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통 상을 받거나 높은 직급으로 승진하는 사람은 특별한 사람이라는 통념이 있지요. 하지만 저는 남보다 뛰어나지 않은 평범한 사람도 자기 직분을 성실히 수행하고 자기계발을 지속적으로 한다면, 반드시 노력한 만큼 성취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이상원 두산중공업 기술상무의 말이다. 생산현장에서 정직한 땀방울을 흘리며 한걸음 한걸음씩 전진해 기어코 경지에 오른 명장(名匠)의 우직하면서도 담백한 소감이 가슴에 와 닿았다. ‘진정한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격언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는 지난 6월13일 상무로 승진했다. 단순한 임원 승진이 아니다. 두산중공업 사상 최초의 생산직 임원이라는 기록을 썼다. 국내 산업계에서 생산직 출신이 사무직으로 전환한 뒤에 임원으로 승진한 사례는 간혹 있었다. 하지만 생산직 직원이 곧바로 임원이 되는 경우는 매우 이례적이다.
“승진 발령 소식을 듣고는 좀 얼떨떨했습니다. 지난해 공장장으로 발령을 받을 때도 생산직으로는 처음이었죠. 2년 연속 뜻밖의 승진을 한 탓에 저도 놀랐고 아내도 놀랐습니다(웃음).”
두산중공업은 지난 2011년 ‘생산직 성장 비전’을 선포하면서 새로운 인사제도를 도입했다. 먼저 생산직 직위 명칭을 사무직과 동일하게 변경했다. 두 직군 사이에 있는 보이지 않는 장벽을 허물기 위한 조치다. 아울러 생산직 사원의 체계적 육성을 목표로 내걸었다. 특히 ‘생산직 사원 성장 투트랙(Two Track) 시스템’이 눈길을 끈다. 하나는 생산직이 현장관리자를 거쳐 기술임원 승진 기회를 가질 수 있는 ‘현장 매니지먼트 트랙’이고, 또 다른 하나는 생산직이 엑스퍼트(Expert)를 거쳐 마이스터(Meister)로 성장할 수 있는 ‘기술 전문가 트랙’이다. 이상원 상무는 첫 번째 트랙을 통해 처음 배출된 생산직 임원인 셈이다.
“먼저 회사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어요. 새 인사제도의 뒷받침이 없었다면 제가 임원이 되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을 테니까요. 생산직 후배 직원들도 자기들의 꿈이 이뤄졌다면서 다들 기뻐하더군요. 후배들의 롤모델로서 더 열심히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이 상무는 경북 울릉도가 고향이다. 면 소재지로부터 1시간 거리에 있는 10가구 남짓한 작은 오지마을에서 자랐다. 중학교 2학년 때 대구로 수학여행을 가면서 버스를 처음 타봤을 만큼 넉넉지 못한 성장기를 보냈다. 그가 두 번째로 버스를 탄 것은 울릉종합고(현 울릉고)를 졸업한 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대구로 나왔을 때다.

생산직 직원들의 ‘롤모델’로 우뚝 서
그는 대학에 진학할 만한 집안 형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곧장 공무원이 되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첫 번째 시험에 응시했다가 아쉽게 낙방했다. 대구에 살던 작은아버지는 “울릉도로 돌아가면 오징어잡이밖에 더하겠느냐. 여기서 기술을 배워라”고 했다. 그의 운명을 바꾼 조언이었다. 스무 살 청년은 직업훈련원에 들어가 1년간 기술을 배웠다. 그런 후 현대양행(1980년 공기업인 한국중공업으로 전환된 뒤 2001년 두산그룹에 인수되면서 두산중공업으로 바뀜)에 공채시험을 통해 입사했다. 1979년 3월이었다. 그는 입사 후에도 사내 직업훈련원에서 기술을 더욱 갈고 닦았다.
“처음 입사할 때는 먹고 살기 위한 생계방편을 선택했던 거죠. 그런데 어느 날 좋은 회사에 다니는 것 자체가 ‘인센티브’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때부터 일을 할 때는 즐겁게 하자는 신조가 생겼죠. 저는 공고나 대학을 나오지도 않았기 때문에 모든 주변 사람이 선생님이라는 생각으로 묻고 배우면서 일을 익혀나갔습니다.”
이 상무는 35년간 오직 생산현장 외길만을 걸었다. 그는 화력발전소나 원자력발전소를 가동하는 핵심적 기능을 하는 터빈 부품 생산이 전문분야다. 터빈은 열에너지를 회전력으로 변환시켜 발전기를 구동하는 역할을 한다. 이 상무는 터빈 부품 중에서도 가장 핵심으로 꼽히는 ‘터빈 블레이드(Turbine Blade)’ 분야에서 혁혁한 성과를 거둬왔다. 터빈 블레이드는 터빈의 육중한 회전축을 돌리는 부품이다. 발전소를 신설하거나 증설할 때 가장 먼저 설계하는 부품이 바로 터빈 블레이드다. 터빈 블레이드가 발전소의 발전효율을 결정적으로 좌우하기 때문이다.
그가 터빈 블레이드와 평생의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지난 1988년이다. 회사가 처음 도입한 터빈 블레이드 생산설비의 운전기술을 배우기 위해 미국으로 연수를 떠났을 때다. 그는 난생 처음 가본 미국에서 한눈 팔지 않고 기술을 익혔다. 귀국 후에는 터빈 블레이드를 생산하는 작업반장을 맡았다.
그때부터 이 상무는 터빈 블레이드라는 한 우물만을 파기 시작했다. 그는 끈질긴 노력을 통해 터빈 블레이드 국산화라는 업적을 냈다. 특히 증기터빈 블레이드 33종과 가스터빈 블레이드 17종의 국산화를 이뤄내면서 약 2700억원의 수입대체 효과를 가져왔다.
“물론 처음에는 아무 기술도 없는 백지상태였죠. 하지만 끈질기게 달라붙어 3개월 만에 터빈 블레이드의 날개 부분 시제품을 만들어냈죠. 날개 부분이 가장 가공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제가 직접 공작기계를 돌려 가공작업을 했기 때문에 모든 신경을 집중시켰죠. 그때가 터빈 블레이드 국산화의 가장 큰 고비였던 것 같습니다. 시제품을 제작한 후에 도면과 비교해보니 거의 100% 일치하더군요. 얼마나 기쁘던지…. 어쨌든 그때부터 터빈 블레이드 한 분야만 줄기차게 파고들게 됐습니다.”

발전소 핵심부품 ‘터빈 블레이드’ 국산화 주역
어떤 분야든 10년간 종사하면 전문가가 된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전문가를 넘어 장인(匠人)의 반열에 오르려면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 쏟아야 한다. 이 상무가 생산현장에서 기울인 노력은 꾸준하고도 집요했다. 그는 1998년 산업자원부(현 산업통상자원부)가 주최하고 한국표준협회가 주관하는 ‘국가품질경영대회’에서 최고상인 금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다. 이 대회에 회사 대표로 출전할 수 있는 자격을 얻기 위해 8년에 걸쳐 16차례의 사내 기술경진대회에 도전했다. 다시 말하면 ‘15전16기’의 결실이었던 것이다.
정상에 오르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더 어려운 법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는 2000년대 들어 더욱 빛을 발했다. 2003년 11월에는 우수 자본재 개발을 통해 국가 산업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대통령 표창을 받은 데 이어 대한민국 품질명장으로 지정되는 겹경사를 맞았다. 또 2011년에는 국가품질경영대회에서 동탑산업훈장을 수훈했다. 당시 37년 대회 역사상 생산직 최초로 산업훈장을 받은 기록까지 남겼다.
“사실 생산현장에서는 혼자서 기술을 개발할 수 있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 기술이 현장 동료, 관련 부서와의 협력과 팀워크를 통해 개발되죠. 저 역시 동료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제가 받은 상이나 훈장은 주변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을 겁니다.”
이 상무는 지난 6월 승진 얼마 뒤 한 통의 이메일을 받았다. 한국폴리텍대학 대구 달성캠퍼스에 재학 중인 학생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예전에 이 상무의 인생 체험을 바탕으로 한 특강을 들은 학생이었다. 이 학생은 승진 축하 인사와 함께 “모든 기능인들의 희망이 되어주세요”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또 다른 뜻밖의 축하 인사도 받았다. 그의 고향 울릉군의 자치단체장인 최수일 군수가 직접 축전을 보내온 것이다. 고교 동창생 한 명은 울릉고 총동문회가 현지 사거리에 내건 승진 축하 플래카드를 사진에 담아 카카오톡으로 전송해주기도 했다. 이 상무는 가슴이 뭉클하고 벅찼다. 더 큰 사명감이 솟구칠 수밖에 없었다.
“제가 간혹 실업계 고교와 전문대에 가서 특강을 하는데, 그 제목이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길이 있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스스로 길을 개척할 수 있는 겁니다. 앞으로도 저와 같은 후배들이 많이 나올 수 있도록 더욱 솔선수범해야겠지요. 아울러 제가 맡고 있는 터빈2공장을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춘 공장으로 만들어나가고 싶습니다.”
▒ 이상원 상무는…
1959년생. 1979년 두산중공업(당시 현대양행) 입사, 91년 선임반장, 98년 총괄직장, 2002년 생산파트장, 2010년 기술부장 및 발전기공장 현장총괄기장, 2013년 터빈2공장장, 2014년 6월 기술상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