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저히 퇴사를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8개월 동안 진행했던 프로젝트가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지난 10년 동안 헤드헌팅 업무를 하면서 가장 오랜 기간이 소요된 프로젝트 중 하나였다.
K상무는 다국적기업 M사 한국법인에 대리 경력직으로 입사하여 이제 상무 3년차가 된 성공적인 직장인이다. 고객사에 추천하기 전 평판조회를 해보니 데스크형(책상에서 결재만을 하는 임원)이 아닌 실무형 임원이었다. 열심히 발로 뛰다 보니 M사의 다른 임원보다 많은 프로젝트를 이루었지만 그 성과에 대한 최종적인 보상은 외국에서 더 화려한 스펙을 갖추고 영입된 그의 상사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지난 몇 년간 경기가 안 좋아지면서 미국 본사에서는 그 상사를 몇 달 전 다른 부서로 좌천시켰고 조직은 ‘레이오프(Lay Off: 일시적 해고)’를 하기로 결정됐다. 한국법인에서는 K상무에게 레이오프를 맡기려 했고 K상무는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다. 그런 과정 중에 필자가 K상무를 만나 이직을 제안했고 결국 K상무도 직장생활의 마지막 도전이 될 수 있는 T사 사업부 본부장직을 수락하면서 이직을 진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세 번의 계절이 바뀌는 동안 진행 상황은 매우 다이내믹했다.
K상무의 떠난 마음을 되돌린 오퍼
K상무는 마지막 직장이 될 수 있는 곳으로의 이직이기에 요구조건이 많았다. 그 조건을 고객사와 협의할 때는 놀이기구를 타듯 아슬아슬한 순간도 많았다. 하지만 T사는 K상무가 필요했고 K상무 역시 T사의 비전을 놓치기에는 아까웠다. 결국 K상무의 이직을 위한 연봉 및 처우, 보너스 지급 관련 계약까지 모두 마쳤다. 그런데 그 모든 노력이 허사로 돌아가버렸다.
“T사와 계약서에 사인까지 하셨는데 갑작스럽게 의견을 바꾼 이유가 무엇인가요?” 필자는 애가 탔다. K상무는 답변을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현 회사에서 ‘카운터 오퍼’를 받았습니다.” 역시 그랬구나. 필자는 다시 물었다. “조건은요?” “이직하려고 하는 회사의 연봉 수준만큼 올라가고 총괄책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전화 수화기 넘어 한숨 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필자에게 미안하다고 한다.
결국 더 이상 진행하지 못했다. 아니, 안 했다. T사는 계약에 관한 기득권과 손실을 K상무에게 주장하려 했지만 필자가 중간에서 잘 마무리될 수 있도록 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노력이 되었지만 K상무가 선택한 길을 응원하기로 했다.
K상무는 R&D센터 대표로 임명된 뒤 레이오프를 시행하고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정리되고 나면 자신의 위치가 어떻게 될지 생각했을 것이라 믿는다.
자신도 레이오프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총괄책임이 된 이상 조직을 다시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해 영예를 얻으려 할지도 모른다. T사보다는 지금까지 몸담았던 M사에서 마지막 승전의 기쁨을 얻기 위한 결정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지루한 설득을 하지 않은 것이다.
퇴사하려는 직원에게 카운터 오퍼를 내미는 이유는 뭘까. 결국 회사는 그 직원이 필요하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래서 가끔 일반 구직자들이 헤드헌터를 악의적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있다. 자신의 회사에서 몸값을 올리기 위해 베팅을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사직서를 들고 상사와 상담하면서 “얼마 전 헤드헌터로부터 스카우트 제안을 받았고 지금보다 좋은 조건이어서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 회사에 대한 충성심은 있지만 가정사 때문에 연봉 인상이 절실한 상황이다. 가족도 이직을 원하고 있다”라는 식으로 애드벌룬을 띄우는 것이다.
‘달콤한 제안’에 으쓱하다 ‘쓴맛’ 볼 수도
그런 상담의 효과는 분명히 있다. 설령 이직한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적대적 감정으로 퇴사하는 것이 아니고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의한 결정이라며 감정에 호소할 수 있어 퇴직 후에도 옛 동료들과 유대관계를 유지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또 자신의 능력이 회사에 필요하다면 분명 다른 것들을 협상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실제 이직에 대한 니즈보다 자기 이익을 챙기는 협상도구로 활용하기 위해 헤드헌터로부터 스카우트 제안을 받고 있다고 흘리는 것이다.
더 심한 경우엔 어떤 프로젝트가 한창 진행 중일 때 회사에서 다른 후임자나 대안을 마련할 시간이 부족한 점을 파고드는 계산도 한다. 가장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그 계산은 적중한다. 그런 꿀맛은 나중에 쓴맛으로 변하기도 한다. 회사가 기대하는 실적을 내지 못하거나 프로젝트가 마무리되었을 때 최우선순위의 정리 대상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얄팍한 이익을 위하여 카운터 오퍼를 이용한다면 자신의 직장생활을 단축하는 길이라고 말하고 싶다.
카운터 오퍼는 직장인들이 가장 받고 싶어하는 제안 중 하나다. 자신의 공로나 존재감 등을 인정받아 회사의 특별한 대우를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운터 오퍼엔 ‘명암’이 있다. 단순히 달콤함에 빠져선 안 된다. ‘나의 가치를 드디어 알아보는구나’라는 식의 간단한 이유로 그 조건을 수락하면 안 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우선 그 오퍼의 목적이 보상인지 아니면 필요에 의한 수단인지를 파악해야 한다. 그런 다음 심사숙고해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보상의 의미라면 왜 퇴사하는 시점에서야 제안하는 것인지를 물어야 한다. 그 이유를 알게 되면 자신이 보지 못했던 회사의 사정을 알 수도 있다. 만약 회사의 필요에 의한 수단이라면 그 기대치만큼 자신이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지 객관적으로 생각해봐야 한다. 오퍼를 수락하고 나면 회사에서 해고당하기 전에는 스스로 퇴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밥값을 못하는 내내 눈칫밥을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고 모든 일에는 이유가 꼭 있다. 그리고 ‘빨리’, ‘높이’ 가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멀리’ 가야 하기 때문에 달콤한 오퍼 앞에서는 스스로 객관적인 시선으로 선택을 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