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대제(陳大濟)’
그의 이름 세 글자가 우리 산업사에 끼친 영향은 상당하다. 국비유학생 1호로 미국에 건너가 매사추세츠주립대 전자공학 석사, 스탠퍼드대 전자공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IBM 왓슨(Watson)연구소 연구원으로 활약하던 진 대표는 지난 1985년 삼성전자에 입사해 삼성전자 반도체총괄시스템LSI 대표이사, 삼성전자 디지털미디어 총괄 대표이사 등을 역임하는 등 ‘반도체 신화’의 주역으로 활동했다. 그의 이력은 굴뚝산업에서 전기, 전자, IT(정보기술)로 넘어가는 산업 패러다임 변화 속에서 수많은 샐러리맨들의 ‘롤 모델’로 자리 잡았다.
그러던 중 돌연 2003년 참여정부 출범과 함께 입각, 최장수 정보통신부 장관으로 활약한 그는 아직까지도 세계인들에게 대한민국의 대표 이미지로 기억되는 ‘IT코리아’를 만드는 데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그리고 그간 경험을 살려 지금은 새로운 산업 생태계 육성에 매진하고 있다. 진 대표는 지난 2006년 스카이레이크인큐베스트(이하 스카이레이크)를 설립해 현재 대한민국 기술 산업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데 주력하고 있다.
최근 국내 금융시장에서 스카이레이크는 돌풍의 핵으로 부상 중이다. 지난해 스카이레이크는 국민연금을 비롯해 우정사업본부, 지방행정공제회, 전문건설공제회 등 기관투자자들의 자금 3500억원을 삽시간에 끌어 모았다. 스카이레이크가 조성한 사모펀드에서 연기금 등 기관이 참여한 규모는 75.81%에 이른다. 연기금 등 기관투자자들의 위탁운용사 선정에서 연전연승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 투자전문회사들 사이에서 스카이레이크의 선전은 큰 화젯거리가 되고 있다. 비결은 뭘까.

진 대표는 이를 ‘차별화’라는 한 단어로 요약해 설명했다. ‘돈 되는 사업’에는 무조건 투자하는 일반 PEF와는 달리 스카이레이크는 기술 중소기업에만 집중적으로 투자한다. 진 대표는 스카이레이크의 투자 기준으로 △기업이 지속적으로 성장하며 △국내외 관련시장 규모가 1조원 가량 돼야 하고 △기술력 등 지적자산 △경영진의 능력 △경영쇄신 가능 여부 등을 중요하게 꼽았다.
“이 모든 것을 충족하면서 투자금을 5년 내 회수(Exit)할 수 있는지도 중요하게 봅니다. 펀드 설정 기간이 7년이기 때문에 최장 5년 안에 수익을 내야 하거든요. 아무래도 기술력을 갖춘 중소기업에만 투자하기 때문에 기관투자자 입장에서는 우리에게 돈을 맡기는 것을 분산투자로 여기는 모양입니다. 꼭 한 군데씩 끼워주는 셈이죠.”
투자방식으로 보면 스카이레이크는 경영권을 인수해 운영한 뒤 되파는 바이아웃(Buyout) 전략을 구사한다. 때문에 스카이레이크에게 부침이 심한 IT업종의 특성은 최상의 투자 성과를 이뤄내기에 좋은 투자환경을 만들고 있다.
“IT산업은 경기 부침이 심하지만 그 안에서도 제각각 트렌드가 다릅니다. 가령 게임관련 업종은 경기가 좋지 않을 때 호황을 보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게임 투자 비중이 30% 정도 되죠. 통신과 컴퓨터, 부품업종 등의 경기 사이클(순환)이 전부 같지 않기 때문에 이걸 어떻게 투자로 연결 짓느냐가 관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관련 업계에서는 최근 스카이레이크가 인천국제공항공사, 국민연금(NPS)과 함께 서호주 퍼스국제공항 지분 투자에 나서는 것이나 동양매직 인수에 나설 것이라는 소문을 근거로 “투자대상을 확대하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많다. 이에 대해 진 대표는 “퍼스국제공항 투자는 국민연금, 인천국제공항공사와 현지 인프라투자전문운용사를 연결해준 것에 불과하며 동양매직 인수는 현재로선 검토하고 있지 않다”면서 “우리가 생각하는 투자 대상은 여전히 규모가 500억~1000억원 가량 되는 중소 기술기업”이라고 분명하게 밝혔다.

진 대표가 기술기업 투자에 매진하고 있는 이유는 ‘한 나라 경제의 기초체력은 제조업에 있다’는 자신만의 기업 철학에 근거한다. 정보통신부 장관 시절 그가 수립한 ‘IT389’와도 맥이 닿아 있다. 진 대표가 정책 마련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IT389는 3대 인프라, 8대 서비스, 9대 성장동력을 일컫는 말이다. 이 중 8대 신규 서비스는 와이브로(무선광대역인터넷서비스), DMB, 홈네트워크, 텔레매틱스, RFID(무선기술), WCDMA(광대역코드분할다중접속), 인터넷전화 등이다. 10년 후 한국경제의 먹거리를 마련한다는 차원에서 기획된 이 정책은 당시로선 획기적인 발상이었다.
“와이브로만 해도 그렇습니다. 이후 정부가 지속적으로 추진했으면 충분히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출 수 있었는데 LTE(롱텀에볼루션)에 주도권을 빼앗겨 버렸으니 안타깝죠. 노무현 전 대통령이 해외 순방을 나가면 당시 우리가 내세울 것이 IT기술이었기에 제가 늘 수행하고 다녔습니다. 한번은 브라질에 갔는데 당시 룰라 대통령이 노 전 대통령께 “한국에 딱 두 개가 부러운 게 있는데 IT하고 에듀케이션(교육)”이라고 말하더군요. 그런데 지금 누가 그런 소리 하나요. 얼마 전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 유럽을 다녀왔는데, 우리만큼은 아니어도 인터넷 환경이 굉장히 좋아진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정통부(정보통신부) 폐지 5년이 이런 결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참 안타깝습니다.”
스카이레이크는 전도유망한 중소 기술기업을 찾아내 육성하는 데 탁월한 성과를 보이고 있다. 게임기업 위메이드는 비상장 상태에서 스카이레이크 투자를 받은 뒤 17개월 만에 코스닥 상장에 성공, 지금은 국내 대표적인 온라인 게임 기업으로 성장했다. 지난해 4월30일 최대 지분을 인수한 조이시티(옛 JCE)만 해도 지난 4월16일 종가 기준 주가가 59.1% 상승했다. 설립 후 지금까지 설정된 펀드 중 투자기간이 만료돼 청산절차를 밟은 1, 2호 펀드의 수익률은 약 12%를 기록했다. 경기 불황을 감안하면 상당한 성적이다. 비결에 대해 진 대표는 “우리가 잘할 수 있는 것만 찾아내 우리 방식으로 체질을 개선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스카이레이크는 엔씨소프트 최고운영책임자(COO)와 최고전략책임자(CSO)를 역임한 김화선 사장을 비롯해 모건스탠리, 골드만삭스 등 금융권 출신 인사와 삼성전자, 인텔코리아 등에서 활약한 기술인력 등으로 임원진을 짜임새 있게 구성했다는 분석이다.
기술 개발에 필요한 기기를 함께 쓰고, 필요한 부품을 공동구매해 원가를 낮추는 것도 가능하다. 다이나믹모션과 옵틱스 간 기술교류가 대표적이다. 이어폰에 들어가는 소형 스피커를 생산하는 다이나믹모션의 일부 제조 기술과 광학디스크드라이브(ODD)에 장착되는 옵틱스 모터 기술 원리가 비슷한 데서 착안해 스카이레이크는 필리핀 공장에서 근무하는 기술 인력을 다이나믹모션 중국 공장에 파견, 관련 공정을 재정비했다. 또 현재 이전을 추진 중인 베트남 공장의 공정을 설계하는 데도 적극적으로 참여시켰다. 인수 직후 해당 기업에게 ERP(전사적 자원관리) 시스템을 도입하도록 해 경영혁신을 불어넣는데, 이 과정에서 시스템이 조기에 별 탈 없이 구축되는 것도 산하 기업들 간 다양한 노하우 전수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뿐만 아니라 스카이레이크에서는 투자 기업 최고재무책임자(CFO)들이 모여 재고, 회계, 인사 노하우를 교류하거나, 최고기술책임자(CTO)들이 함께 기술개발에 나서는 것이 일반화돼 있다. 이종(異種)교류를 통해 시너지를 내고 있으며 이는 기업 체질 개선과 펀드 수익률 향상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 돈은 오로지 우리기업을 키우는 데만 쓴다”
투자 기업들이 최근 박사급 인력 채용에 성공하는 것도 달라진 모습이다. 일반 가정에서 쓰는 포장지 랩과 포장용 테이프, 전자기기용 테이프 등을 생산하는 테이팩스는 지난 1월 재료공학박사 출신을 기술연구소장으로 채용했으며 지난 4월에는 화학박사 출신을 전자재료사업부장으로 뽑았다. 중소 기술기업에서는 보기 드문 현상이다. 관련업계에서 이를 ‘진대제 효과’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창업해 해당 기업을 연 매출 300억~500억원 정도로 키우면 ‘성장통’으로 불리는 1차 위기가 옵니다. 창업 후 5~7년쯤 되면 이런 일이 오는데, 이유는 소위 사장 혼자 뛰어서 그런 겁니다. 영업도 하고 기술개발도 하고, 한마디로 ‘슈퍼맨’처럼 일한 거죠. 다행히 위기를 잘 넘겨 매출이 700억~1000억원 정도되는 상장(上場) 전후 즈음, 2차 위기가 찾아옵니다. 그동안 슈퍼맨처럼 일한 사장도 이때쯤 되면 에너지가 떨어지고 아이디어는 고갈되죠. 우리는 이 두 구간에 놓인 기업을 찾습니다. 하도 많은 기업들을 둘러봐서 그런지 우리는 5분만 살펴보면 딱 답이 나옵니다.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금방 알 수 있죠. 보통 이런 기업들을 가보면 기본적으로 회의조차 어떻게 하는지 몰라요. 거기다 투명 경영을 불어넣고 조직을 효율적으로 정리하고 기술력을 정비하면 1년 뒤부터 확실히 체질이 달라집니다. 우리는 발전 가능성이 높은 시장에 발을 담그고 있으면서 기본을 갖추고 있는 기업은 언제든 성장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사람 자르는 식의 구조조정은 안 합니다. 마른 걸레라도 또 짜내는 대기업 입장에서 볼 때 이런 기업들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걸레예요. 사업을 조금 조정해주면 효율성이 팍팍 올라가죠.”
진 대표는 이러한 과정에서 스카이레이크와 자신의 역할은 ‘기업 경쟁력 양성’이라고 한정지었다. 해외기업 인수에 소극적인 입장을 펴는 것도 “우리가 모은 국내 자본은 오로지 우리 기업을 살리는 데만 쓴다”는 생각에서다.
진 대표는 “나도 공직생활을 해본 사람인데 그럴 수 있느냐”며 “남의 나라 돈으로 우리 기업을 살리는 데 쓰면 좋기야 하겠지만 과실(수익)이 해외로 나가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선을 그었다. 최근 스카이레이크 펀드가 호성적을 기록하자 해외 기관투자자들이 기금 위탁을 제안하고 있지만 진 대표는 당분간 대상을 국내 기관으로 한정한다는 계획이다.
“박근혜 대통령께서 지난 3월 독일 드레스덴을 방문한 자리에서 히든챔피언(강소기업)의 중요성을 언급하신 건 굉장히 의미있는 일이라고 봅니다. 그 전까지 정부가 창조경제를 강조하면서 벤처창업 지원에 적극 나섰는데, 벤처가 뭐겠습니까. 말 그대로 도전하는 기업이거든요. 확률로 치면 실패율이 99%인 기업입니다. 경제가 성장하려면 기업도 씨알이 굵어야죠. 진짜 창조경제는 벤처가 아닌 IT강소기업이 만들 겁니다. 우리 같은 금융의 역할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노하우를 조금만 전수하면 매출 1조원을 넘기는 세계적인 ‘한국형 히든챔피언’으로 가꾸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대기업에서 배운 노하우를 중소기업에 전해줘야죠. 그런 면에서 우리 같은 PEF에게 ‘기업가 정신’은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 가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 대표는 시간이 갈수록 중국과 격차가 줄고 있는 제조업 기술력이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지난 2월 스페인 WMC(월드모바일콩그레스)를 둘러본 후 이 같은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다.
“많은 사람들이 제조업 비중을 줄이고 서비스업을 육성해야 한다고 하는데, 3차 서비스산업은 1, 2차가 튼튼할 때 성장할 수 있는 겁니다. 2차 제조업이 쇠락하면서 3차 산업 성장이 가능할까요. 얼마 전 WMC를 다녀왔는데 겉으로 봐선 중국과 우리 업체 간 차이를 모르겠더군요. 물론 전혀 없지는 않겠죠. 그런데 앞으로 5년 후도 그럴까요. 당장 중국이 따라오기 어려운 품목을 만들거나 기술력을 갖춘 기업을 육성하는 것이 시급합니다. 벤처기업을 키워서 언제 글로벌 기업으로 만들 수 있을까요. 그런 면에서 부가가치가 있는 제조업은 좋은 일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프트웨어를 만들면 그것도 ‘제조’예요. 제조의 개념을 한정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은 기술력을 갖춘 IT제조기업 육성이 정말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내건 IT 최고경영자(CEO) 과정 ‘진대제 AMP’를 만들어 인재 양성에 주력하는 것도 ‘경쟁력을 갖춘 IT제조업이 한국경제의 희망’이라는 생각에서다. 올해로 10기를 맞는 진대제 AMP 과정은 정보통신과 미디어, 과학기술, 전자부품 등 ICT 분야 화두가 되고 있는 주제를 대상으로 강좌를 열고 있다. 지난해까지 배출된 수료생 수는 450여명이다.
진 대표는 “기회가 되면 블라인드펀드(투자 대상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조성된 펀드) 위주의 현재 방식에서 벗어나 펀드 자금 규모가 큰 프로젝트 펀드(투자대상이 정해진 펀드)에도 도전장을 내밀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성공한 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아울러 현재 7년 정도로 규정돼 있는 펀드 운용 기간을 10년 이상 장기로 늘리는 것도 관련 산업의 발전을 위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투자 기업을 찾아내 유망 기업으로 탈바꿈시키는 데 7년이라는 시간은 너무도 짧다는 게 진 대표의 생각이다. 가령 의료, 바이오산업만 해도 발전 가능성은 높지만 업종의 특성상 투자기간이 길다.
‘성공한 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는 중국 경구를 좋아한다는 진 대표에게 대한민국 명품 IT산업 육성은 현재진행형이다. 그의 이름 석자 중 하나인 ‘제(濟)’의 의미가 ‘건너다’, ‘성공하다’ 외에 ‘돕다’, ‘유익하다’, ‘쓸모가 있다’는 뜻으로 쓰이는 것은 우연일까. 그가 지금 벌이고 일 자체가 ‘큰 도움’, ‘큰 유익’, 바로 ‘대제(大濟)’다.
▒ 진대제 대표는…
1952년 경남 의령 생, 74년 서울대 전자공학과, 79년 미국 매사추세츠주립대 전자공학 석사, 83년 미국 스탠퍼드대 전자공학 박사, 85년 미국 IBM 왓슨 연구소 연구원, 85년 삼성전자 입사, 99년 삼성전자 반도체총괄 시스템 LSI 대표이사, 2000년 삼성전자 정보가전총괄담당 대표이사 사장, 2003년 정보통신부 장관, 2006년~현재 스카이레이크인큐베스트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