘리기 부분에 우려들이 많은데, 일자리를 늘리는 공격적인 재정정책을 통해서 기업, 특히 중소기업의 좋은 일자리를 만드는 데 국가가 많은 지원을 하겠다”며 달래기도 했다. 또한 법인세 인상에 대한 반발에 대해 “국제경쟁력 측면, 중소기업 성장을 위한 측면에서 법인세 부담을 참여정부 때보다 특별히 더 늘릴 생각은 없다”면서 증세에 대해 완화된 모습을 보였다.
여당인 박 후보 측도 보수성향인 기득권층을 잡기 위해서는 강도 높은 경제민주화 방안을 내놓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설령 강도 높은 방안을 내놓더라도 나중에 슬그머니 수위가 낮아질 수도 있다. 특히 박 후보는 지난 10월18일 ‘창조경제’를 일자리 창출을 위한 대선공약으로 제시하면서 경제민주화 논란을 비켜갔다. 경제민주화 공약 수위를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새누리당 관계자는 “김종인 위원장이 당무를 쉬면서 아직 경제민주화 공약이 완성되지 않았다”면서 “곧 발표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해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