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아버님 댁에 보일러 놓아드려야겠어요”라는 광고 문구가 기억나는가. 1990년대 초반 경동나비엔(당시 경동보일러)이 히트시킨 연작 TV광고 ‘효(孝) 시리즈’의 핵심 메시지다. 시골에 계신 노부모가 한겨울 추위를 덤덤하게 이겨내는 장면이 흐르다가 마지막 대목에서 여성 내레이터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건네는 한 마디. “여보, 아버님 댁에 보일러 놓아드려야겠어요!” 이 광고는 그 시절 시쳇말로 대박을 쳤다. 경동보일러는 ‘효도보일러’라는 별칭도 얻었다.
그 후 20년이 흘렀다. 최근 몇 년 사이 경동나비엔의 TV광고는 ‘국가대표 보일러’가 핵심 카피다. 세계 난방기기 시장에서 거두고 있는 빛나는 성과를 함축한 표현이다. 물론 “왜 당신들이 국가대표냐”며 종종 딴죽을 거는 부류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경동나비엔은 국내 가스보일러 시장점유율 1위인 데다 보일러·온수기 수출 실적도 1위다. 사실을 말할 뿐이니 시비를 건 쪽도 결국 머쓱해질 수밖에 없다.
올해 경동나비엔은 “보일러, 여기까지 왔다”라는 카피를 앞세워 자체 개발한 첨단기술을 소개하는 TV광고 시리즈를 내보내고 있다. 스마트폰으로 보일러를 원격제어하는 기술과 보일러가 스스로 전기를 생산하는 기술이 전파를 탔다. 단순한 기술력 과시가 아니다. 실제 경동나비엔은 지난 9월 국내 최초로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앱)을 통한 원격제어는 물론 실내온도 조절 음성안내 기능도 장착된 ‘나비엔 스마트 TOK’이라는 신제품을 선보였다. 이를테면 ‘스마트 보일러’ 시대를 연 셈이다. 게다가 고유의 보일러 기술과 스털링엔진(Stirling Engine: 외연(외부연소)기관의 일종)을 통합한 가정용 초소형 열병합 발전 시스템도 개발했다. 이쯤 되면 보일러가 그냥 보일러가 아닌 셈이다. 서로 다른 분야의 이종(異種) 기술을 결합한 ‘창조적 융합상품’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듯싶다.
때로는 심금을 울리고, 때로는 도발적이며, 또 때로는 찬탄을 이끌어낸 경동나비엔의 TV광고를 서두부터 꺼낸 이유가 있다. 물론 광고 자체도 뇌리에 깊이 박힐 만큼 호소력이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경동나비엔이 한국 난방기기 산업 역사에서 남들이 하지 않는 무언가를 선구적으로 만들어왔다는 점을 말하기 위해서다. 국내 시장점유율 1위라는 성적표도, 또 해외 시장에서 국가대표라고 생각하는 자부심도, 그 원천은 항상 한발 앞서 신기술과 신제품을 내놓으려고 노력했던 경동나비엔의 ‘퍼스트 무버(First Mover: 선발자)’ 정신에 있다. 광고는 그 결실을 솔직담백하게 반영한 것일 뿐이다.

글로벌 난방기기 업계의 ‘퍼스트 무버’
“현재 북미 온수기 시장에서 점유율 1위를 하고 있는 일본 린나이 제품이 ‘아반떼’급이라면 경동나비엔 제품은 ‘에쿠스’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품질, 성능, 가격 등 모든 면에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북미 시장에서 마케팅 슬로건으로 ‘온수기의 캐딜락’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최재범 경동나비엔 대표와의 인터뷰는 북미 온수기 시장 현황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됐다. 북미 지역은 단일시장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온수기 시장으로 꼽힌다. 더욱이 북미 시장은 모든 제품 분야에 걸쳐 명실상부한 최대 선진시장이다. 북미 1등 제품은 품질, 성능, 브랜드파워 면에서 세계 일류로 평가 받는다. 따라서 북미 시장은 진정한 글로벌 기업이 되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필수적인 관문 성격을 띤다.
현재 경동나비엔은 ‘나비엔(Navien)’이라는 고유 브랜드를 앞세워 북미 온수기 시장에서 강력한 한류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특히 ‘순간식 콘덴싱 (가스)온수기’ 시장에서는 5년 연속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전체 순간식 온수기 시장에서는 2위, 벽걸이 가스보일러 시장에서도 2위에 올라 있다. 경동나비엔은 2008년 처음 북미 시장에 제품을 출시했다. 불과 5년 사이 북미 난방기기 시장에서 정상급 브랜드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온수기는 크게 순간(瞬間)식 온수기와 저탕(貯湯)식 온수기로 나뉜다. 순간식 온수기는 수배관(물이 흐르는 배관)으로 물이 흐름과 동시에 가스버너가 점화하면서 물을 데우는 방식인 반면 저탕식 온수기는 물탱크를 가열해 뜨거운 상태를 계속 유지하면서 필요할 때마다 물을 빼내 쓰는 방식이다. 당연히 순간식이 저탕식에 비해 열효율이 높을 수밖에 없다. 통상 저탕식의 열효율은 60%선, 순간식은 80%를 약간 웃돈다. 그런데 경동나비엔의 순간식 콘덴싱 온수기는 무려 98.8%의 세계 최고 수준 열효율을 자랑한다. 사용 연료를 거의 100% 에너지로 활용한다는 뜻이다. 당연히 연료비도 훨씬 적게 소요된다. 북미 시장 돌풍의 배경이다.
특히 경동나비엔이 2012년 하반기 출시한 북미향(向) 콘덴싱 온수기 신제품 ‘NPE’는 북미 온수기 시장의 패러다임을 바꿀지도 모른다는 평가까지 듣고 있다. 북미 온수기 시장은 저탕식이 약 90%로 주류를 이룬다. 열효율이 낮은 저탕식을 많이 쓰는 까닭은 물론 있다. 가스 인프라 문제다. 북미 지역의 가스배관은 대부분 낮은 가스압력에 맞춰 설치됐다. 그런데 순간식 온수기를 쓰려면 가스압력이 높아야 하기 때문에 가스배관을 교체해야 한다. 그런 불편함 때문에 에너지 낭비가 심한 저탕식 온수기를 참고 썼던 것이다. 하지만 NPE가 이 문제를 일거에 해결했다. 즉 낮은 가스압력으로도 원활하게 작동하는 순간식 온수기를 선보인 것이다.
현재 미국 정부는 고효율 에너지기기를 적극 장려하는 정책을 펼치고 있다. 소비자들도 정부 정책에 호응해 점차 저탕식 온수기를 순간식 온수기로 바꿔나가고 있다. 경동나비엔 NPE는 이런 흐름에 불을 댕길 것이라는 전망이다. 실제 경동나비엔의 미국 현지법인 ‘나비엔 아메리카’는 올해 상반기 매출액이 전년 동기 대비 무려 71%나 성장했다. 그 덕에 경동나비엔의 상반기 수출액도 전년 동기 대비 45% 이상 증가했다. 올해 미국 법인 매출액은 1억달러를 돌파할 것이라는 예상이다.
더욱 주목할 것은 ‘나비엔’ 브랜드가 북미 온수기 시장에서도 이른바 ‘하이엔드(High-end: 고급, 고가)’ 제품으로 통한다는 점이다. 국내 제조업체 가운데 처음부터 해외 하이엔드 시장을 타깃으로 진출하고, 나아가 진출 초기부터 성공을 거둔 경우는 역사적으로도 드문 일이다. 그러기에 경동나비엔의 북미 시장 성공 스토리는 더욱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는 평가다.
경동나비엔은 2006년 국내 난방기기 업계 최초로 미국 현지법인을 설립하고 북미 시장 공략에 나섰다. 당시 북미 온수기 시장은 린나이를 비롯한 일본 기업들의 영향력이 컸다. 90년대 후반에 북미 시장에 진출한 린나이가 시장 1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경동나비엔은 기존의 순간식 온수기 시장을 파고들기 위한 비장의 승부수를 던졌다. 20여년간 축적한 ‘콘덴싱(Condensing: 응축)’ 기술을 가스온수기에 접목한 이른바 ‘순간식 콘덴싱 온수기’라는 새로운 제품을 선보인 것이다.



콘덴싱 기술은 보일러가 연료를 연소하고 배출시키는 열(잠열: 물질의 증발, 응축, 융해 등 상태변화에 따라 흡수 또는 방출되는 열)을 재사용함으로써 에너지 효율을 극대화하는 한편 배기가스(온실가스)는 줄여주는 고효율·친환경 보일러 기술이다. 일반 보일러와 콘덴싱 보일러는 일반인들도 금세 식별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일반 보일러는 영상 120도 이상의 뜨거운 배기가스와 수증기를 배출하지만 콘덴싱 보일러는 영상 45도 안팎의 저온 배기가스를 배출한다. 따라서 연도(煙道 : 굴뚝)에 손을 대보면 일반 보일러는 화상을 입을 정도로 뜨겁지만 콘덴싱 보일러는 미지근한 열만 느껴진다.
경동나비엔은 1988년 국내는 물론 아시아 최초로 콘덴싱 가스보일러(당시 제품명 ‘터보’)를 선보이며 콘덴싱 보일러 시대를 열어 제쳤다. 세계 최초로 콘덴싱 보일러를 출시한 네덜란드 네피트(Nefit)사와의 기술제휴를 바탕으로 당시 유럽 일부 국가에서만 주목하던 고효율·친환경 콘덴싱 기술을 선구적으로 보급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만 해도 국내 보일러 업계는 콘덴싱 기술에 무관심했다. 하지만 경동나비엔은 꾸준한 연구개발을 통해 세계 수준의 콘덴싱 기술을 확보해나갔다. 아울러 국내 콘덴싱 보일러 시장 확대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2000년대 들어 국내 보일러 업체들은 하나 둘씩 콘덴싱 보일러를 선보이기 시작했고, 최근에는 콘덴싱 보일러가 대세로 정착하기 시작했다. 2009년에는 정부가 20가구 이상의 신축 공동주택에 고효율 보일러(콘덴싱 보일러) 설치를 의무화하는 법령을 제정했다. 시대를 앞서 내다본 경동나비엔의 통찰과 뚝심이 비로소 꽃을 피우게 된 셈이다.
보일러와 온수기는 기본적인 구조가 동일하다. 다만 보일러는 난방·온수 겸용이고, 온수기는 온수 전용이라는 점만 다르다. 보일러·온수기는 크게 버너, 수배관, 열교환기(주로 열의 회수를 목적으로 하는 장치) 등 3가지 부분으로 나뉜다. 그 중에서도 열교환기는 제품 성능을 좌우하는 가장 핵심적인 부품이다. 경동나비엔은 세계 최초로 스테인리스 스틸을 소재로 한 열교환기를 상용화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스테인리스 스틸은 크롬이나 니켈을 포함하는 합금강으로 내식성이 우수한 특징을 지닌다. 최재범 대표의 말이다.
“경동나비엔의 콘덴싱 기술은 스테인리스 스틸 열교환기의 설계·제조 기술이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보일러용 열교환기를 대부분 구리(동)나 알루미늄으로 만들었는데, 내구성이 떨어진다는 게 약점이었죠. 하지만 경동나비엔은 수많은 시도 끝에 스테인리스 스틸 소재로 열교환기를 개발해 상용화하는 데 성공한 겁니다.”
경동나비엔은 세계 수준의 기술력과 품질력을 앞세워 해외 시장 확대를 가속화하고 있다. 현재 경동나비엔의 수출 대상 국가는 미주, 유럽, 러시아 등 30여개국에 이른다. 수출 비중은 미국이 가장 높고 그 다음이 러시아다. 중국에도 생산·판매를 겸하는 현지법인을 운영 중이다. 중국은 사회주의 체제의 영향으로 중앙난방의 비중이 절대적이다. 하지만 부자들을 중심으로 개별난방 수요가 증가하면서 향후에는 미국, 러시아 다음 가는 큰 시장이 될 것이라는 게 경동나비엔의 기대다.

최재범 경동나비엔 대표는 2020년 세계 시장 1위가 되기 위한 계획을 설명했다.
2020년 글로벌 난방기기 시장 넘버원 도전
동토의 나라 러시아는 가스보일러 시장이 급성장하고 있다. 경동나비엔은 1994년 일찌감치 러시아에 진출한 이래 현지 시장에 특화된 제품을 선보이며 점차 입지를 확대해왔다. 2009년에는 러시아 최대의 난방기기 유통업체와 5년간 최대 30만대 규모의 가스보일러 장기 공급 계약을 맺는 성과도 거뒀다. 이 계약은 러시아 시장 공략의 큰 전기가 됐다. 2012년 러시아 벽걸이 가스보일러 시장에서 경동나비엔이 1등에 오른 것이다.
경동나비엔은 러시아 시장에서도 ‘나비엔’ 브랜드를 사용하고 있다. 대다수 제조업체들이 수출물량 확대를 위해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이나 제조업자개발생산(ODM) 방식을 취하는 것과 달리 경동나비엔은 고유 브랜드를 고수하는 게 원칙이다. 경동나비엔의 회사명에도 쓰이는 나비엔은 안내자(Navigator)와 에너지·환경(Energy·Environment)에서 각각 앞 글자 Navi와 En을 따온 말이다. 여기에는 환경친화적인 에너지기기 전문기업을 지향하는 경영이념이 담겨 있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경영이념을 담은 브랜드를 함부로 대체할 수 없다는 장인(匠人)의 신념 같은 것도 느껴진다.
“러시아 난방기기 시장은 글로벌 시장을 좌우하는 유럽 유수의 기업들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그 기업들이 ‘나비엔’을 은근히 견제하는 게 느껴져요. 사실 글로벌 난방기기 업체들은 열교환기나 수배관 등을 협력업체로부터 공급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핵심부품을 모두 내재화했기 때문에 설계 적합화와 품질 보증 면에서 글로벌 경쟁사들보다 비교우위에 있다고 봐요.”
현재 세계 난방기기 시장에서 경동나비엔은 4~5위권에 위치해 있다. 세계 1위는 독일의 글로벌 기업 보쉬가 차지하고 있다. 그 뒤로는 바일란트(독일), BDR(네덜란드), 비스만(독일) 등이 있다. 판매량 기준으로 보쉬는 연간 170만~180만대로 경동나비엔(약 80만대)과는 100만대 정도의 격차를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경동나비엔은 2020년까지 매출 2조원을 달성하며 세계 난방기기 시장 넘버원 기업으로 도약한다는 원대한 계획을 추진 중이다. 그 발판으로 삼기 위해 경기 평택시 서탄면에 연간 150만대의 보일러·온수기 생산능력을 갖춘 대규모 신공장을 짓고 있다. 이 공장은 단일 난방기기 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다.
경동나비엔은 서탄 신공장이 완공되면 기존 공장과 함께 연간 최대 230만대의 생산능력을 확보할 전망이다. 두 공장이 풀가동된다면 글로벌 넘버원의 꿈도 순조롭게 이뤄질 것이라는 계산이다.
지난해 정부는 경동나비엔을 이른바 ‘월드클래스 300(World Class 300)’ 대상 기업으로 선정했다. 국내 난방기기 업계 최초이자 유일한 케이스다. ‘월드클래스 300’은 정부가 성장 의지와 잠재력을 갖춘 중소·중견기업 300개사를 선정해 2020년까지 세계적 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사업이다. 경동나비엔의 중장기 경영계획과 정부의 판단이 오산이 아니라면, 2020년께 우리나라는 또 하나의 글로벌 넘버원 브랜드를 보유하게 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