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체 회장님들을 비롯한 고위 간부들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이들은 바로 비서들이다. 평사원들이라면 하루에 한번 ‘뵙기도’ 어려운 간부들의 하루 일과의 모든 것을 살피고 보좌해야 하는 일이 비서들의 주요 업무. 과연 비서들이 바라보는 상사의 모습은 어떠할까. 현직 비서들의 입을 통해 아랫사람들의 눈에 비치는 상사들의 다양한 모습과 비서들의 고충을 들어봤다.

비서는 ‘중요한 직위에 있는 사람에게 직속되어 있으면서 기밀문서나 사무를 맡아보는 직위’라고 사전적으로 정의되어 있다. 이 ‘사무’에는 포괄적 의미가 담겨 있다. 시대가 바뀌며 단순한 업무 보조가 아닌 비서들의 역할과 책임의 폭도 넓어지고 있다. 많은 상사들이 비서의 역할을 ‘경영의 일부’로 여기고 있다. 한 대기업 사장급 간부의 전직 비서 김모씨는 “한 기업이나 큰 조직을 책임지는 CEO나 간부의 업무를 돕는 일을 하다 보니 사소한 실수나 착오로 인해 기업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사무직이지만 일반 사무와는 다른 특수한 업무로 봐야 한다”고 전했다.

대기업과 공기업, 중소기업 등 여러 기업체의 현직 비서들과 만나보니 현재의 상사는 물론 그동안 모셨던 상사, 그리고 동료 비서들에게 들은 이야기까지 다양한 상사의 모습들이 쏟아져 나왔다. 비서들만이 겪는 직업병과 고충도 남다른 듯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상사복(福)이 임금보다 더 중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그만큼 비서들은 어떤 상사를 만나느냐에 따라 회사 생활의 만족도가 크게 달라지는 직업이라고 한다. 업무 외 시간의 자유 또한 상사의 스타일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5년차 비서 최모씨는 “경조사를 챙기는 일이 가장 힘들다. 회사 전화가 휴대폰으로 연결돼 있어 주말에도 갑자기 연락이 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주말에도 개인적 볼일이나 여유를 포기해야 될 때가 많다”고 털어놓았다.

상사의 커피 취향 암기는 기본
수시로 걸려오는 상사의 전화를 받아야 하는 직업이기에 엉뚱한 에피소드가 벌어지기도 한다. 4년차 비서 조모씨는 “새벽 2시쯤 이사님이 공항에 도착하실 예정이었는데, 전화를 분명히 받고 기사님한테 문자로 알려줬다. 공항 정시 도착이고, A게이트라고까지 카톡을 보냈는데 뭔가 싸한 느낌이 와서 휴대폰을 다시 봤는데 통화목록에 없었다. 꿈속에서 전화를 받고는 실제로 카톡을 보냈던 것”이라는 ‘황당했던’ 경험담을 전했다.

업무시간에도 항시 상사의 지시를 대기해야 하기 때문에 자리를 비울 수 없는 것이 비서들의 숙명. 이 때문에 화장실도 맘 편히 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대기업에서 15년간 일해 온 비서 김모씨는 “상사가 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엔 맘 편히 화장실 가는 것조차 힘들어서 비서로 오랫동안 일했던 분들 중엔 방광염에 걸린 이들도 꽤 있다”고 말했다.

남자 수행비서의 경우 겨울에도 외투를 입지 못하는 이도 있다고 한다. 수행비서 5년차인 한 남자비서는 “사장님은 주로 실내에서 실내로 차로 이동하시지만, 나는 밖에서 심부름하느라 뛰어다녀야 하는데 사장님이 외투를 안 입으셔서 나만 입을 수가 없다. 하는 수 없이 겨울엔 내복을 껴입고 일한다”고 했다.

비서의 업무는 어디까지로 봐야 할까. “정답은 없다”는 것이 비서들의 공통적 대답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초적인 업무는 비서 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커피 심부름이다. 최고령 비서로 유명한 전성희 대성산업 이사는 “커피도 프로답게 즐기면서 타는 것이 진정한 비서의 역할”이라고 말한다.

전 이사의 ‘명언’은 이제 대다수 비서들에게 당연한 업무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중견기업의 한 10년차 비서는 “제 상사의 커피 취향뿐 아니라 간부회의 때 참석하는 모든 간부들, 그리고 자주 찾아오는 손님들의 취향까지 모두 익히고 그에 맞춰 대접을 하려고 한다”고 전했다. 그녀는 여러 명의 간부들이 모이는 회의 때 느끼는 난감함을 이렇게 표현했다.

“차를 어느 분부터 드려야 할지 고민될 때가 많아요. 예를 들어 같은 상무여도 누가 먼저 들어왔고 몇년차인지, 나이에 따라 서로 예민하게 반응하는 분들이 있어요. 회사 규모가 클수록 서열이 복잡해서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아요. 그럴 땐 그냥 차를 가운데 두고 알아서 가져다 드시라고 말하고 싶기도 해요.”

비서들만이 느끼는 직업병도 남달랐다. 전화를 받아 돌려주는 일을 자주 하다 보니 평소 집에서도 ‘9번’을 습관처럼 누르거나, 집에서 과일을 먹을 때도 마치 과일 안주처럼 공들여 깎게 된다는 것. 사소한 업무 같지만 ‘달력을 넘기는 일’도 비서가 챙겨야 할 일이다. 실제로 만나본 비서들 중 ‘달력 넘기는 일’을 잊어 혼이 난 경험이 있다는 이들이 많았다. 한 비서는 “가끔 비서들끼리 만나면 ‘우리가 달력 하나 때문에 이렇게 벌벌 떨어야 돼?’라고 하소연하기도 하지만, 이것도 엄연한 우리의 업무”라고 전했다. 상사들의 개인사를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이들도 그들. 한 비서는 “상사의 불륜 사실을 알고도 모른 척해야 할 때 난감하다”고 털어놓았다.

- 비서들의 입을 통해 총수의 사생활이 노출될 수 있기 때문에 대기업의 비서팀 관리는 매우 철저하다. 이건희 삼성 회장이 수행비서의 부축을 받으며 김포공항으로 귀국하고 있다.
- 비서들의 입을 통해 총수의 사생활이 노출될 수 있기 때문에 대기업의 비서팀 관리는 매우 철저하다. 이건희 삼성 회장이 수행비서의 부축을 받으며 김포공항으로 귀국하고 있다.

서비스직으로 인식하는 시선 아쉬워
‘기혼자’라고 하면 아예 면접 기회조차 주지 않는 회사가 많은 것이 비서직이라고 한다. 몇달 전 직장을 옮기기 위해 10여군데에 이력서를 냈다는 최모씨의 경험담.

“기혼자인지를 항상 물어보는데 결혼했다고 하면 한번도 서류통과가 된 적이 없어요. 이래선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면접에서 일단 나를 알리고 난 뒤 결혼사실을 밝히더라도 그때 밝히자는 마음에 속이고 갔어요. 저의 경력과 포부에 대해 충분히 설명한 뒤에 ‘실은 제가 결혼을 했습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사장님이 일만 잘하면 된다며 신경 안 쓰신다고 하더라고요. 그 말씀을 듣고 이 회사를 위해 충성을 다하자고 각오했죠.”

고용노동부 통계에 따르면 2012년 국내 ‘비서 및 사무보조원’으로 분류된 이들은 총 29만8300명, 이 중 비서직은 2만6000명에 이른다. 하지만 여전히 비서들에 대해 ‘커피 심부름’이나 하는 여직원으로 인식하는 분위기가 남아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점점 영역이 넓어지고 있는 비서들의 권익보호와 정보교류를 위해 국내에서도 지난 1982년 한국비서협회(KAAP)가 설립됐다. 박선아 한국관광대학교 국제비서과 교수는 “기업들도 비서의 전문성을 인정하고 단순한 사무보조 업무가 아닌 비서들의 능력개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설명했다.

 

 TIP

대기업 비서의 제1덕목은 ‘침묵’

대기업의 경우 특히 회장님이나 후계자들을 모시는 비서팀의 관리가 매우 철저하다. 비서팀에 소속된 인원도 적게는 3~4명에서 10명이 넘는 곳까지 인력 구성도 막강한 것이 일반적이다. 업무 외의 ‘사적인’ 생활에서도 비서의 역할이 특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들의 ‘입’을 통해 대기업 총수의 개인사가 노출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침묵’이 가장 필수적인 덕목으로 꼽힌다.

비서들에 대한 관리도 그만큼 철저하다고 한다. 이건희 삼성 회장과 홍라희 여사를 가까이에서 보좌했던 한 인사는 “자택이나 개인적인 공간에서 뵙거나 들은 이야기들을 한번도 외부에서 이야기해본 적이 없다”면서 “심지어 가족들에게도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TIP

비서들이 겪은 비상식적 상사들

과거에 비해 권위적인 상사들이 많이 줄었지만, 어느 회사나 이상한 상사가 한명씩은 꼭 있게 마련이다. 이런 상사들 때문에 비서들이 겪은 몇 가지 에피소드다.

“예전 사장님이 주식을 하셨는데, 주가가 오르면 그날 기분은 최고이고 떨어지면 ‘오늘 누구 한명 걸려봐라’ 이런 분위기였어요. 직원들이 그날의 주가를 살펴 사장님의 눈치를 봐야 하는 어이없는 상황이었죠.”

“오로지 화분에 물을 주기 위해서 토요일마다 격주로 출근한 적이 있어요. 상사가 ‘이 화분에 격주에 한번씩 물을 줘야 하는데 내가 토요일에 주기 시작했으니까 토요일마다 주라’는 거예요. 당시 집에서 회사까지는 1시간30분 거리였는데 30분 동안 화분에 물을 주기 위해서 왕복 3시간을 걸려 토요일에 나가야 했어요. 그 회사에서 1년6개월을 일하고 관뒀는데 주변에서 다들 ‘오래 버텼다’고 칭찬해 주더라고요.”

“아침에 출근했는데 이사님 컴퓨터가 켜져 있기에 봤더니 ‘야동’이 밤새 다운되고 있었더라고요. 당황해서 조용히 닫고 나왔어요. 한번은 업무 지시를 받으러 갔는데 미처 못 끄셨던지 바탕화면에 아주 유명한 포르노물이 떠 있더라고요. 본인도 민망하셨을 것 같아 그냥 바로 제가 꺼드렸어요.”

“아직도 간혹 비서들을 하찮게 대하고 막말이나 성희롱을 하시는 분들도 많아요. 능력보다 외모를 중시해서 채용하는 것도 그 때문이죠. 예전 직장 상사가 따로 밥을 사주겠다고 해서 갔더니 갑자기 옆으로 와서는 무릎에 손을 얹더라고요. 그 일 겪고난 후 그 회사 그만뒀어요.”

 

 Mini Interview | 이민경 한국비서협회 회장

“상사의 막말에서 핵심만 귀담아 들어라”

- 사진: 신승희
- 사진: 신승희

한국비서협회는 3000여명의 현직 비서들이 소속된 단체다. 1982년 창립돼 31년 역사를 가진 단체로, 최고령 비서로 유명한 전성희 대성산업 이사도 이곳 회장을 지낸 바 있다. 2012년 3월부터 현 이민경 회장이 맡아 이끌고 있다. 국회에서 20년 동안 보좌진으로 일하며 7명의 의원을 모신 경험이 있는 이 회장은 비서들과 국회 보좌진을 대상으로 꾸준하게 비서 업무에 관한 강의를 하고 있기도 하다.

이민경 회장이 말하는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성격이 급하고 인내심이 약하다는 점이다. 이 회장은 그래서 비서들에게 항상 인내심을 강조하고 있다. 이 회장은 “비서들의 능력은 급한 성격의 상사를 얼마나 인내심 있게 견디느냐에 달려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다양한 유형의 상사를 모시기 위해선 비서는 자신의 색깔을 없애야 한다고. 이 회장은 “비서는 물이 되어야 한다. 자신 고유의 성격이나 행동 양식을 버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상사에게 맞출 수 있어야 본인도 일하기가 편해진다”고 덧붙였다.

때로 상사들이 감정적으로 격앙돼 ‘막말’을 할 때엔 어떤 노하우로 대처해야 할까. 이땐 ‘상사가 내뱉는 말의 거품을 빼는 것’이 정답이라고 한다. 이 회장은 “상사들이 감정적으로 말할 때는 필요 이상의 말을 덧붙일 수도 있는데 그 안의 ‘핵심’만 기억하고 나머지는 버리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