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나 광물자원뿐 아니라 장기적 관점에서 식량 확보도 매우 중요한 과제다. 쌀값이나 사료값이 너무 올라 대북 지원을 하는 데도 문제가 될 수 있다. 이번 (미국) 순방 이후 귀국하면 해외식량기지 확보 방안을 마련토록 추진할 것이다. 예를 들어 연해주와 같은 지역의 땅을 30〜50년 장기 임차할 수 있을 것이다. 궁극적으로 통일 이후를 대비해 7000만 민족이 먹고살 대책이 필요하다. 해외 부지 확보와 같은 것을 정부가 앞장서 하고 경영은 민간이 나서서 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2008년 4월 이명박 전 대통령은 미국 순방을 다녀오는 도중 기내 기자간담회에서 느닷없이 식량 자원 확보에 대해 언급했다. 이 전 대통령이 해외식량기지 건설을 언급했던 지난 2008년은 전 세계적으로 기록적인 곡물가 파동이 일어난 해였다.
우리 정부가 국가곡물조달시스템을 대대적으로 손보기로 하고 준비에 들어간 것도 그 무렵부터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국내 유통되는 곡물은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는 실정이다. 지난 2011년 우리나라 곡물 자급률은 22.6%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하위권에 머무르고 있다. 쌀 정도가 자급률이 83%로 그나마 안정적일 뿐 밀(1.1%), 옥수수(0.8%) 콩(6.4%) 모두 자급률이 한 자리 수준이다. 이런 이유로 지난 2011년에도 우리나라는 옥수수 900만t, 밀 400만t, 콩 100만t 등을 해외로 부터 들여와 부족분을 채워야 했다.

이명박 정부 식량안보 앞세우며 설립
이러자 학계 일각에서는 “조만간 식량이 무기화되는 시대가 올지 모른다”며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 ‘자급률(自給率)’이 아닌 유사시 식량을 조달해올 수 있는 ‘자주율(自主率)’을 높여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이른바 식량안보, 식량 자주론이 공론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국제 곡물시장은 일반 상품 시장과 거래방식이 다르다. 무엇보다 공급선이 제한적이다. 국제 곡물시장에서는 ‘ABCD’로 통하는 아처대니얼스미들랜드(ADM)·번기(Bunge)·카길(Cargill)·드레퓌스(Dreyfus) 등 4대 곡물 메이저 회사를 빼놓고는 거래가 불가능하다. 지난 2011년 우리나라가 이들 4대 곡물메이저로부터 들여온 것만 전체 수입량의 61%다. 여기에 최근 들어서는 일본 종합상사 미쓰이, 미쓰비시, 이토추 등의 영향력도 커지고 있다. 이들 몇 개 회사가 공급 시장을 쥐락펴락 하다 보니 국제 곡물가는 하방경직성이 점차 뚜렷해지는 모습이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자료에 따르면 곡물가는 값이 뛸 때는 최대 76%까지 오르지만 최대 하락폭은 18%에 불과했다.
자유무역협정(FTA)을 통한 수출경쟁력 향상을 국정과제로 내건 당시 이명박 정부에게 농업은 언제까지 문을 걸어 잠그고만 있어야 하는 분야가 아니었다. 경쟁력이 낮다면 해외에 농장을 조성해 조달해오면 된다는 것이 당시 정부의 논리였던 것. 이 때문에 이명박 정부는 농업의 경쟁력 확보를 정책의 최우선과제로 뒀다. 그런 면에서 해외곡물조달기구인 ‘한국판 카길’은 이명박 정부의 핵심 농업정책이었다.
해외 곡물 조달을 전담할 기구가 윤곽을 드러낸 것은 2010년 2월 무렵이다. 농식품 수출 지원기구인 농수산물유통공사(aT·현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가 안정적인 수입선 확보를 위해 곡물메이저 카길을 모델로 한 국제곡물회사를 세우겠다고 밝히면서 한국판 카길 사업은 본격화됐다. 당시 정부 구상은 곡물 거래 시장의 주무대인 미국 내 회사를 세워, 현지 물량 조달과 소규모 곡물 인수·합병(M&A)을 추진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2011년 4월 농수산물유통공사는 삼성물산·한진·STX 등 3개 민간 사업자와 공동으로 AGC(aT Grain Company·이하 aT그레인)를 미국 시카고에 세웠다. aT그레인에서 삼성물산은 곡물 판매, 한진은 미국 내륙운송, STX는 해상운송을 맡기로 역할분담까지 끝냈다. 당시 기자간담회에서 농수산물유통공사는 산지 엘리베이터(현지 내륙운송시설), 강변 엘리베이터, 수출 엘리베이터를 확보해 곡물 유통망을 구축하고 첫 해부터 콩 5만t, 옥수수 5만t을 국내로 들여올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시행 5년 차인 2015년부터는 연간 215만t의 곡물을 안정적으로 조달해오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펼쳤다.

미국 미시시피 강변에 있는 일본 젠노 소유 곡물 저장탑
용어설명
카길(Cargill)
카길은 설립자인 카길과 맥밀런 가족이 경영을 책임지는 다국적 곡물기업으로 미국 미네소타에 본사를 두고 있다. 미국 내 비상장 기업 중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카길은 기업 경영 상당수가 베일에 싸여 있어 일부에서는 곡물업계 마피아라고 부른다.
엘리베이터 정책 갈팡질팡으로 기회 놓쳐
그러나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지금, 한국판 카길 사업은 좌초될 위기에 처해 있다. 현재 관련 업계에는 ‘aT그레인이 사실상 청산 절차에 들어갔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실제로 설립 후 2년간 aT그레인이 현지에서 확보해 국내에 들여온 물량은 첫해 콩 1만1000t을 제외하고는 전무하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일이 꼬인 걸까. 식품업계에서는 ‘한국판 카길 프로젝트’를 가리켜 국제 곡물 유통 구조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의욕만 앞세운 ‘총체적 부실’이라고 설명한다. 이들은 무엇보다 곡물 엘리베이터(생산자로부터 곡물을 모은 뒤 건조, 저장, 분류하는 시설)와 관련된 정책을 자주 바꾼 것이 실패로 이어졌다고 주장한다.
곡물 유통 시장에서 엘리베이터는 가장 중요한 핵심시설이다. 미국의 경우 전국에 산재된 소규모 산지 엘리베이터에서 물량이 모아지면 이를 미시시피 강과 같은 대규모 하천 주변의 강변 엘리베이터로 보낸다. 여기서 모아진 곡물은 강을 따라 농산물 수출항인 뉴올리언스(루이지애나주 도시)나 포틀랜드(오리건주 도시)에 위치한 대형 수출 엘리베이터로 옮겨진다. 그런 면에서 초기부터 한국판 카길 사업의 성패는 곡물 엘리베이터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확보하느냐에 달려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당초 aT그레인은 10기 정도의 산지 엘리베이터를 인수하고 강변 엘리베이터나 수출 엘리베이터에는 일정 부분을 지분에 참여하는 투 트랙(Two Track) 방식을 준비했었다. 한 민간곡물업체 관계자는 “그러나 이러한 우리 정부의 전략은 곡물 메이저들의 벽에 부딪쳐 초기부터 난항을 겪었다”고 설명했다. 이들 4대 메이저 곡물 회사는 미국·브라질·아르헨티나·호주·캐나다 등 세계 주요 곡창지대를 장악한 세계 곡물계의 큰손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정부가 대놓고 식량안보 등을 내세우며 곡물메이저에 대항하는 회사를 세우겠다고 선언하자 세계 곡물시장에서 자연스럽게 ‘비토(거부)’ 분위기가 형성됐을 거라는 설명이다. 한석호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곡물팀장)은 “일본 종합상사들도 동양인에 대한 거부감을 떨쳐가며 10년 동안 조용히 추진해 인수에 성공했는데 우리는 이와 정반대로 공개적으로 엘리베이터를 인수하겠다고 했을 때 누가 제값에 팔 생각을 했겠는가”라며 정부 정책이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졌다고 비판했다. 관련업계에 따르면 실제로 aT그레인은 산지 엘리베이터를 보유한 중소규모 기업 몇몇과 접촉했지만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을 제시하는 바람에 실제 계약으로 이어지지는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엘리베이터라는 난제에 부딪치면서 aT그레인에 참여한 민간업체들과의 협력시스템은 아무런 성과도 없이 끝났다. 주주로 참여한 한 민간업체 관계자는 “당초 민간의 발빠른 곡물 수급 노하우를 배우려던 정부 계획은 설립 1년 만에 사실상 물거품이 됐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그 전까지 민간업체가 참여한 부분은 한진이 미국 내 육로수송을 진행한 것이 전부였다.
국회, 올해까지 성과 없으면 예산 환수 계획
이러자 정부는 지난해부터 전략을 산지 엘리베이터 인수에서 수출 엘리베이터 지분 참여로 바꿨다. 하지만 수출 엘리베이터 역시 4대 곡물메이저가 장악하고 있어 진입장벽이 너무 높았다는 것이 문제였다. 현재 미국 내 건설된 수출 엘리베이터 58개 중 43%인 25개가 4대 메이저회사 소유다.
이때 농수산물유통공사가 찾은 대안은 국내 기업인 STX팬오션이 메이저 곡물회사 번기, 일본 종합상사 이토추와 공동으로 세운 곡물유통회사 EGT(Export Grain Terminal) 내 STX팬오션 지분을 매입하는 것이었다. STX팬오션은 지난 2009년 공동으로 자본금 2억달러 규모의 EGT를 설립했으며 지분은 번기가 51%, 이토추가 29%, STX팬오션이 20%를 갖고 있었다. 한 정부 관계자의 설명이다.
“2011년, 2012년 투입된 정부 예산이 640억원 정도 있어 20% 지분(약 430억원)을 구입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번기, 이토추 쪽에서 원한 것은 ‘앞으로 관련 시설을 추가적으로 지어야 하는데 당신네(농수산물유통공사)가 꾸준하게 돈을 댈 수 있는가’였다. 그 부분에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자 두 회사는 우선매수권을 행사해 STX팬오션 지분을 사들였다.”
당시 유동성 위기 때문에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를 밟고 있던 STX팬오션으로선 한 푼이라도 현금화시키기 위해서 EGT 지분을 매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 과정에서 정부는 STX팬오션의 EGT 지분을 매입할 경우 민간업체가 참여하는 또 다른 곡물조달기구를 준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비밀리에 진행되던 지분협상이 이토추, 번기 인수로 끝나면서 이 계획 역시 사실상 중단된 상태다.
한국판 카길 사업에 정통한 한 소식통은 “복지예산이 늘어나는 마당에 정부에다가 뚜렷한 성과도 내지 못한 이 사업에 추가적으로 수천억원씩 예산을 지원해 달라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더군다나 이 사업이 제대로 되지 않자 국회를 비롯한 언론이 공개적으로 사업을 비판하면서 협상과정에서 주도권을 가지지 못했다”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현재 한국판 카길 사업은 더 이상 물러설 길이 없어 보인다. 이 사업은 매년 국정감사를 비롯해 주요 국회 업무보고 때마다 국회 해당 상임위인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 소속 국회의원들의 단골 지적사항이 돼버린 지 오래다. 현재 국회는 시행 3년째인 올해까지 가시적인 성과를 내지 못할 경우 지원 예산 모두를 회수하겠다는 입장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최근 와서는 사업성 자체에 의문을 표시하는 의견도 많아지고 있다. 한석호 연구위원은 “적정 곡물가는 결국 마지막 단계에 있는 실수요자가 결정하는 것인데 aT그레인과 같은 정부 출자 기구가 조달해온 값이 현재 거래 방식보다 쌀지는 미지수”라고 지적했다. 현재 우리나라는 주요 곡물관련 협회가 입찰공고를 내고 여기에 4대 곡물 메이저 등이 참여해 가장 입찰가를 낮게 쓴 곳을 선택하고 있다. 최저가 낙찰제가 정착돼 있다 보니 aT그레인을 통해 들여온다고 해도 수익성은 높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초기부터 제기된 지적이었다. 당초 사업 참여를 추진하던 CJ가 막판에 불참을 선언한 것도 실효성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aT그레인 사업이 정상 궤도에 오르려면 조달시스템 전체를 바꾸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가운데 식량안보와 관련해 학계 논란은 여전히 뜨겁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무리한 투자냐, 유사시를 대비한 투자냐를 놓고 팽팽한 줄다리기를 이어가고 있다. 김한호 서울대 농경제학과 교수는 “일본도 지난 1960년대 말부터 시작해 오늘날 생산단계부터 조달까지 일관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40~50년이 걸렸다”면서 “우리의 식량주권을 누구한테 맡기느냐는 중요한 문제인 만큼 장기적인 투자가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국민적 합의가 선행돼야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