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 생태계의 대표적인 사례인 미국 캘리포니아 실리콘밸리는 세계 여러 정부와 대학들의 집중적인 연구와 모방의 대상이다. 각 국가의 벤처 집중지역을 ‘OO의 실리콘밸리’ 식으로 부르는 그 이면에는 실리콘밸리와 유사할수록 성공한 체제라는 관념이 암묵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이 잘 발달된 창업 생태계를 관찰할 때는 주의가 요구된다. 초기의 창업 생태계 형성과 성장에 기여했던 핵심요소들이 현재의 성숙된 환경에서는 더 이상 발견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실리콘밸리처럼 이미 완숙단계인 창업 생태계의 운영방식이 이제 바닥에서부터 구축되고 있는 생태계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MIT에서 기업가 정신을 교육하고 창업을 지원하는 조직인 ‘Martin Trust Center for Entrepreneurship’의 디렉터인 빌 아울렛은 엑스코노미(xconomy.com)에 기고한 칼럼에서 현재 MIT에서 운영 중인 프로그램이 청년 기업가들에게 성공적인 창업 활동에 필요한 자원을 확보할 수 있도록 좋은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환경이 이 지역의 창업 문화에 긍정적인 피드백을 주는 선순환 고리를 형성하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결과물이 지금과 같은 환경을 제공받지 못했던 창업가 세대들의 성공으로 인해 시작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우리가 MIT와 스탠퍼드대의 창업 환경을 벤치마킹할 때 이 지역에서조차도 첫 세대에 해당하는 기업가들은 지금과는 확연히 다른 환경에서 성공적인 기업들을 일궈왔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스티브 블랭크 스탠퍼드대 교수의 ‘실리콘밸리의 숨겨진 역사’라는 강연에 의하면 MIT에서 파생된 스타트업(신생기업)들이 밀집한 보스턴 인근의 ‘루트 128’ 지역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항공 전력에 대항할 수 있는 기술개발을 목적으로 미 정부가 자금을 지원한 연구소가 그 효시다. 대부분의 연구자금은 전자전 수행능력의 연구와 기술개발을 목적으로 편성된 국방예산에서 충당됐다고 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미·소 간의 냉전이 이어지면서 미 정부의 연구개발 관련 지출은 대부분 소련의 기술전 능력에 맞서기 위한 용도로 집행됐다. 미 국방부는 냉전이 종식될 때까지 전자장비 개발을 위한 자금을 지속적으로 제공했으며 이는 스탠퍼드대를 둘러싼 인근 지역이 현재의 실리콘밸리로 탈바꿈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다시 말해 미 정부의 막대한 자금지원은 적대세력의 침공 위협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1970년대 이후 벤처 투자가들이 기술기반 기업들에 자금을 투자하기 시작하고, 수십년간의 정부의 투자로 인해 축적됐던 지적재산권이 영리기업들에 의해 활용되면서 기술개발과 활용에 대한 정부의 역할이 단계적으로 민간으로 이양돼 온 것이다. 결국 실리콘밸리의 자유롭고 혁신적인 창업환경은 이처럼 정부의 정책과 지원이 자산이 돼 싹텄다고 할 수 있다.

또 실패에 대한 관용적 태도가 처음부터 실리콘밸리 문화의 일부였다고 주장하기도 어렵다. 실리콘밸리의 탄생 과정에 대한 스티브 블랭크의 설명대로라면 초창기의 실리콘밸리는 실패에 관용적이지 않았을 가능성이 무척 높다. 1930~1940년대에 연구소들이 갓 설립됐을 당시 실패란 곧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에 패퇴하거나, 냉전 당시 구소련에 주도권을 내주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늘 부러워하는 창업 문화를 갖고 있는 실리콘밸리에서조차 실패에 대한 인식은 시간이 지나면서 단계적으로 성숙됐다는 의미다. 이는 실패에 대한 관용적인 태도가 혁신적인 생태계 조성을 위한 충분조건이 아니라 오히려 결과적으로 수반되는 필요조건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정부나 대학과 같은 기관에서 창업 교육 프로그램을 기획할 때에는 기업가 정신에 대한 각 문화권의 특성을 고려하는 동시에 각 국가의 창업환경의 부족한 요소를 개선하는 맞춤형 프로그램을 도입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요소는 이미 성숙된 단계의 창업 생태계에서는 자연스럽게 녹아 있어 잘 드러나지 않거나 중요하게 고려되지 않을 수 있다. 이 때문에 선진 사례를 분석할 때에는 맹목적인 수용보다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에 비추어 생각하는 비판적 수용이 반드시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