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일금고 금고제작 모습.

지난 2004년 베트남 호찌민의 한 대형 쇼핑센터에서 불이나 건물 전체가 타고 60여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보도 직후 언론의 관심은 사고 원인과 함께 불에 녹지 않은 한 금고로 모아졌다. 해당 제품이 베트남에 공장을 둔 한국계 기업 한미금고가 만든 내화금고(화재가 발생해도 일정시간 내용물을 보호해주는 특수금고)로 밝혀지면서 베트남 금고시장은 판도가 바뀌었다. 내화금고 시장 점유율이 한 자릿수에서 50%대로 높아졌다. 여기에 한국 금고에 대한 평가가 좋아지면서 고가의 미국, 일본 제품과 값싼 중국 제품에 고전하던 우리 제품들은 단번에 시장 점유율을 만회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현금 보관 수요 큰 중동·아프리카 수출 늘어나
최근 우리 금고에 대한 세계 시장의 반응은 뜨겁다. 미국, 일본 제품과 기술수준이 비슷해진 데다 가격경쟁력이 높아지면서 신흥국가를 중심으로 시장 점유율이 높아지고 있다. 관세청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 금고 수출액은 4651만5000달러로 전년의 4277만3000달러보다 8.7% 성장한 것으로 집계됐다. 비단 지난해뿐 아니라 금고 수출이 시작된 이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수출규모가 꾸준하게 늘고 있는 모습이다. 반면 지난해 수입액은 79만5000만달러로 수출액의 1.7%에 불과했다.

이 같은 수출 호조의 배경에는 경기 불황으로 금고시장 수요가 커진 것이 자리 잡고 있다. 세계경제 불안으로 금융상품 투자에 대한 매력이 줄면서 현금 보유 수요가 커진 것이 판매 증가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중동 등 전통적으로 금고 사용을 선호하는 국가들의 경제력이 커졌다는 점도 수요 증가의 또 다른 이유다. 편보현 코트라(KOTRA) 라고스(나이지리아) 무역관장은 “귀중품을 보관하는 내화금고와 중요 서류를 보관하는 내화 파일 캐비닛이 수요가 높다”고 설명했다. 범일금고의 경우 나이지리아 유력 파트너를 통해 나이지리아 금고시장의 60~70%를 차지하고 있다. 편 무역관장은 “나이지리아 최대 바이어인 구바비(Gubabi)사의 경우 최근 용파(Yongfa)라는 중국 기업이 가격이 싸다는 것을 무기로 90일 외상 판매를 제안했지만 한국산에 대한 현지 평가가 좋아 거절했다”고 현지 사정을 전했다. 지난해 8월 KOTRA는 ‘중소기업 수출 유망 품목 시장 동향 및 진출방안’이라는 보고서에서 크로아티아 등 9개 신흥경제국가는 자체 내 경쟁력 있는 금고 제조회사가 없어 수출이 유망하다고 밝혔다. 

금고 제작사인 부일금고는 세계 100여개국에다 매달 컨테이너 65개 분량의 금고를 수출하고 있다. 해외 수출 비중이 98%를 차지할 정도로 절대적이다. 북아프리카국가인 리비아만 해도 지난해 컨테이너 100개 분량의 제품이 선적돼 수출됐다. 박재환 부일금고 이사는 “구체적인 회사명을 밝히기는 어렵지만 미국 등 해외 유명 기업에게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으로 납품하는 수주물량이 오는 2014년까지 10만대나 예약됐다”고 설명했다. 선일금고도 전 세계 100여개국에서 지난해 1200만달러를 벌여들였다. 올해는 1600만달러가 목표다. 선일금고의 전체 매출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70%에 육박한다. 현재 선일금고와 범일금고는 지식경제부의 세계 일류상품에 지정돼 있다. 세계 일류상품 지정 기준은 세계 시장점유율이 5% 이내거나 세계시장 규모가 5000만달러 이상(한국 시장 규모 2배 이상)이면서 연간 수출로 500만달러 이상을 벌어들이는 기업을 말한다. 

투박한 금고에서 화사한 인테리어 가구로 변신
특히 내화금고 분야에서 우리 업체들의 시장점유율은 미국, 일본 등 금고 제작 선진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비결은 높은 기술력에 있다. 내화금고는 영상 1000도에서 1시간 이상 견디는 특수금고로 외부온도가 영상 1000도라도 금고 안 온도는 150~170도를 유지시켜 주는 기술력이 있다. 이 때문에 내화금고는 금속강판을 특수 처리하는 것 외에 강판과 강판 사이에 내화콘크리트와 특수 물질을 집어넣어 열을 차단한다. 지난 2004년 강원도 낙산사 화재 시 거센 불길로 사찰 전체가 전소됐지만 고문서 등을 보관한 금고가 불에 타지 않았던 것도 내화금고의 내구성이 그만큼 뛰어났기 때문이다.

디지털 금고와 같은 정보통신(IT) 기술이 접목된 분야에서도 국내 업체들의 기술력은 상위권에 랭크돼 있다. 고원근 선일금고 부장은 “미국, 영국의 고가 제품들은 안전도 등 금고 본연의 성격에 치중하는 데 비해 우리나라 제품들은 일찍부터 디지털화에 성공해 해외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고 말했다. 버튼식 디지털 금고가 세계 금고시장에 하나의 카테고리가 된 것도 우리 업체들이 주도적으로 생산에 참여하면서부터다. 여기에 최근에는 작은 충격 시 120㏈(기차가 지나갈 때 소음이 100㏈)의 경보음이 작동하면서 보안업체에 자동으로 정보를 알려주는 최첨단 IT기술까지 등장하고 있다. 음성인식 기술이 적용돼 사전 등록된 음성만으로 금고 문을 열 수 있는 기술도 최근 개발됐다. 디플로매트는 CD와 디스켓 등 전산 자료를 보관할 수 있는 철재 금고까지 개발했다. 

방도(도난방지용)금고 분야에서도 우리 업체들의 기술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방도금고는 통상 4~5중 철판으로 외부를 감싸 전기 드릴 등의 공구로 뚫을 수 없도록 설계된 제품군이다. 선일금고의 방도금고는 맨 외곽 철판 두께만 10㎜이며 내부에도 6㎜ 철판이 3~4중으로 둘러싸여 있다. 사실상 측면에서 드릴로 금고를 파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전면부에 유리 패널이 있어 강제로 구멍을 낼 경우 얇은 유리막이 깨지면서 금고가 자동으로 잠긴다. 고원근 부장은 “중국산 제품들은 강판을 조각조각 붙여서 만드는 반면 우리는 통 프레임으로 외형을 만들기 때문에 강도가 차이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가정용금고 시장이 커지면서 칙칙한 외관에서 벗어나 화려한 색상으로 장식한 인테리어 금고도 최근 해외시장에서 호평을 얻고 있다. 선일금고는 루셀이라는 인테리어 금고 브랜드까지 개발해 지난해 백화점에 처음 매장을 열었다. 일반 모델은 132만원,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털 장식이 촘촘히 박힌 고급형은 231만원이며 순금장식이 된 최고급형은 484만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