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간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온몸을 던졌다. 7번 창업해 모두 망했으며, 8번째 사업을 통해 금융그룹의 수장이 됐다. 이상준 골든브릿지금융그룹 고문의 얘기다. 중병으로 신음하는 금융회사를 인수해 재창업에 가까운 수술로 기업을 회생시킨 이 고문은 제주도에서 암과 싸우며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지난 5월9일 제주도에서 그를 만났다.

농사 짓고, 리조트 수리하며 온종일 노동
내년 일터학교 만들어 일자리 나누기 나서

제주공항에서 나오는 기자를 반갑게 맞이한 이는 다름 아닌 이상준 골든브릿지금융그룹 고문이었다. 마치 군인처럼 머리카락은 짧았고, 햇볕에 검게 그을린 얼굴이었다. 제주 갈옷(감물 염색 옷) 차림에 언뜻 보기에 몸무게가 상당히 줄어든 듯했다(이 고문은 건강할 때보다 10㎏ 정도 줄었다고 했다). 자동차는 기아자동차의 소형 전기차인 레이EV였다. 지난해 제주도의 전기차 지원사업에서 당첨돼 아주 저렴하게 구입한 차였다. 10년 넘게 탄 쌍용자동차의 체어맨리무진은 이젠 안 탄단다. 골든브릿지투자증권 등 5개 계열사를 거느렸던 금융그룹의 수장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소박함이 엿보였다. 그는 “여기에는 비서도, 기사도 없다”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운전석에 앉았다.

먼저 건강을 물었다. 그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서울에 있었으면 이렇게 건강하게 살아 있을까 싶습니다. 깨끗한 자연 속에 있으면서 건강이 상당히 좋아졌어요. 그동안 제주도를 걸어서 두 바퀴 돌았어요.”

그는 지난해 4월 회사의 모든 등기임원 자리에서 물러났다. 창업자로서 고문을 맡고 있다. 연봉은 단돈 1원이다. “경영 전략이나 트렌드 등 경영 전반에 대한 조언을 해주고 있어요. 회사에서 일어나는 구체적인 일에 대해서는 알지 못할뿐더러 그것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어요. 그 스트레스를 감당하기도 어렵고요.”

- 이상준 고문이 작업복 차림으로 트랙터 위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상준 고문이 작업복 차림으로 트랙터 위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식도암 수술 후 제주도 정착
그가 제주도로 내려 온 것은 지난 2010년. 식도암 선고를 받고 식도 전부와 위의 3분의 1을 절제하는 13시간의 대수술을 받은 후였다. “처음 암을 선고받았을 때는 암담했지요. 그런데 수술 이후 되레 차분해지더군요. 언젠가는 죽을 거고,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돈이나 삶에 대한 집착이 사라졌어요.”

남은 삶 동안에 무엇을 해야 하나 심란한 마음에 그가 찾은 곳은 호스피스병동이었다. 병동에서 일하는 간호사와 환자를 돌보는 간병인에게 “죽음을 앞둔 환자들에게서 가장 많이 듣는 얘기가 무엇인지” 물었다.

“다들 ‘정말 하고 싶은 게 있는데, 우물쭈물하느라 못 해본 것을 후회하더라’는 겁니다. 체면 때문에, 자신을 쳐다보는 남의 시선 때문에 하고 싶은 것을 못 하잖아요. 전 그래도 하고 싶은 것은 누가 뭐라든 다 해본 편이었어요. 다만 건강하게 살아갈 시간이 있다면 좀더 의미 있는 일을 해보고 싶었어요.”

이 고문은 제2의 인생을 살 곳으로 제주도를 선택했다. 그의 정신적인 고향인 베트남도 후보지였다. 그는 베트남 왕족의 후손인 화산 이씨의 직계 후손이다. 화산 이씨는 약 800년 전 고려로 망명해온 베트남 왕조 ‘리 왕조’의 마지막 왕자 이용상(李龍祥)을 시조로 한다.

“2000년대 초부터 제주도에 드나들면서 언젠간 제주도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는 있었어요. 베트남도 제겐 한국만큼 편한 곳이지만, 너무 덥잖아요(웃음).”

마침 그룹에서 숙박형 콘도시설인 선린지리조트를 인수했다. 그는 리조트 일꾼을 자처했다.

제주공항에서 40여분 자동차로 달려 도착한 선린지리조트는 숲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주변에 한 채의 인가도 보이지 않는 한적한 곳이었다. 제주도가 아니라 강원도의 어느 산골 같았다.

숙소로 쓰는 관리동 앞에는 트랙터와 굴착기가 버티고 있었다. 이 고문은 제주도에 내려오자마자 트랙터와 굴착기 자격증부터 땄다. 일꾼 노릇을 제대로 할 요량에서였다. 트랙터는 제주시농업기술센터에서, 굴착기는 한국폴리텍대학 제주캠퍼스에서 배웠다. 그는 “정부의 지원을 받아 무료로 배웠는데, 은퇴자들도 이런 제도를 활용하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가 내려올 당시만 해도 9만9000㎡(3만평) 규모의 리조트는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엉망이었다. 웬만한 리조트 수리는 이 고문이 직접 했다. 요즘엔 굴착기를 이용해 리조트 돌담길 옆으로 산책로를 만들고 있다. 농사도 짓고, 리조트 수리를 하면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하루 종일 일을 한다. 그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육체노동의 ‘참 재미’를 느끼는 맛이 일품이라고 했다.

“3년 내내 아침마다 리조트 안에 있는 나무의 가지 치는 일을 했어요. 지난해에는 돌투성이 밭 2만6400㎡(8000평)를 일궈 절반 정도에 메밀을 심었는데, 사실 한 톨도 수확하지 못했어요. 농사짓기는 정말 만만치 않습디다.”

이 고문이 건강하게 살아갈 시간이 있다면 하고 싶었던 의미 있는 일은 사회책임투자(SRI·Social Responsible Investment)다. 일자리를 늘리거나 환경 파괴를 막는 등 사회에 도움이 되는 투자를 하겠다는 얘기다.

그가 내년에 베이비 부머를 위한 대안학교인 ‘일터학교’를 세우려는 계획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그는 이미 지난 4년 동안 일터학교를 조용히 실험했다. “제주도에 내려오면서 남은 인생은 절박한 이들에게 베풀고, 비우면서 살자고 결심했어요. 또 할 수 있다면 그동안 쌓은 경영 노하우도 전수하고 싶었고요.”

일터학교의 설립 취지는 1년 동안 일하면서 배우는 것이다. 학생들은 이 고문과 함께 농사짓기부터 리조트에서 온갖 일을 했다. 학비는 무료였고, 하는 일과 그 성과에 따라 월 100만원에서 200만원의 보수도 받았다. 그동안 20대의 대졸 취업준비생에서부터 50대의 은퇴자까지 10명의 학생이 거쳐 갔다. 하지만 1년을 모두 채우고 졸업한 학생은 단 1명에 불과했다. 9명은 힘겨운 육체노동과 외로움을 버텨내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했다.

- 이상준 고문은 “육체노동이 창조적 산출물을 만드는 활동이면서 지속가능한 삶의 방식”이라고 말했다.
- 이상준 고문은 “육체노동이 창조적 산출물을 만드는 활동이면서 지속가능한 삶의 방식”이라고 말했다.
일자리 나누기 등 사회책임투자 하고 싶어
이 고문이 제시한 졸업 요건은 단 하나다. 바로 자립할 수 있느냐다. 사람들이 어떻게든 직업을 갖든지, 창업을 하든지 경제활동을 하도록 돕는 게 그의 목표였다. 유일한 졸업생이었던 20대 취업준비생은 취업 대신 서울 가락동 농수산물시장 인근에서 정육점을 창업했다고 한다.

특히 그는 인생 2막을 준비하는 은퇴자들에게 “체면을 버리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조언했다. “직장생활을 했던 대부분의 은퇴자들은 육체노동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갖고 있었어요.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는 육체노동을 천시하는 풍조가 깊숙이 박혀 있어요. 노동은 창조적 산출물을 만드는 활동이면서 지속 가능한 삶의 방식입니다. 노동을 두려워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어요.”

그는 만약 사업을 시작한다면 “망할 각오부터 하라”고 했다. “우리나라에서 창업으로 성공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창업 10년 후 회사다운 회사로 살아남는 기업은 1%에도 못 미칩니다. 실패를 견뎌낼 자신이 없다면 직장 다니는 게 오히려 낫습니다. 물론 일자리 지키기도 만만치 않지만 말이죠.”

그는 “그래도 창업을 하고 싶다면 기존의 방식을 뛰어 넘어야 성공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스타트업을 예로 들었다. 너도 나도 뛰어드는 스마트폰 기반의 앱 비즈니스보다는 건축이나 도시재생과 같은 오프라인과 강력히 결합된 비즈니스 모델이 승산이 높다고 봤다. 이 고문은 일터학교에서 이러한 분야의 스타트업을 키울 계획이다.

그는 이젠 소유에 대한 인식을 바꿀 때가 됐다고 말한다. “자가용이나 집을 소유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만족의 대가가 너무 비싸요. 빚을 내서 집을 샀는데, 정작 하루 종일 집에 있는 것은 가구 아닌가요(웃음). 소유하기보단 필요할 때 빌려 쓰는 게 훨씬 낫지요. 그럼 적게 벌어도 되고요.”

한편으론 그가 몸담았던 금융산업에 대한 경고도 잊지 않았다. “금융은 굉장히 빨리 돈을 벌 수 있는 분야입니다. 하지만 망하려고 하면 가장 빨리 무너질 수 있는 분야죠. 우리 금융산업은 낙후돼 있는 만큼 발전 가능성도 무궁무진합니다. 그러나 하루 빨리 체질을 개선하지 않으면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동안 증권업은 주가가 오르건 내리건 거래가 발생하면 돈을 벌 수 있는 수익구조였어요. 하지만 이젠 어디서나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증권업이 가지는 의미가 사라지고 있어요.”

건설업, 철거업 등 7번의 창업 실패를 겪은 그는 2000년 기업 구조조정시장에 뛰어들어 7전8기의 성공신화를 썼다. 자산 1조5000억원 규모의 뉴코아 매각을 비롯해 신호스틸(현 휴스틸), 프로칩스, 삼익악기, 신화특수강, 크라운제과 등 굵직굵직한 구조조정 과정에 자문사나 펀드 투자자로 참여해 순탄하게 마무리했다.

그는 철거업에서 금융업의 성공방정식을 깨달았다고 했다. “철거는 파괴가 아니라 시작입니다. 철거를 하면서 폐기물은 재활용할 수 있게 해야 하고, 다음 공정의 작업자가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마지막에는 깨끗하게 물청소를 해서 인계를 합니다. 기업 구조조정시장도 부실기업을 정상화시켜 새로운 주인에게 인계한다는 점에서 철거업과 비슷합니다.”

2003년에는 자본잠식 상태였던 쌍용캐피탈을 인수해 1년 만에 흑자로 전환시켰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죽을 고생’을 했다. 고작 400억원에 불과했던 운용자산은 5년 만에 1조원으로 늘었다. 2005년에는 브릿지증권을 인수해 금융의 신흥강자로 떠올랐다. 골든브릿지금융그룹은 자산운용과 투자은행(IB)을 양대 축으로 탄탄대로를 달렸다.

하지만 위기도 있었다. 2009년 골든브릿지 계열에 편입한 상업저축은행은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파로 수익성이 악화돼 회생자금을 계속 퍼부어야 했다. 골든브릿지투자증권은 지난해 12월까지 1년 넘게 지속된 노사갈등으로 혹독한 시련을 겪어야 했다.

“세상을 살기 좋게 바꾸는 데 돈 쓸것”
이 고문은 “인생 2막은 가지고 있는 것을 내려놓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가지려고 애쓸 필요도 없고, 가지려고 해도 쉽게 가지지 못한다는 얘기였다. “돈은 모래나 담배연기와 같습니다. 잡으려고 할수록 손에서 빠져 나가버리죠. 돈을 벌기 위해서는 먼저 돈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에게 있어 돈이란 세상을 좀더 살기 좋은 곳으로 바꿀 수 있는 도구다. 돈에 대한 이러한 철학은 노동운동을 할 때부터 굳건히 지켜온 그의 신념이다. 벌써 8년째 한국과 베트남의 가교역할을 하는 한베재단과 중앙아시아 5개국의 다자간 교류협력을 모색하는 실크로드재단을 설립하는 등 비영리 공익사업에 나선 것도 이러한 철학에서 기인한다. 이 고문은 한베재단에 사재 95억원을 출연했다.

그는 암을 선고받기 전까지 죽도록 일만 했다. 하루에 5시간 이상 잠을 잔 적이 없고, 사무실에서 살다시피 했다. 누군가 건강을 걱정하면 “일하다 죽으면 행복하지 않겠냐”고 반문했다. 하지만 지난 4년 동안 그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다. 육체노동은 그에게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인생, 뭐 있습니까. 이렇게 느리게 사는 게 행복한 거죠.”  


▒ 이상준 고문은…
1958년생. 서울대 자원공학과 졸업, 87년 전태일 노동자료연구소 정보화 팀장, 89년 전국보험노동조합연맹 홍보부장, 98년 국회의원 보좌관(김영선 한나라당 의원), 2000년 골든브릿지 창업, 2003년 쌍용캐피탈 대표, 2005년 브릿지증권 대표, 2006년 골든브릿지금융그룹 회장, 2007년 한베재단 설립, 2008년 실크로드재단 설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