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일 뮌헨 시내에서 차로 40분 정도 떨어진 펠트키르첸 베스테르함(Feldkirchen-Westerham). 아침, 저녁으로 펼쳐지는 소몰이 행렬 때문에 차들이 10여분간을 왕복 2차선 도로에서 보내야 하는 것 말고는 언제나 평온한 이 독일 남부도시에 고어사(社) 연구·개발(R&D)시설이 있다. 200여명의 연구진이 근무하는 이곳에는 고어사의 최첨단 섬유원단을 연구, 개발하고 고어텍스로 만든 유럽 아웃도어 브랜드제품 성능을 평가하는 곳이다. 외부인의 접근은 철저히 차단돼 있다. 밖에서 보면 여느 평범한 회사건물 같아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첨단시설로 무장돼 있다. 직원들의 복리후생을 책임지는 주요 시설은 모두 건물 내 들어서 있다.
고어는 섬유원단 분야에서는 최고의 혁신 기업으로 통한다. 대표 상품이자 최고의 효자상품인 고어텍스는 설립자 윌 고어의 아들인 밥 고어의 역발상이 빚어낸 역작이다. 지난 2007년 영국 <인디펜던스> 지가 선정한 ‘세상을 바꾼 101가지 발명품’에 전성된 고어텍스는 아웃도어 기능성 섬유의 대명사로 불린다.

고어텍스, 땀은 배출하고 외부 물은 차단
고어는 유명 화학기업 듀폰의 화학 엔지니어로 일하던 빌 고어에 의해 설립됐다. 원래 빌 고어는 듀폰에서 테프론(Teflon)이라는 브랜드로 잘 알려진 합성수지 ‘PTFE’를 활용해 케이블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그러나 회사가 자신의 생각을 잘 받아들여주지 않자 듀폰을 그만두고 자기 집 지하실에 공장(회사)을 차렸는데 이것이 바로 고어다.
고어에 획기적인 변화가 시작된 것은 지난 1969년 윌 고어의 장남 밥 고어가 혁신적인 섬유인 고어텍스를 개발하면서부터다. PTFE를 압출, 성형하는 과정에서 수차례 실패를 거듭하던 밥 고어는 어느 날 우연히 합성수지를 길게 늘어뜨렸다. 이 과정에서 밥은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일반적인 합성수지는 길게 잡아당기면 길이는 늘어나지만 강도는 약해지기 마련인데 PTFE는 강도가 그대로였던 것이다. 확장(Expand)된 PTFE라는 뜻인 ePTFE는 공기가 통과할 수 있는 구멍이 숭숭 뚫린 분자구조로 돼 있어 땀은 쉽게 배출시키지만 외부에서 들어오는 물은 막는 등 구조가 독특했다.
이렇게 탄생한 멤브레인(ePTFE)이 바로 고어텍스의 주원료다. 아무렇지 않게 시도한 도전이 엄청난 결과로 이어지면서 고어텍스는 신소재 섬유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다. 멤브레인은 1평방인치당 구멍이 90억개 이상으로 이뤄져 있다. 구멍 크기가 물방울 입자보다 2만배 이상 작고 수증기 분자보다는 700배 이상 커 활동량이 많은 아웃도어 의류에 적합한 기능성 소재로 사용되고 있다.
실제로 독일 뮌헨의 고어 연구센터에 가보면 고어텍스의 방수, 방풍 기술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여러 과정을 통해 설명해준다. 고어텍스는 8기압에 이르는 높은 수압에서도 물이 전혀 침투하지 않는다. 8기압은 무게로 치면 20㎏의 물건이 누르는 압력이다. 시속 80㎞의 바람을 순간적으로 불어넣어 방풍력을 체크하는 것도 주요 공정 중 하나다.
또 원단과 원단을 이어주는 박음질 위에는 고어텍스 전용 테이프가 부착되는데, 이 부위가 튼튼한지를 확인하기 위해 500시간 동안 세탁기를 돌린다. 우리 몸에서 땀과 함께 배출되는 약산성물질이 섬유의 색이나 짜임에 손상을 주지 않는지도 중요하게 확인하는 부분이다.
고어의 생산 및 연구 과정은 단순히 여기에만 그치지 않는다. 뮌헨 공장에는 실제 비오는 상황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우천 테스트 룸이 설치돼 있다. 여기서는 생산에 들어가기 전 제품이 실제 우천 시 얼마나 탁월한 방수 효과를 내는지를 확인한다.
이 밖에 실제 착용을 통해 얼마나 편안하고 따뜻한지를 확인하는 편안함 테스트, 울이나 사포로 세게 문질러 원단의 마모도를 확인하거나 영하의 기온에서 원단을 수차례 늘였다 펴 구겨짐을 확인하는 공정도 생산과정 전에 반드시 확인하는 부분이다. 금혜영 고어코리아 부장은 “다양한 테스트를 거친 제품에만 품질보증 마크가 붙여지며, 원단에 문제가 있다고 확인되면 즉시 환불해주는 것이 고어사의 오랜 전통”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금 부장은 “우리 원단(고어텍스)으로 만든 일반 아웃도어 브랜드 제품이 우리 기준에 얼마나 부합되는지 제품 출시 전 기능성 여부를 확인하는 것은 고어사만의 고유한 품질관리 원칙”이라고 덧붙였다.
고어는 여러 면에서 21세기 혁신 기업의 대표주자로 통한다. 조직구성부터가 다르다. 고어 내에는 맡은 분야만 있을 뿐 공식적으로 직급이 없다. 공식 회사명도 ‘윌버트 리 고어와 동료들(W. L. Gore & associate)’이다. 회사 내 직원 간 상하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가 파트너다. 업무를 지시하는 상사와 같은 역할은 ‘스폰서’ 직함을 가진 이가 맡는다. 엄밀히 말하면 상사라기보다는 멘토에 가깝다. 갓 들어온 직원들이 사내 분위기에 잘 적응하고 개인의 장기를 잘 발휘할 수 있도록 부서, 업무 배치가 스폰서의 몫이다. 이 같은 동료의식은 윌 고어가 회사를 세울 때부터 시작됐다. 윌 고어가 회사를 세울 때만 해도 미국 내 많은 경영자들은 “종업원을 게으르고 일에 무관심하며 오직 돈만 밝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윌 고어는 정반대로 생각했다. 동양철학으로 비유하면 성선설에 가깝다.
그는 조직 구성원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해주는 것이 기술기업에 있어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고어사 홈페이지에는 고어에 입사해서 고어의 제품을 연구, 개발하고 현장에 이렇게 적용해봤더니 이런 변화가 있었다는 체험기(Join Gore & Change)가 별도로 마련돼 있다.
이런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기술 개발에 매진하는 탓에 고어사가 만든 제품은 의학, 전기화학, 지구공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되고 있다. 가령 의료분야만 해도 대동맥류 치료부터 심장 질환 봉합, 인조 혈관 등에 고어 제품이 쓰이고 있다. 국제우주정거장과 위성프로그램에 사용되는 항공우주 케이블 소재 부문에서도 고어가 강자로 꼽힌다. 일렉트로닉 기타 줄 엘릭시어(ELIXIR) 역시 지난 30년간 동종 업계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아온 제품으로 현재 고어에서 제조되고 있다.

건물 내 다양한 환경체험 시설 구축
뮌헨 기술연구소 입구에는 6~7개 마네킹이 일렬로 전시돼 있다. 얼핏 보면 중세 유럽 스타일의 복고풍 의상과 비슷한데 뒤에 붙은 설명을 보니 골프, 아웃도어 의류다. 왜 이런 옷을 전시하고 있냐고 묻자 연구소 안내를 담당한 토마스 키블러 마케팅 담당은 이렇게 대답했다.
“촌스럽죠. 우리 회사가 주최한 의상 디자인 대회 출품작인데요. 대학에서 의상디자인을 전공하는 학생들에게 우리 제품(고어텍스)으로 골프, 아웃도어 의류를 만든다면 어떻게 디자인하겠냐고 했더니 이렇게 만들었어요. 오해하지 마세요. 이거 절대로 판매되는 옷 아닙니다. 하지만 또 누가 압니까. 나중에 고어텍스로 만든 스포츠 의류가 이렇게 될지…. 이건 (사진) 찍지 마세요. 남들이 고어텍스 옷이라고 오해할 수 있으니까요.”
키블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순전히 ‘혹 이중에 미래 고어텍스 옷이 나올지 누가 알겠는가’라고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