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연재, 김연아, 소녀시대. 이들은 활동 분야가 다르지만 닮은 점도 있다. 아이돌 스타라는 점이다. 특히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든 계층에서 큰 사랑을 받는다는 점도 같다. 또 한 가지 공통분모가 있다. 주얼리 브랜드 ‘제이에스티나(J.ESTINA)’의 광고모델로 활동했다는 점이다.
지난 2003년 탄생한 제이에스티나는 처음부터 탄탄한 브랜드 스토리를 갖고 출발했다. 제이에스티나는 이탈리아의 공주로 태어나 불가리아의 왕비가 됐던 실존 역사인물에서 브랜드 모티프를 따왔다. 그녀의 이름은 조반나. 제이에스티나는 조반나 공주의 이름과 이미지, 그리고 이야기를 브랜드 콘셉트로 삼았다.
제이에스티나는 이 시대 ‘공주’를 꿈꾸는 20~30대 젊은 여성들의 판타지를 주목했다. 그 판타지를 충족시켜주는 브랜드라면 성공할 것이라는 판단이 섰다. 그렇게 해서 제이에스티나라는 브랜드가 탄생했다. 손연재, 김연아, 소녀시대를 광고모델로 기용한 것도 브랜드 전략을 바탕으로 한 선택이다. 그들이 ‘예쁘고 단아한 공주’ 이미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제이에스티나 마케팅 담당자는 “제이에스티나는 실존했던 공주의 삶에서 브랜드를 착상해 일관되게 프린세스(공주)의 상을 제시하는 마케팅을 펼쳤다. 손연재, 김연아, 소녀시대 등을 모델로 내세운 것도 공주 이미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은 어원 그대로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의미다. 중요한 것은 그 스토리가 재미있든 이채롭든 감동적이든, 어쨌든 청자(聽者)의 가슴에 와 닿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야만 스토리의 생명력과 전달력이 생긴다.
인류는 태곳적부터 이야기를 통해 의사소통을 하고 기록을 남기고 학습을 해왔다. 설화, 전설, 민담, 역사, 문학 등 모든 것이 스토리 형태를 갖고 있는 점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이야기는 인간의 DNA에 깊숙이 각인된 원초적 커뮤니케이션 형태라는 뜻이다.
사람의 대뇌 피질에는 ‘해마’라는 신경세포 다발이 있다. 이 해마는 사람이 순간순간 받아들이는 수많은 정보 중에 어떤 것을 버리고 어떤 것을 저장할지를 결정하는 기능을 한다. 해마는 새로운 정보, 흥미로운 정보, 중요하게 여겨지는 정보 등을 ‘장기기억’ 영역으로 넘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어떤 정보가 해마의 필터링을 거쳐 뇌 속 깊숙이 저장되려면 새롭거나 흥미롭거나 중요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스토리 혹은 이야기의 중요성이 드러난다.
가장 전통적인 마케팅 활동이라고 할 수 있는 광고는 기본적으로 스토리 구조를 갖고 있다. 실제 광고 제작은 ‘스토리보드’를 바탕으로 이뤄진다. 오래 전부터 광고에는 스토리가 활용됐다는 뜻이다.
하지만 요즘 광고의 스토리텔링은 과거와는 크게 달라졌다. 예전 광고는 제품과 서비스의 기능이나 장점을 이성적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반면 현대 광고는 기업과 브랜드가 가진 철학과 지향점, 정체성을 감성적으로 호소하는 경향이 아주 짙어졌다. 이른바 ‘감성 마케팅’이다. 소비자의 구매 행동이나 브랜드 선호를 촉발하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감성의 영역이라는 점은 이미 과학적으로 입증됐다.

스토리텔링은 가장 강력한 커뮤니케이션
두산그룹은 2010년부터 ‘사람이 미래다’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기업 광고 시리즈를 방송, 인쇄매체 등을 통해 꾸준히 내보내고 있다. 이 광고는 ‘젊은 청년에게 두산이 하고 싶은 몇 번째 이야기’라는 제목을 달고 지금까지 10편이 전파를 탔다.
각각의 광고에는 별도의 핵심 메시지가 있다. 그건 바로 두산의 인재상, 혹은 바람직한 청년상에 대한 생각이다. 몇 가지 옮겨보겠다. ‘좋아하는 것을 해줄 때보다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을 때 신뢰를 얻을 수 있습니다’, ‘부족한 점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좋아질 점도 많다는 것입니다’, ‘늘 원칙을 지키는 예측 가능한 사람이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마지막에는 ‘사람이 미래다, 두산’이라며 끝맺음을 한다.
이 기업 광고 시리즈는 시쳇말로 대박이 났다. 소비자가 뽑은 좋은 광고, 대학생이 가장 좋아하는 기업 광고로 첫손가락에 꼽힐 정도다. 한 광고업계 관계자는 “두산의 기업 광고는 평범하지만 성실하고 믿음이 가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담담하게 그려내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특히 ‘사람이 미래다’라는 카피를 통해 인재를 존중하는 기업문화를 각인시키는 데 상당한 효과를 본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 두산의 기업 광고는 젊은이들에게 큰 어필을 했다. 최근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가장 취업하고 싶은 기업’을 조사하면 반드시 명단에 이름을 올려 놓는 기업이 바로 두산이다.
그런데 참 흥미로운 것은 ‘사람이 미래다’라는 문구를 작성한 주인공이 바로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최근 광고·PR업체 출신 교수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한국광고PR실학회가 주관하는 ‘한국의 광고PR인’ 시상식에서 ‘올해의 카피라이터상’을 수상해 큰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박 회장이 두산의 기업 광고를 통해 취업을 앞둔 젊은이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한편 바른 인재상을 제시했다는 게 학회의 평가였다.
기업이나 브랜드의 스토리텔링 전략은 최고경영자(CEO)가 직접 챙길 때 효과가 극대화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사실 요즘 국내 기업들도 스토리텔링 마케팅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 문제는 스토리텔링 마케팅 과제를 특정 부서나 외부 컨설팅업체에 툭 던져 놓고는 정작 경영진은 고민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김훈철 매드21 대표는 “회사를 가장 잘 아는 CEO는 뒷짐지고 마케팅 실무자들만 나서서 브랜드 스토리텔링 전략을 짠다는 것은 잘못된 접근방식이다. 누구보다도 CEO가 브랜드 스토리를 만드는 데 앞장서서 큰 그림을 그리고 방향을 잡아줘야 한다”고 말했다.
CEO가 스토리텔링 마케팅 주도하라
CEO가 브랜드 스토리를 창조한 대표적인 사례로는 고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자를 들 수 있다. 잡스는 사실 독선적이고 고집불통인 면이 많았다. 하지만 바로 그런 개성이 오늘날 애플 신화의 출발점이 됐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애플 제품의 차별화된 기능과 디자인, 사용자환경(UI)은 사실상 잡스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또한 온갖 굴곡을 다 겪은 잡스의 인생역정이나 잡스 특유의 프레젠테이션 능력 역시 애플 고유의 브랜드 스토리를 구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그렇다면 브랜드 스토리는 어떻게 만들어야 성공할 수 있을까. 나아가 그 스토리를 어떤 방식으로 전파하는 게 효과적일까. 스토리텔링 마케팅 전문가들은 다소 뜻밖의 조언을 한다. 스토리는 ‘만드는’ 것보다 ‘찾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게 골자다.
김민주 리드앤리더 대표는 “스토리텔링은 발명이 아닌 발견이어야 한다. 허구나 과장, 가공을 바탕으로 한 브랜드 스토리는 실체와의 괴리로 인해 오히려 불신을 부를 수 있다. 기업이나 브랜드에는 이미 존재하는 스토리가 있다. 그걸 잘 찾아내면 진정성을 가진 스토리를 만들 수 있다”고 강조했다.
세계적인 생수 브랜드 ‘에비앙’이 딱 그런 사례다. 1789년 알프스 산맥의 작은 마을 에비앙에 어떤 귀족이 찾아왔다. 그는 몸이 아파 요양하기 위해 이곳에 들른 것이다. 어느 날 귀족은 마을 우물물을 마신 후 씻은 듯이 병이 나았다. 너무나 신기했던 나머지 물의 성분을 분석해봤더니 그 속에는 인체에 효험이 있는 미네랄 등의 성분이 다량 함유된 것으로 나타났다.
그로부터 약 90년이 흐른 1878년. 에비앙 주민들은 자기 마을의 생수에 ‘에비앙’이라는 이름을 붙여 판매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에비앙은 ‘단순한 물이 아닌 약’이라는 브랜드 스토리를 담아 전 세계에 팔려나가고 있다.
진정성이 있다고 모든 스토리텔링이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진정성은 알맹이일 뿐, 껍데기를 잘 포장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건 곧 스토리의 형식미에 관한 요건들이다.
김민주 대표는 “스토리텔링은 짧고, 쉽고, 재미있어야 한다. 이게 바로 스토리텔링의 3대 성공요소라고 할 수 있다. 요즘은 너무 길고 재미없고 진정성도 없는 스토리텔링이 난무하는데, 그래서는 결코 소기의 성과를 달성할 수 없다”고 말했다.
‘루이비통’으로 유명한 세계 최대의 명품제국 LVMH그룹. 그 탄생은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이 1980년대 초반 미국 뉴욕에서 한 택시기사로부터 들은 짧은 한 마디에서 비롯됐다.
그는 택시를 타고 가다가 기사에게 별 뜻 없이 “프랑스 하면 뭐가 떠오르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택시기사는 잠시도 주저하지 않고 “크리스찬 디올”이라고 답하는 게 아닌가. ‘에펠탑도 아니고 개선문도 아닌 크리스찬 디올이라….’ 그 순간 아르노 회장의 머리에는 한 가지 생각이 번개처럼 스쳤다. 바로 명품사업을 해야겠다는 아이디어였다. 당시 미국에서 리조트 개발사업을 하고 있었던 아르노 회장은 모든 걸 정리하고 프랑스로 귀국했다. 그리곤 투자회사를 설립했는데, 가장 먼저 한 일이 ‘크리스찬 디올’ 인수였다.
브랜드 스토리의 장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한번 브랜드 스토리를 잘 구축해 놓으면 브랜드 파워가 저절로 눈덩이처럼 커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게다가 브랜드 파워가 커지면서 마케팅 비용까지 대폭 절감된다. 선순환 고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딱히 광고 캠페인을 하지 않는데도 세계적인 브랜드로 입지를 굳힌 ‘할리 데이비슨’이나 ‘스타벅스’가 그런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김훈철 대표는 “브랜드 스토리 마케팅을 하면 시간이 갈수록 브랜드 인지도와 충성도가 높아지게 된다. 특히 소비자 심리와 행동을 잘 관찰해 그 결과물을 브랜드 스토리에 반영하고 연결시킨다면 성공적인 스토리텔링 마케팅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