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20일 국내 IT(정보기술)업계에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카이스트 연구진이 ‘구글 글래스’보다 30배 빠르고 3배 이상 사용 시간이 긴 ‘케이 글래스(K-Glass)’를 개발했다는 것. 이로써 증강현실 시대가 눈앞에 성큼 다가왔다는 평가가 나왔다. 2020년 증강현실 산업의 규모가 420조원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귀 기울일 만한 얘기다. 카이스트 연구진을 만나 케이 글래스를 체험해보고 국내 증강현실 산업의 미래를 전망해봤다.
- 케이 글래스를 쓰고 눈앞에 영문책을 갖다 대자 한국어판 표지가 디스플레이창에 나타났다.
- 케이 글래스를 쓰고 눈앞에 영문책을 갖다 대자 한국어판 표지가 디스플레이창에 나타났다.
투박하고, 거친 생김새, 다듬어지지 않은 케이 글래스의 외형은 초등학교 과학시간에 만드는 전자회로를 연상케 했다. 케이 글래스는 크게 세 가지 부분으로 구성됐다. 디스플레이창과 입력장치, 증강현실 전용 프로세서가 내장된 전자 장치가 그것이다.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이란 사용자의 현실세계에 3차원 가상물체를 겹쳐 보여주는 기술이다. 케이 글래스를 직접 써보니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는 장면에 케이 글래스의 디스플레이창이 겹쳐 보였다.

눈앞에 영어책 ‘To kill a mockingbird(하퍼 리 저, 앵무새 죽이기)’를 갖다 대 보았다. 프로세서가 책을 인식하자 한국어판 표지가 디스플레이창의 왼쪽 상단에 나타났다. 케이 글래스의 전용 프로세서가 책을 인식하고 데이터베이스에서 책에 관련된 정보를 불러들여 착용자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 프로세서는 시각집중모델 방식으로 작동된다. 보고 있는 화면에서 의미 있는 부분을 무의미한 영역들로부터 분리해 인식한다. 케이 글래스를 주도적으로 개발한 김경훈 연구원은 “불필요한 연산을 제거해 증강현실 알고리즘의 연산 속도를 높였다”고 설명했다. 증강현실 전용 프로세서는 65나노미터 공정에서 제작돼 32㎟ 면적에 1.22TOPS(1초당 1012 연산속도) 성능을 낸다. 구글 글래스보다 30배 빠른 속도가 이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연구팀은 전력 소모를 최소화하기 위해 뉴런의 신경망을 모방한 네트워크 구조를 적용했다. 이는 가장 최적화된 정보처리 과정을 가능하게 해준다. 프로세서 내부에서는 데이터가 활발하게 이동한다. 일반적인 상용 프로세서는 데이터 버스(data bus·컴퓨터에서 기억장치로부터의 판독이나 기록을 위해 데이터 신호를 각 처리 장치로 전송하는 경로)를 공유해 데이터를 주고받기 때문에 큰 사이즈의 데이터를 주고받을 때 병목현상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반면 케이 글래스는 36개의 CPU(중앙처리장치)가 바둑판 형태로 연결돼 있으며, 큰 데이터를 옮겨야 하는 경로를 예측해 그 쪽에 많은 하드웨어 리소스를 할당하도록 설계됐다. 뉴런처럼 얽히고 설키게 연결해 데이터를 효율적으로 관리하도록 한 것이다. 이를 통해 각 CPU는 서로 정보 교류를 하면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찾아낸다.

개발 환경은 안드로이드 환경이다. 연구팀이 개발한 애플리케이션(응용프로그램·이하 앱)을 실행하면 인터넷, 유튜브, 이메일 등 휴대폰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기능이 가능하다. 카메라 앱을 실행해 사진 촬영을 하는 것도 물론 가능하다.

리모컨(Remote control)의 터치패드가 입력장치로 사용됐다. 화면에 나타난 커서를 상·하·좌·우로 이동시킬 수 있으며 가운데 오케이(OK) 버튼은 마우스의 ‘클릭’ 역할을 한다.

연구팀을 지도한 유회준 카이스트 전기전자공학과 교수는 케이 글래스와 구글 글래스의 기술력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했다.

“게임을 할 때 그래픽 카드가 있고 없는 차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래픽 카드가 있으면 훨씬 최적화된 상태에서 빠르게 게임을 즐길 수 있습니다. 반대의 경우, 기본적인 실행조차 더디게 진행됩니다. 구글 글래스는 일반 CPU를 사용했기 때문에 연산 속도가 느립니다. 케이 글래스는 증강현실 전용 프로세서를 사용했기 때문에 사용시간이 길어지고 속도가 빨라진 것입니다.”

구글 글래스는 바코드 등의 표식을 인식해 해당 물체에 가상 콘텐츠를 첨가하는 방식의 증강현실을 구현한다. 그렇기 때문에 표식을 설치하기 힘든 야외에서는 증강현실을 구현할 수 없는 것이 단점. 전력 소비량이 많아 지속 사용 시간은 2시간 정도다.

케이 글래스의 활용 방안은 무궁무진하다. 상용화되지 않는 현 상태에서도 사업 제안이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다. 유 교수는 몇 가지 예를 들었다.

“월드컵 경기를 관람할 때 먼 거리에 있는 관중석에서는 선수가 잘 안 보입니다. 그때 증강현실이 덧입혀지면 케이 글래스를 통해 선수의 이름이 뭔지, 지금 상태는 어떤지가 파악됩니다. 심지어 심박과 맥박도 알 수 있습니다. 또 복잡한 기계를 고쳐야 할 때 머릿속에 아무리 설명서 내용을 넣어놔도 실전에선 막힐 수 있습니다. 케이 글래스를 쓰면 프로세서가 부품을 인식해 ‘펜치로 돌려서 분리하라’와 같은 명령이 나오는 겁니다. 세월호 침몰 사고와 같은 재난 상황에서도 선체 내 구조물을 인식해 이동 방향을 알려주는 역할이 가능해질 것입니다.”

글로벌 IT기업 ‘스마트 글래스’ 개발 박차
증강현실로 많은 것들이 가능해질 것이라는 전망과 함께 스마트 안경을 개발하려는 글로벌 IT기업의 움직임도 가속화되고 있다. 한국엡손은 지난 3월5일 스마트 글래스 ‘모베리오’의 2세대 모델인 ‘모베리오 BT-200’을 올 상반기 국내에 출시한다고 밝혔다. 지난 1월 미국에서 열린 세계가전전시회(CES·Consumer Electronics Show)에서 처음 공개한 이 제품은 초소형 입체(3D) LCD 프로젝터와 정밀 광학 장치가 들어가 3D 영화를 감상할 수 있다. 스마트 글래스의 중앙 스크린에 디지털 콘텐츠를 시스루(see-through) 방식으로 투사해 현실과 가상세계를 겹쳐 보이게 한다.

구글 역시 현재 미국에서 테스트 판매 중인 ‘구글 글래스’를 연내 일반인들에게 판매할 예정이다. 구글 글래스는 사진, 동영상 촬영, 영상통화, 음성메시지, 통역 등의 기능이 지원돼 현재 미국 경찰서와 항공사 등에서 사용되거나 사용이 검토되고 있다. 소니 역시 CES에서 시제품 ‘스마트 아이글래스’를 선보였다.

삼성전자도 오는 9월5~10일 독일 베를린에서 열리는 유럽 최대 가전전시회(IFA·Internationale Funkausstellung)를 목표로 스마트 글래스인 ‘기어 글래스’ 출시를 준비하고 있다. 기어 글래스의 디자인은 이어폰과 디스플레이가 합쳐진 모양이다.

이런 가운데 국내 대학 연구팀이 스마트 글래스를 개발한 것은 카이스트가 최초다. 아직 시제품 단계에 있는 케이 글래스의 갈 길은 멀다. 착용 시 무게감이 느껴지는 것을 개선해야 하고, 외형을 다듬어야 한다. 배 침몰 사고와 같은 재난 현장에서 쓰이기 위해서는 방수 기능과 내구성을 갖출 필요도 있다. 또 사물을 인식하고 해당 물체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서 칩 안에 방대한 양의 정보를 내장해야 한다.

하지만 케이 글래스가 글로벌 기업들이 개발하고 있는 스마트 글래스보다 우수한 기능성과 발전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점은 희소식이다. 글로벌 IT기업이 미래 먹거리로 삼고 있는 증강현실 산업이 한국에서도 융성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에릭 슈미트 구글 회장은 2011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구글 모바일 혁명’ 행사에서 이른바 ‘증강인류’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고 선언했다. 현실세계에 가상세계의 디지털 정보를 덧입혀 보여주는 ‘증강현실’ 기술이 인간의 인지능력을 훨씬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고 전망한 것이다.

유 교수는 이에 대해 “인지능력이라는 게 지혜가 아니라 지식이라면 동의한다”며 “칩에 많은 지식을 내장해 인간이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을 기억하고 수많은 복잡한 일들을 처리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라고 말했다.

유 교수는 국내 증강현실 산업의 미래에 대해서 이렇게 전망했다.

“요즘 창조경제라고 해서 소프트웨어 산업을 강조하고 있는데 사실 소프트웨어도 중요하고 하드웨어도 아주 중요합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반도체가 세계적이잖아요. 우리나라 반도체를 잘 활용하면서 소프트웨어 산업도 살리는 응용분야를 찾아야 하거든요. 그게 바로 증강현실입니다. 소프트웨어 산업과 하드웨어 산업이 같이 협력해서 맞춰 나가면 세계 시장을 리드할 수 있는 거죠.”

케이 글래스는 지난 2월10〜1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세계적 반도체 학술대회 ‘국제고체회로설계학회(ISSC)’에서 발표돼 큰 주목을 받았다. 올해 졸업을 앞두고 있는 김경훈 연구원은 실리콘밸리로 가서 케이 글래스 상용화에 매진할 계획이다.

1. 케이 글래스는 지난 2월10〜1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세계적 반도체 학술대회 ‘국제고체회로설계학회(ISSC)’에서 발표돼 큰 주목을 받았다. 2. 구글 글래스는 바코드 등의 표식을 인식해 해당 물체에 가상 콘텐츠를 첨가하는 방식의 증강현실을 구현한다.3. 케이 글래스는 36개의 CPU(중앙처리장치)가 바둑판 형태로 연결돼 있는 구조다.
1. 케이 글래스는 지난 2월10〜1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세계적 반도체 학술대회 ‘국제고체회로설계학회(ISSC)’에서 발표돼 큰 주목을 받았다.
2. 구글 글래스는 바코드 등의 표식을 인식해 해당 물체에 가상 콘텐츠를 첨가하는 방식의 증강현실을 구현한다.
3. 케이 글래스는 36개의 CPU(중앙처리장치)가 바둑판 형태로 연결돼 있는 구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