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 서울시 강남구 청담동 청구아파트 리모델링 현장. 이 현장에 시선이 쏠리고 있었다.
현장실사를 나온 건설신기술 심사위원들과 LH 직원들이 시공 장면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시공사인 현대산업개발이 지하 2층, 지상 19층 규모의 아파트에 SAP공법이라는 특허공법을 적용, 성공적으로 리모델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파트에 이 공법이 적용된 것은 이 현장이 처음이었다.
당시 현장에선 현대산업개발 구조팀, 시공팀과 SE라는 중소기업의 기술연구소가 협업을 벌이고 있었다. 이 현장은 수직증축이 아니라 지상 1층에 필로티를 만들어 꼭대기에 한 층을 올리고 수평으로 가구 수를 늘리는 공사였다. 이 공정의 과정은 대강 이러했다.
먼저 지하 2층으로 내려가 실내 바닥에 소구경강관파일(SAP) 수백 개를 박았다. 그 다음 지하 2층 실내 바닥의 콘크리트를 부수고 흙을 파냈다. 그러면 지하 2층 밑이 텅 비게 되는데 이것을 ‘뜬구조’라 한다. 이 뜬구조를 보충 설명하면 아파트 한 동 전체가 소구경강관파일 수백 개 위에 떠 있는 상태라는 뜻이다. 이렇듯 뜬구조 상태에서 지하 3층 바닥의 기초를 닦은 후 콘크리트로 바닥을 만들고 벽체를 만들었다. 지하 3층이 완성된 다음 지하 2층을 원상태로 복구하면 다 된 것이다.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마술처럼 보이는 공법인데, 건물이 소구경강관파일 위에서 잠시 공중부양을 한 듯 허공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청구아파트는 리모델링 후 이름을 ‘청담동 아이파크’로 바꿨다.
이 공사의 성공에는 SE라는 중소기업의 공이 컸다. SE가 SAP공법이라는 특허공법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공법은 기존 마이크로공법과 비교하면 25% 정도의 공사기간을 단축할 수 있고 20% 안팎의 공사비를 절감할 수 있다.

SAP공법은 상을 많이 받았다. 2012년 1월 한국건축구조기술사회의 기술인증을 받았다. 그해 11월 현대건설 기술대전에서 입상했고, 12월에는 LH ‘기초공사 다양화방안’에 채택됐다. 2013년 1월에는 국토해양부 건설신기술 인증도 받았다. 이 공법의 가치를 국가가 공인한 것이다. SAP공법은 이 밖에 국방과학연구소 탱크 기초시험장, 현대기아차 기술연구소, 워커힐호텔 리모델링, 현대백화점 무역센터점의 기계식주차장 등의 설계에 적용됐다.
SAP공법은 SE가 보유하고 있는 특허 130여개 중 하나에 불과하다. SE는 ‘Soil Engineering’의 약자다. SE는 기초지반 분야 컨설팅 전문기업이다. 지난 4월16일 발생한 세월호 참사의 여파로 기본이 중시되면서 이 회사에 세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건설도 기초공사가 가장 중요한데 이 회사는 ‘기초공사의 히든 챔피언’ 격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SE는 젊은 기업이다. 지난 5월1일로 창립 10주년을 맞았다. 송기용 사장은 현대산업개발 대리를 끝으로 사회에 나와 회사를 차렸다. 그는 회사를 차려야겠다는 아이디어를 현장에서 얻었다. 그가 현대산업개발 설계팀에 근무하던 2001년의 일이다.
기초공사에서 파일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선진국에서 그렇다는 얘기다. 종래 우리나라 건설현장에서 파일은 존재감이 낮았다. 대강주의가 판치는 공사판에서 파일인들 제대로 대접을 받았으랴. 그러니 파일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목소리도 별로 없었고 파일에 대한 연구성과도 부진했다. 그가 공사현장에서 관찰한 기존 파일의 문제점은 이러했다.
파일의 지지력 중 일부는 막대아이스크림 녹아버리듯 땅 밑에서 사장(死藏)돼 버린다. 이 힘은 파일이 원래 가지고 있는 자체 내력의 35~40%나 된다.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에 땅속에 35~40% 정도의 파일을 더 받아 지반을 다져야 한다. 파일의 설계하중 허용치는 법으로 정해져 있어 지지력을 무시한 채 마음대로 설계할 수 없고, 대충 시공할 수도 없다. 지난 10년 동안 과잉 설계로 인해 과다 시공된 파일은 전국적으로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는 “땅속에서 흩어져 버리는 지지력을 되살릴 수 있는 묘안은 없을까?” 하고 고민하다가 어느 날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파일 밑면적을 넓히면 된다’는 것이었다. 개선책은 간단했고 방법도 어렵지 않았다. 그의 고민은 기존 파일 하단부에 강철로 된 판을 덧대는 것으로 결실을 봤다.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이 쇠로 된 판을 ‘선단확장 이엑스티보강판’이라 부르는데, 이 보강판과 파일의 결합물이 ‘선단확장 이엑스티파일’이 됩니다. 파일이 가진 지지력의 효율을 높이는 만큼 파일을 아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보강판을 이용한 파일의 지지력 개선안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주위의 반응들도 회의적이었다.

남들이 중요성을 간과하던 파일의 가치를 깨닫고 기업가로 변신
그는 파일 사업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기에 이른다. 결심 동기를 묻자 그는 “(파일 개선방안을) 아무도 거들떠보고 있지 않아 그냥 내가 한번 해본 것뿐”이라고 말했다. 대답은 겸손했지만, 성과는 결코 겸손하지 않다. SE의 파일은 2004년 5월부터 2013년 12월까지 전국의 357군데 현장에서 쓰였다. 고층빌딩이 많이 분포한 수도권과 해안가에 인접한 인천, 부산, 군산, 경남 등지에서 많이 시공됐다.
2014년 1월 현재, SE의 손을 거쳐 간 파일은 45만여 개, 길이로 따지면 8000㎞를 훌쩍 넘어선다. 이 파일들이 지탱하고 있는 구조물 무게의 합은 6000만t을 넘겼고, 선단확장 이엑스티파일 덕분에 절감된 이산화탄소 양도 40만t을 넘어섰다. 어림잡아 15만 그루의 나무를 심은 셈이다. 건설사들이 원가절감한 공사비는 3000억원이 넘는다. 시공사들이 아낀 공사시간도 어마어마하다.
아이디어는 훌륭했지만 그것만으로 바로 돈을 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아이디어를 알리는 작업에 착수했다. 보강판 모형을 만들고, 동영상을 제작하고, 기술서적 다섯 권을 제작했다. 1년 동안 건설 관련회사를 돌아다니며 대략 900회의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했다. “프레젠테이션을 하루에 다섯 번 한 적도 있으니 지독한 강행군이었죠.”
2004년 마침내 첫 시공이 이뤄졌고 그 해를 넘기면서 선단확장 이엑스티파일을 눈여겨 보던 모 건설사가 SE를 불렀다. 건설사가 SE의 파일을 사용하겠다는 결정을 내리자 구조설계사들이 설계에 반영하기 시작했고, 선단확장 이엑스티파일이 차츰 더 쓰이게 됐다. 2004년 5월부터 2014년 1월까지 SE는 파일 분야에서만 600억원이 넘는 매출을 올렸다.
그러나 SE가 계속 순탄하게 성장한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SE에 지급해야 할 기술료를 주는 데 인색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선단확장 이엑스티파일의 유효성에 대한 소문이 업계에 퍼지자 이번에는 다른 장애물이 출현했다. 이 파일을 모방하고 응용한 제품들이 줄지어 나타난 것이다. SE는 끊임없는 연구개발(R&D)과 마케팅 노력으로 난관을 헤쳐나갔다.
SE는 선단확장 이엑스티파일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건설 현장에서 필요로 하는 제품 개발과 그 제품을 활용한 다양한 공법 개발에 매진해 왔다.
송 사장은 특허를 사들여 개량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친환경 보수보강재인 GCB(지오세라믹바인더)다. 건물 외벽이 손상됐거나 내벽이 좀 망가진 건물이 있다고 하자. 건물 일부가 좀 낡았다고 그 건물 전체를 몽땅 부술 수는 없다. 안전에 문제가 없는 한 구조물을 보수, 보강해 사용할 수 있을 때까지 사용하는 게 합리적인 선택일 것이다. 이때 필요한 존재, 다시 말해 구조물의 재빠른 보수와 보강을 위해 태어난 물질이 바로 SE의 GCB다. GCB는 용도가 넓다. 교량의 상판과 바닥, 옥상 녹화사업에도 쓰인다. GCB를 사용하면 단수(斷水) 걱정을 덜 수 있다. GCB를 물에 타 섬유에 적신 후 상수도관의 겉에 착착 붙이면 된다. GCB는 빨리 굳으면서도 차수성(遮水性)이 탁월해 보수보강재로 적합하다. 송 사장은 “수도관, 화학플랜트설비의 파이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대륙을 가로지르는 송유관이나 가스관 등에서도 GCB가 제 위력을 발휘할 날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특허 자체 개발도 하면서 남이 개발한 특허 사들여 개량하기도
GCB가 지금은 대단한 제품이 됐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특허제품이었지만 막상 시공해보니 예상치 못한 결함이 드러났다. 지하에서는 별 탈이 없던 GCB가 햇빛에 장시간 노출되니 균열이 발생한 것이다. SE는 기술연구소의 연구 인력을 재배치하고 연구 시간을 다시 투자했다. 기존 성분의 배합비율 변경과 새로운 성분의 가감을 통해 GCB의 개량을 이뤄냈다.
세라믹 계열인 GCB는 습기 제거에 탁월하고 악취가 없고 불에도 강하다. 현재 SE는 한국수자원공사, 서울시 상수도사업본부, 한국농어촌공사 등과 협약을 맺고 밸브실, 유량계실, 수로 등 여러 곳을 친환경 소재인 GCB로 보수 보강했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SE는 환경부로부터 ‘물산업 기술혁신상’을 받았다.
GCB 개량 작업은 바인더스라는 고화제(固化劑)와 이를 이용하는 PF공법을 개발하는 망외(望外)의 결과를 낳았다. SE는 무른 흙을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고화제를 보유하고 있다. SE기술연구소는 이 고화제를 ‘바인더스(Bindearth)’라고 부른다.
송 사장은 “조만간 본격화할 셰일 가스 채굴 때 생기는 공극을 메우는 데 바인더스는 꽤 괜찮은 물질이라고 자신한다”고 말했다. “근래에 땅이 갑자기 꺼지는 현상으로 인한 싱크 홀(Sink Hole·용식함지)에도 유용할 것입니다.”
바인더스와 PF공법의 해외진출 사례로는 베트남의 쓰레기매립장을 들 수 있다. 쓰레기매립장은 침출수가 밖으로 새어 나가면 큰 문제가 된다. 베트남의 쓰레기매립장 옆에는 동남아시아의 젖줄인 메콩강이 흐르는데, 이 쓰레기매립장의 침출수를 틀어막는 게 바로 SE다.
6월 말 현재 SE는 국내외에 지적재산권 130여개를 출원, 보유하고 있다. 10년 역사에 비해 엄청 많은 편이고, 모두 기초지반과 관련된 특허라는 점이 눈길을 끈다. 세계 최고의 기초지반 전문기업을 향한 송 사장의 집념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는 업무적인 목표 외에 꿈이 하나 더 있다. 시도 때도 없이 한반도를 괴롭히는 황사를 바인더스를 활용해 반영구적으로 차단하겠다는 야심찬 포부가 그것이다. “황사의 진원지에서 바람에 모래가 날리는 일이 없도록 모래를 굳히면 됩니다.” 어떻게 하면 된다고? “고비사막에 바인더스와 물을 좀 뿌리고 갈아주면 됩니다. 시멘트와 달리 바인더스는 친환경적이라 풀과 나무 등 식물의 생장에도 전혀 문제될 게 없습니다.” 송 사장과 SE 덕분에 황사가 더 이상 한반도를 향해 날아오지 않는 청명한 그날을 그려본다.
▒ 송기용 사장은…
1970년생. 전라고 졸업(1985.3~88.2), 성균관대 건축공학과 졸업(89.3~96.2), 현대산업개발 구조설계팀(96.2~2004.4) SE 대표이사(04.5~현재). 2009년 기술혁신 국무총리상 등 수상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