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디스도 지난 2월 KT의 신용등급을 ‘A3’에서 ‘Baa1’로 낮춘 데 이어 롯데쇼핑을 ‘Baa1’에서 ‘Baa2’로, LG전자는 ‘Baa2’에서 ‘Baa3’로 내렸다. 에쓰오일(S-Oil)은 전망치를 ‘안정적(Baa2)’에서 ‘부정적(Baa2)’으로 바꿔 추후 신용등급을 낮출 것임을 시사했다. 또 무디스는 S&P와는 다르게 GS칼텍스의 신용등급을 투자적격 10단계 중 끝에서 두 번째인 Baa3로 낮춰 잡았다. 한 단계만 내려가면 사실상 투자에 부적격하다는 정크(Junk)등급이 되는 것이다. 이로써 무디스의 투자적격 최하위 등급에 포함된 국내 기업은 GS칼텍스를 포함해 LG전자, 현대제철, 포스코건설 등 4곳으로 늘어났다. 이 밖에 피치는 지난해 11월 국내 대표 철강기업 포스코의 신용등급을 ‘BBB+’에서 ‘BBB’로 낮췄다.

이 같은 글로벌 신용평가사들의 대기업 신용등급 강등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지난해 8월 한상윤 S&P 한국기업신용평가팀장은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열린 ‘S&P 초청 글로벌 유동성 축소와 한국 신용 전망’ 세미나에서 “한국 기업들의 신용등급을 하향 조정하는 시도가 늘어날 조짐에 있다. 앞으로도 기업들에 대한 신용등급 조정 압력이 지속될 것”이라고 예견했는데, 이후 벌어진 상황은 예상과 정확하게 맞아떨어지고 있다.
신용등급이 기업에게 중요한 이유는 자금조달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서다. 원론적으로 신용등급은 정책자금과 협약대출, 지급보증 등 공공·민간 금융기관에서 자금을 조달할 때 금리를 결정하는 기준이 될 뿐만 아니라 입찰에 참여하는 데 중요하게 쓰인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업의 경영상태를 판단하는 중요한 지표라는 점이다. 주요 기업들이 글로벌 신용평가사들의 자사 등급 하락을 우려 섞인 시선으로 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해외 신용평가사들이 국내 대기업들의 신용등급을 낮추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한 외국계 자산운용사에 근무하는 채권 담당자의 설명이다.
“국내 기업들의 수익성이 나빠진 것이 신용등급 강등의 주된 이유다. 현재 한국경제에서 삼성전자, 현대차를 제외하면 제대로 수익을 내는 회사가 별로 없다. 삼성전자 순이익이 상장기업 전체 50%를 차지한다는 것은 우리 대기업, 더 나아가 우리 경제에 문제가 있다는 시그널(신호)이다. 과거 특정기업 순이익이 20%까지 차지한 적은 있지만 지금처럼 비대해진 적은 없었다. 로컬(국내) 신용평가사는 기업 평가 시계열이 10년 미만에 불과하지만 이들 외국계는 최소 50년 이상 기업을 평가한 경험이 있어 분석력은 분명 한 수 위에 있다.”
실제로 S&P는 GS칼텍스 신용등급과 관련한 자료에서 “회사 차입금 규모가 높고 정유 사업 수익성도 향후 1년간 큰 폭으로 개선되기 어렵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라고 하락 배경을 설명했다. 또 SK이노베이션의 신용등급 전망을 부정적으로 하향 조정하는 이유도 “석유정제부문 수익성 악화와 지난해 차입금 수준이 큰 폭으로 증가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무디스 역시 올 들어 한국 대기업들의 신용등급을 낮추면서 “상당 기간 차입금 비율이 의미 있는 개선을 보이기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이번 신용등급 하락을 그동안 중국경기 호황과 삼성전자·현대차 수출에 가려져 있던 우리 대기업들의 실상이 드디어 드러난 것 아니냐는 우려 섞인 시각도 많다. 현재 무디스가 국내 민간기업 중 A대 등급으로 책정하고 있는 곳은 삼성전자와 SK텔레콤, LG화학 등 3개사뿐이다.

우리 경제가 중장기적으로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돌파구를 마련하기 쉽지 않다는 점도 주요 기업들의 신용등급 하락으로 이어지고 있다. 실제로 최근 글로벌 신용평가사들이 줄줄이 등급을 낮추고 있는 업종은 철강, 화학, 정유 등 중간재 분야다. 중국, 인도 등이 자국 내에 제품을 조달하는 비중을 늘리고 있어 경쟁력 확보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일본 경제는 살아나고 중국 기업들과 우리 기업들의 기술격차가 줄고 있는 상황을 해외 신용평가사들이 심각하게 보는 것 같다”고 밝혔다. S&P를 비롯한 외국계 신용평가사들은 기업의 신용등급을 측정할 때 △사업상 산업의 위험도가 늘어났는지 △해당 기업이 관련 산업 내 경쟁지위가 약화됐는지, △수익성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중요하게 따진다. 재무적으로는 해당 기업이 차입금을 상환할 능력을 갖고 있는지와 현금 흐름 변화를 중요시한다.
이러한 평가에 대해 국내 대형 자산운용사 채권리서치 담당자도 공감을 표시했다.
“삼성, 현대차 등을 제외한 대기업들의 재무지표가 악화됐을 뿐 아니라 상당기간 계속된 것을 부정적으로 본 것이지 ‘우리 기업만을 때리는 식’으로 봐서는 곤란하다. 그동안 우리 기업들이 글로벌 금융위기 속에서 안정적으로 신용등급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 경기의 호황 탓인데, 최근 중국마저 성장세가 둔화된 마당에 우리 기업의 실적을 앞으로 좋게 볼 수 있겠는가. 예고 없이 갑작스럽게 내려간 것이 문제지, 오히려 1~2년 전에 떨어뜨려야 할 것을 지금 낮춘 것으로 봐야 한다.”
한상윤 스탠더드앤드푸어스 한국기업신용등급평가팀장은 “국내 소비와 건설, SOC(사회간접자본) 투자 침체가 장기화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기 때문에 유통, 건설, 철강, 화학, 시멘트 업종 기업들의 신용도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한 팀장은 “올 들어 이미 선제적으로 하향 조정됐기 때문에 추가적으로 하락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밝혔다.
반면 이번 신용등급 하락이 과도한 조치라는 지적도 있다. 공경일 하나UBS자산운용 본부장(채권)은 “리먼 사태로 인한 신용위기 이후 부실평가 논란이 일자 글로벌 신용평가사들의 관점이 보다 엄격해지고 보수적으로 바뀌었다”고 설명했다. 또 미국의 양적완화 축소로 신흥국 경제가 타격을 입을 것으로 내다보면서 우리 경제와 기업을 동일선상에서 보고 있는 것도 최근 신용등급 하락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다행히도 해외 신용평가사들의 등급하락 조치가 아직까지는 해당 기업들에게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 공경일 본부장은 “해외에서 달러로 채권을 발행하는 기업이 많지 않아 글로벌 신용평가사들의 신용등급 하락이 조달금리 인상으로 이어지지는 않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우리 경제나 기업을 바라보는 해외기관들의 부정적인 시선이 늘어나고 있다는 점은 우려되는 부분이다.

신용등급 하락 영향
국내 신용평가사도 정책당국 눈치 보며 하락 카드 만지작

그동안 국내 대기업 신용등급 하락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던 국내 신용평가사들도 최근 입장을 바꿔 기업들로선 입장이 더욱 난처해진 모습이다. 그동안 국내 신용평가사들이 책정한 신용등급은 해외 기관들과 상당한 차이를 보여 왔다. 실제로 국내에서 AA~AAA급의 초우량 기업들이 해외에서는 대부분 BBB급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국내 기업들이 ‘등급 인플레이션’ 논란에 휩싸인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국내 신용등급 기준상 A+였던 웅진, STX그룹이 유동성 위기를 겪은 후 그룹이 와해되고, 여기에 동양 사태마저 터지면서 국내 신용평가사들에 대한 신뢰성은 또다시 도마에 오른 상태다.
이런 가운데 보수적인 입장을 취해 온 국내 업체들이 지난해 11월 금감원이 동양그룹 신용평가가 제대로 이뤄졌는지를 살펴보기 위해 특검을 실시한 후 변화 조짐을 보이고 있어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한 증권사 채권담당 애널리스트는 “국내 신용평가사들은 신용등급 평가보다는 기업들의 채권 발행을 대행해주는 것이 주된 수익사업이다 보니 등급 상향은 빠르지만 내리는 데는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면서 “이러다보니 투자 적격대상인 A+도 시장의 신뢰를 얻기에 한계가 있었다”고 말했다. 일부 신용평가사의 경우 정책당국의 눈치를 보며 신용등급을 급하게 내리면서 오히려 기업들의 자구책 마련을 위축시킨다는 지적까지 받고 있다. 가령 한국신용평가는 지난 3월 이례적으로 현대상선의 신용등급을 ′BBB+′에서 투기등급인 ′BB+′로 강등한 바 있다. 한 대기업 임원은 “기업이 손 쓸 틈도 주지 않고 신용등급을 낮추게 되면 해당 기업이 쌓아온 경쟁력은 순식간에 날아가는 문제를 낳을 수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이번에 그동안 국내 신용평가사들이 기업의 재무지표 등 정량적 기준보다는 사업성, 계열사 지원 등 정성적 기준을 평가에 더 반영한 것이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또 이번 국내 신용평가사들의 기업들에 대한 등급 하락이 오히려 채권 투자자들에게는 긍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혁재 IBK투자증권 연구원(크레디트)은 “투자자 입장에서 당장은 고통스러울 수 있겠지만, 등급 하향으로 인한 불확실성 해소는 회사채 유통 및 발행시장의 정상화를 앞당기고, 기업의 구조조정을 촉진시킬 수 있다”면서 “그런 면에서 4분기 실적이 발표된 지금이 기업들의 등급 조정에 적기”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