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화 이화여대 대학원 디지털미디어학부 교수는 서른 살도 되기 전인 1993년 이른바 ‘정조 독살설’을 모티브로 삼은 역사소설 <영원한 제국>을 발표하며 단숨에 젊은 거장 반열에 올랐던 소설가다. 그는 95년부터 대학 강단을 일터로 후진양성과 창작활동을 병행해왔다. 지난해에는 스토리 창작을 돕는 ‘스토리헬퍼(Story Helper)’라는 특별한 소프트웨어를 선보이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새삼 세상에 환기시키기도 했다.

이인화(48) 교수는 요즘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연구실과 충북 제천의 한 콘도를 오가는 생활을 하고 있다. 제천의 콘도는 소설을 집필하는 그만의 공간이다. 스스로를 번다한 사회적 관계망에서 격리시킴으로써 창작에만 몰두하기 위해 마련한 장소다.

그는 올해 안에 출간할 계획으로 ‘밀수꾼’을 주인공으로 하는 차기작을 쓰고 있다고 했다. 어떤 내용인지 궁금해 넌지시 물어봤다. 솔직히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그는 뜻밖에도 대략적인 줄거리를 술술 풀어헤쳤다.

“우리나라는 1950년대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해상밀수가 횡행했습니다. 생필품 등 소비재가 크게 부족했던 시절이어서 밀수시장에서는 양복원단, 우산, 의약품, 사탕까지 사고 팔았죠. 그 시대에는 밀수로 큰돈을 번 사람들도 많았어요. 이를테면 ‘한국 자본주의의 서부시대’였죠. 저의 스무 번째 소설이 될 이 작품에서 밀수로 부자가 된 집안이 망가지는 이야기를 쓸 생각입니다. 주인공은 여자 밀수꾼 ‘망망’입니다. 책 제목도 ‘망망(茫茫)’으로 결정했어요. 아 참, 이거 너무 많이 이야기한 것 같네요. 자칫 스포일러(Spoiler: 영화, 소설 등의 줄거리를 미리 밝히는 행위)가 되겠어요, 하하하.”

이 교수는 “내가 독자로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을 쓰고 싶었다. 체면이나 문학적 평가, 판매량 등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첫 소설 작품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가 1992년에 나왔으니, 그의 소설가 경력도 20년을 훌쩍 넘었다. 그 세월만큼 농익은 삶의 철학 덕분에 욕심을 내지 않는 것이리라. 

그는 몽블랑 브랜드의 만년필 세 자루와 샤프펜슬 한 자루를 가죽케이스에 담아 항상 휴대한다. “몽블랑은 작가로서 부릴 수 있는 유일한 사치”라며 껄껄 웃었다. 아이디어나 단상을 재빠르게 적어둘 수 있는 메모수첩도 필수 휴대품이다. 스마트폰 메모장은 자주 이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연구실 책상 한편에는 창작노트도 여러 권 쌓여 있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아날로그 향기’ 가득한 소설가의 전형이다. 그런 그가 창작 지원 소프트웨어를 개발했다니! 어찌된 영문일까.

콘텐츠산업 저변 넓힐 ‘스토리헬퍼’ 개발
“우리나라는 각계각층에 스토리를 쓸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각자의 직업세계에서 쌓은 경험과 통찰을 글로 쓰려고 하는 전문가들을 예로 들 수 있죠. 그런데 초보작가에게는 스토리라인을 잡는 것이 ‘문턱’이 되기 때문에 막상 글을 쓰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글쓰기를 돕고자 하는 게 바로 스토리헬퍼의 개발 동기였죠.”

스토리헬퍼는 지난해 7월 발표됐다. 이 교수의 동료인 김명준 교수가 함께 개발에 참여했고, 연 인원 100여명의 학생들이 데이터베이스 구축작업에 많은 힘을 보탰다. 엔씨소프트도 중요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등 후원자로 나섰다.

스토리헬퍼는 스토리가 잘 만들어졌다고 평가되는 대표적인 영화·애니메이션 1400여개 작품을 엄선한 뒤, 그 속에서 11만6000여개의 시퀀스(어떤 상황의 시작부터 끝까지를 묘사하는 이야기나 장면의 단위)를 추출해 데이터베이스로 만든 것이다. 사용자가 자신이 구상한 스토리의 장르, 인물, 주제 등 주요 요소를 29개 옵션에 따라 선택하면 여러 개의 스토리 모형(모델)을 예시해주는 게 스토리헬퍼의 핵심 기능이다. 스토리헬퍼는 지난 2월까지 1만6000여명의 회원을 확보하면서 예비작가들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다.

“미국 작가 존 그리샴은 변호사를 하다가 소설을 썼고, 로빈 쿡은 의사를 하다가 소설을 썼어요. 미국, 캐나다 등 북미 국가에서는 초등학교부터 대학원까지 글쓰기 교육을 아주 확실하게 합니다. 그게 문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도 작가가 될 수 있는 토양이 됐고, 나아가 콘텐츠산업의 힘이 된 거죠.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글을 쓰고 싶어도 가장 기본적인 줄거리를 못 잡다 보니까 어렵죠. 저는 스토리헬퍼가 스토리를 쓰고자 하는 모든 분들께 도움이 될 거라고 믿습니다.”

요즘 콘텐츠산업은 사실상 경계가 무의미해졌다. 소설, 만화, 영화, 드라마, 뮤지컬, 연극 등이 서로 동일한 ‘스토리’를 토대로 제작되는 경우가 크게 늘어났다. 가령 소설이 영화로 개작돼 히트를 치거나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드라마나 영화가 수시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요컨대 모든 콘텐츠산업의 뿌리는 결국 스토리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스토리헬퍼는 우리나라 콘텐츠산업의 저변을 넓히고 다지는 자양분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인화 교수가 지금껏 내놓은 소설은 2012년 말 출간된 <지옥설계도>까지 모두 19편이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 없듯이, 작가에게는 모든 작품이 다 소중할 것이다. 그래도 특히 애착이 가는 작품은 있지 않을까. 그는 어떤 작품을 꼽을까. 혹시 가장 큰 부와 명예를 가져다 준 <영원한 제국>이 아닐까. <영원한 제국>은 2013년까지 누적 판매량 108만부를 넘은 이른바 밀리언셀러 작품이다. 하지만 그는 뜻밖에도 단편소설 <시인의 별>에 가장 애착이 간다고 했다. 가장 완성도가 높았던 작품이라는 이유에서다.

“제가 쓴 다른 작품들은 다시 쓰고 싶어요. 더 잘 쓸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드는 거죠. 하지만 <시인의 별>은 제가 쓸 수 있는 최대한을 썼던 것 같아요. 최선을 다해 썼을 뿐 아니라 형식과 내용 면에서도 완결됐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는 ‘전형적인 소설가’로만 살 수 있는 팔자는 아닌 듯하다. 관심과 열정이 다방면으로 분출해 종종 외도(?)를 해온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게임이나 영화의 시나리오를 집필하는가 하면 ‘디지털 스토리텔링(Digital Storytelling)’이라는 주제에 천착해 전문 연구자로 활동하는 것이 그 단적인 증거다. 말하자면 그는 멀티플레이어다.

- 이인화 교수는 스토리헬퍼가 글쓰기를 하려는 모든 예비작가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 이인화 교수는 스토리헬퍼가 글쓰기를 하려는 모든 예비작가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온라인게임은 스토리텔링의 새로운 장르
디지털 스토리텔링이란 디지털기술을 매개로 창조되는 모든 이야기 행위를 의미한다. 컴퓨터나 인터넷을 통해 생성되는 글과 동영상 등은 모두 디지털 스토리텔링에 포함된다. 가령 블로그에 쓰는 글이나 유튜브에 올리는 동영상 같은 것들이다. 이인화 교수는 현재 이화여대 디지털스토리텔링연구소 소장이자 사단법인 디지털스토리텔링학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온라인게임은 가장 전형적인 디지털 스토리텔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디지털기술이 표현수단이자 동시에 매체환경이 되는 게 바로 온라인게임이죠. 온라인게임은 태어난 지 20년도 채 되지 않은 장르입니다. 그런데 이게 정말 연구할 게 많고 너무 재미있어요. 새로운 현상이 계속 나오니까요. 소설이라는 장르는 워낙 오래돼서 창작이나 해석의 비밀이 거의 다 밝혀졌지만 온라인게임은 지금도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습니다.”

이인화 교수는 한때 ‘게임중독’에 빠진 적이 있다. 2003년 이른바 ‘대규모 다중사용자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MMORPG: Massive Multiplayer Online Role Playing Game)’을 접하면서부터다. MMORPG는 온라인으로 연결된 다수의 사용자가 동시에 게임 속 등장인물의 역할을 수행하며 즐기는 게임 형식이다. 온라인게임 중에서도 MMORPG는 우리나라가 종주국으로 꼽힌다. 넥슨의 <바람의 나라>, 엔씨소프트의 <리니지>가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교수는 <리니지2>로 온라인게임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지금은 <블레이드&소울>을 가장 즐긴다고 한다.

그가 게이머로서 가장 좋아했던 온라인게임은 <길드워>다. 그는 제작사의 의뢰로 <길드워>의 제1막 스토리를 쓰기도 했다. 특히 그의 소설 <지옥설계도>는 온라인게임을 즐기면서 얻은 영감을 토대로 ‘게임과 문학의 융합’을 시도한 작품으로 주목을 받은 바 있다.  

“MMORPG는 사용자들이 참여해 스토리를 완성해나가는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물론 시간을 많이 뺏기는 부작용은 있죠. 하지만 MMORPG는 게임에 중독된다기보다 사람에 중독되는 겁니다. 함께 게임에 접속하는 사람들과 대화하기 위해 게임을 하는 거죠. 저는 막내딸보다도 어린 중학교 2학년 학생과 게임을 통해 대화합니다. 걔가 저더러 ‘형님’이라고 불러요(웃음). 세대를 뛰어넘어 소통하다 보면 서로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것도 느끼게 되죠.”

이인화 교수는 요즘 <스토리텔링 진화론>이라는 연구서를 쓰고 있다. 이 책의 마지막 결론은 ‘모든 인간은 작가’라는 것이다. 예술적 가치에 대한 인식은 역사와 더불어 변해왔다. 오늘날 디지털기술을 기반으로 한 매체환경에서는 작가와 독자의 구분이 희미해졌다. 가령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는 누구나 자기 이야기를 올릴 수 있는 무대가 됐지 않은가.

“시대가 바뀌면 그 시대에 맞는 예술적 표현수단이 등장할 수밖에 없어요. 이제는 ‘모든 인간은 작가’라는 테마 위에서 예술을 생각해야 하는 시대가 왔습니다.”


▒ 이인화 교수는…
본명 류철균. 1966년생. 89년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93년 동 대학원 국어국문학 석사, 2001년 동 대학원 국어국문학 박사. 95년 이화여대 국어국문학 전공 전임강사, 2001년 이화여대 국어국문학 전공 부교수, 2007년~ 이화여대 대학원 디지털미디어학부 정교수, 2008년~ 이화여대 디지털스토리텔링연구소 소장. 92년 제1회 작가세계 문학상 대상, 94년 제3회 추리소설 독자상, 95년 제3회 문화관광부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문학부문, 2000년 제24회 이상문학상 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