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00만명 당원 중 최고 정점 등극 …
장쩌민 등에 업고 군사위 주석까지 거머쥐어

중국공산당은 지난 11월15일 제18기 중앙위원회 1차 전체회의(1중전회)를 열고 시진핑(習近平·59)을 새로운 당총서기로 선출했다고 발표했다. 이와 함께 시진핑을 새로운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선출했다. 이로써 시진핑은 1921년 창당된 중국공산당의 91년 역사상 처음으로 공개된 회의를 통해 당총서기 겸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선출되면서 당과 군을 동시에 장악한 인물이 됐다. 그는 당총서기 겸 중앙군사위 주석으로 선출된 당일 인민대회당에서 내·외신 기자회견을 갖고 중국의 새로운 최고 지도자로서 다음과 같은 견해를 처음으로 밝혔다.
“민족 부흥은 중국공산당이 짊어진 역사적 사명입니다. 역사의 바통을 이어받아 민족 부흥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고 분투할 것입니다. … 전심전력을 다해 인민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우리 당의 근본 목표이며, 인민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출발점인 동시에 우리가 발을 붙이고 서있는 위치이기도 합니다. 통속적으로 말한다면, 인민들이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인민들이 자신들의 생활을 아름답게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자녀들의 생활도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민생 건설을 더 실질적으로 더욱 촉진하고…”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이날 시진핑 당총서기 겸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의 공식 이력서를 공개했다.
“시진핑, 남, 한족(漢族), 1953년 6월생, 산시(陝西)성 푸핑(富平) 출생, 1969년 1월 당의 공작에 참가, 1974년 1월에 입당, 칭화(淸華)대학 인문사회학원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사상정치교육학과 졸업, 대학원에 진학해서 법학박사 학위 획득
1969~1975년 산시성 옌촨(延川)현 원안역(文安驛) 인민공사 량자허(梁家河) 대대(大隊)에서 지식청년으로 일하면서 당지부 서기를 지냄
1975~1979년 칭화대학 화공학과 유기합성학과
1979~1982년 국무원 판공청 비서 겸 중앙군사위원회 비서로 현역 복무
1982~1983년 허베이(河北)성 정딩(正定)현 당위원회 부서기
1983~1985년 정딩현 당위원회 서기 겸 현 무장부 제1 정치위원
1985~1988년 푸젠(福建)성 샤먼(厦門)시 당위원회 상무위원 겸 부시장
1988~1990년 푸젠성 닝더(寧德) 지방당위원회 서기 겸 닝더 군분구(軍分區) 당위원회 제1서기
1990~1993년 푸젠성 푸저우(福州)시 당위원회 서기, 시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주임 겸 푸저우 군분구 당위원회 제1서기
1993~1995년 푸젠성 당위원회 상무위원 겸 푸저우시 당위원회 서기 겸 시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주임 겸 푸저우 군분구 당위원회 제1서기
1995~1996년 푸젠성 당위원회 부서기로 승진
1996~1999년 푸젠성 당위원회 부서기 겸 푸젠성 고사포(高射砲) 부대 예비역 사단 제1 정치위원
1998~2002년 칭화대학 인문사회학원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사상정치교육 전공, 법학박사학위 획득…”
이후 그는 저장(浙江)성 성장(省長), 저장성 당위원회 서기를 거쳐 2007년에 상하이시 당위원회 서기를 하다가, 2008년 9명의 당중앙 정치국 상무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발탁됐고, 국가부주석으로 기용된 뒤에 2010년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으로 선출됨으로써 현 중국 최고지도자 후진타오(胡錦濤)의 후임자로 내정됐다가 이번에 당과 군을 동시에 장악한 명실상부한 중국의 최고 권력자가 됐다. 물론 그가 이렇게 최고 권력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후진타오의 전임자 장쩌민(江澤民)이 막후에서 강력한 지지를 보냈기 때문이며, 이미 86세에 이른 장쩌민이 막후에서 어떤 간섭을 할 것인가는 관찰의 대상이라고 하겠다. 장쩌민은 후진타오가 당총서기와 함께 당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도 시진핑에게 넘겨주고 깨끗이 뒤로 물러서게 만드는 놀라운 영향력을 발휘한 것으로 알려졌다.
시진핑을 홍콩과 일본의 언론들은 흔히 ‘태자당(太子黨)’이라고 분류해왔다. 아버지 시중쉰(習仲勳·1913~2002)이 마오쩌둥(毛澤東)과 덩샤오핑(鄧小平)으로부터 동시에 인정을 받아 국무원 부총리를 지낸 인물이기 때문이다. 홍콩 언론들은 또 시진핑이 젊은 시절 입당원서를 10차례나 제출했다가 거부당했다는 확인 안 된 이야기까지 소개하기도 했다.

16세 때 아버지 시중쉰 사상문제로 시골마을로 하방(下放)
그러나 중국의 관영 웹사이트인 차이나닷컴(china.com)은 이미 지난 2008년에 “시진핑이 입당원서를 한 차례 거부당한 일이 있으나, 21세이던 1974년 두 번째 제출해서 입당이 허가됐다”고 소개한 바 있다. 처음 입당이 거부된 이유는 당시 문화혁명이 진행되는 가운데서도 개혁개방을 지지하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던 아버지 시중쉰 때문이었으나, 두 번째 입당원서를 냈을 때 “부모가 문제가 있더라도 자녀들에게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는 당중앙의 공식판단에 따라 입당이 허가된 것으로 소개했다. 시진핑이 ‘태자당’이라는 이야기와 10차례나 입당이 거부됐다는 이야기는 서로 상충하는 이야기다. 실제로 시진핑은 아버지 시중쉰의 사상문제 때문에 16세 때이던 1969년 베이징에서 산시성 옌안(延安) 부근의 시골마을로 하방되어 갖은 고생을 하며 험악한 청소년 시절을 보내면서 중국공산당 지방당원으로 시작해서 성장해온 인물이기 때문이다.
2008년 10월 시진핑은 8000만 중국공산당원을 이끄는 9명의 정치국 상무위원 가운데 한 명으로 선출된 뒤 장시(江西)성 지방시찰을 하면서 현지에서 대학생 ‘촌관(村官)’들과 만나 이런 이야기를 했다. ‘촌관’이란 도시의 대학생들에게 지방의 현실을 파악할 수 있도록 벽지의 하급 행정관직을 맡아 일정 기간 일하도록 하는 제도다. 시진핑은 이들 대학생 촌관들에게 “농촌에서 기층(基層)공작을 하는 것은 여러분들의 인생에 좌표를 제시해줄 것”이라며 “젊은 시절 농촌에서 일하면 무엇이 군중(群衆)이며, 군중을 어떻게 존중해야 하는지, 무엇이 실사구시(實事求是)이고, 왜 현실을 존중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준다”고 했다. 자신이 16세 때 농촌으로 하방당해 고생하면서 깨달은, 생생한 체험을 통해 얻은 깨우침을 들려준 것이라는 게 중국 관영 매체들의 전언이었다.
시진핑이 우리의 고1 나이에 하방을 당해 간 곳은 마오쩌둥이 토굴생활을 하던 산시성 옌안에서도 동북쪽으로 70㎞ 깊숙이 들어간 곳에 있는 량자허(梁家河)촌(村)이라는 마을이었다. 마오쩌둥이 1968년 12월 “지식청년들은 농촌으로 가서 가난한 농촌 속에서 재교육을 받으라”고 지시를 했기 때문이었다. 시진핑을 포함한 흰 얼굴의 베이징 청년학생 15명이 배당받아 간 량자허촌이라는 산골마을은 옥수수 국수밖에는 먹을 것이 없는 깡촌이었으며, 그들에게 배당된 숙소는 토굴이었다는 것이 중국 관영매체들의 전언이다. 그들에게 맡겨진 임무는 물이 모자라는 이곳에 둑을 쌓아 저수지를 만들라는 것이었다. 저수지 만드는 임무를 맡은 흰 얼굴의 베이징 청소년들은 이후 20년간 이 일을 해야 했으며, 이들 가운데 일부는 그 지방에 남아 살게 됐고, 일부는 베이징으로 돌아갔으며, 그 가운데에는 당간부로 출세한 인물도 있는데 바로 시진핑이 그 경우라는 것이다. 이들이 만든 저수지는 지금도 남아 기능을 하고 있으며, 베이징에서 온 학생 15명을 포함한 200명이 참가한 저수지 건설 작업을 지휘한 현지의 여성 대대장은 스위싱(石玉興)이라는 꺽다리 처녀였다. 스위싱은 1969년 1월13일 베이징에서 온 흰 얼굴의 애송이 15명을 집합시켰을 때를 이렇게 회상한다고 중국 관영매체들은 전한다...
* 자세한 내용은 이코노미플러스 12월호 210p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