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중부지방 토스카나주(州)의 주도(州都)인 피렌체(Firenze)는 도시명이 ‘꽃’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인구가 40만이 채 되지 않는 중소도시이지만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관광지 중 하나로 유명하다. 피렌체는 시가지 곳곳이 박물관이나 다름없다. 르네상스 시대의 걸작 예술품과 건축물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기 때문이다.
피렌체는 14~16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문화운동인 르네상스의 발흥지로 알려져 있다.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의 부흥을 통해 새로운 문화 창달을 목표로 했던 르네상스는 이탈리아를 넘어 서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가면서 근대 유럽문화 형성의 기초를 마련했다. 이 르네상스 시대의 도래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주인공이 바로 피렌체를 무대로 수백 년간 활약했던 메디치 가문이다.
메디치 가문이 이탈리아 역사에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Giovanni di Bicci de’ Medici, 1360~1429)가 은행업에 뛰어들어 이름을 얻으면서부터다. 조반니 디 비치는 우리가 알고 있는 위대한 메디치 가문의 실질적인 창업자로 평가된다.
1395년 삼촌이 로마에서 운영하던 ‘메디치 은행’을 인수한 조반니 디 비치는 2년 후 은행 본점을 피렌체로 옮긴다. 그리고 불과 몇 년 뒤인 1402년 피렌체의 금융업 종사자 길드(Guild: 상공업자들의 조합) 회장으로 취임했다. 삼촌 밑에서 일하면서 체득한 은행업 노하우를 맘껏 발휘하며 피렌체 금융계의 실세로 부상한 것이다.
어느 날 그의 은행에 손님 한 명이 대출을 받으러 찾아왔다. 나폴리 출신의 귀족인 발다사레 코사(Baldassare Cossa)라는 인물이었다. 그때부터 8년간 거래가 이어졌다. 그 사이 발다사레 코사는 추기경을 거쳐 1410년 교황(요한네스 23세)에 선출됐다.
당시 가톨릭교회는 이탈리아의 로마 교황청과 프랑스의 아비뇽 교황청으로 분열돼 있었다. 교황도 두 명이었다. 그런데 교회 분열을 극복하자는 취지로 열린 ‘피사 종교회의’에서 전혀 뜻밖의 결과가 나왔다. 또 다른 교황(알렉산데르 5세)이 선출된 것이다. 발다사레 코사 추기경은 알렉산데르 5세가 1년 만에 서거하면서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황에 오른 것이었다. 그 덕에 조반니 디 비치의 메디치 은행은 교황청의 주거래은행이 되는 큰 선물을 받았다. 막대한 교회자금 거래를 통해 단숨에 일등은행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교황 요한네스 23세와의 특별한 거래
1414년 독일 콘스탄츠에서 또 종교회의가 열렸다. 당대 유럽 최고의 권력자인 신성로마제국 황제 지기스문트가 소집한 것이었다. 이른바 ‘콘스탄츠 공의회’다. 이 회의에서 지기스문트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앞세워 3명의 교황을 강제 폐위하고 마르티누스 5세를 가톨릭교회의 적법한 교황으로 임명했다.
또 지기스문트는 요한네스 23세를 구금하고 3만5000플로린(Florin: 피렌체 지방의 통화)에 달하는 벌금을 부과했다. 당시 피렌체에서는 연 수입이 150플로린 정도면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액수의 벌금이었던 셈이다. 교황에서 폐위된 요한네스 23세에게 그런 거액이 있을 리 만무했다.
이때 조반니 디 비치는 자신의 장남인 코시모 데 메디치(Cosimo di Giovanni de’ Medici, 1389~1464)와 뜻을 모아 요한네스 23세에게 벌금 낼 돈을 대출해줬다. 물론 요한네스 23세는 돈을 갚을 능력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조반니 디 비치는 큰 손해를 감수하고 대출을 해준 것이다.
금융업의 요체(要諦)는 ‘신용’과 ‘신뢰’다. 그것을 누구보다 깊이 가슴에 새겼던 조반니 디 비치는 한때 최대 고객이었던 요한네스 23세에게 의리를 지킨 것이다. 메디치 은행은 단기적으로 큰 손실을 입었다. 하지만 고객관계를 무엇보다 중시하는 신용의 상징으로 부각되면서 일등은행으로 나아가는 확고한 영업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다. 몇 년 후 교황 마르티누스 5세는 메디치 은행을 교황청의 주거래은행으로 지정했다. 눈앞의 이익에 연연하지 않고 멀리 내다본 조반니 디 비치의 결정은 탁월한 한 수였던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메디치 가문의 은행업은 날개를 달게 된다.
15세기 피렌체 공화국은 20여개 길드가 조직돼 있을 만큼 상업이 크게 번창한 부국이었다. 정부(시뇨리아: Signoria)는 길드를 대표하는 소수 의원들이 회의체 형식으로 이끌어나갔다. 경제권력이 정치권력을 함께 행사하는 상공인들의 나라였던 셈이다. 그 시대 피렌체에서는 부를 거머쥔 상공인들이 교회나 수도원 등 공공건물 건축비용을 기부하는 등 요즘 말로 사회공헌활동을 당연시하는 문화가 있었다. 피렌체의 부자들 중에서도 특히 메디치 가문이 재산의 사회환원에 열성적이었다.
1429년 조반니 디 비치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은행가답게 항상 신중하고 겸손하게 처신했다. 자식들에게도 자신의 인생철학을 본받으라고 당부했다. 그는 죽기 전에 유언을 남겼다. 그 요지는 이렇다. “신중하게 너의 의견을 제안해라. 절대로 자존심을 내세우지 말아야 인심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소송이나 정치적인 논쟁을 피하고 언제나 대중의 시선에서 벗어나라.”
조반니 디 비치의 가업을 승계한 것은 장남 코시모다. 코시모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메디치 가문의 본격적인 전성기를 열어가기 시작했다. 메디치 은행의 지점망은 유럽 주요 도시로 쭉쭉 뻗어나갔다.
창업자 조반니 디 비치의 유언에 담긴 뜻
하지만 코시모에게 뜻밖의 위기가 찾아왔다. 피렌체의 실력자였던 알비치가 자기를 따르는 유력 가문들과 손잡고 평소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메디치 가문의 젊은 수장 코시모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민 것이다. 알비치의 올가미에 걸려 감옥에 투옥된 코시모는 생명의 위협까지 받았지만 결국 5년 추방형에 처해진다.
그는 피렌체의 우방국인 베네치아로 망명을 떠났다. 얼마 후 큰 반전이 일어났다. 무능하고 독단적인 알비치가 제멋대로 권력을 행사하다가 피렌체에서 추방된 것이다. 코시모는 곧장 피렌체로 돌아왔다. 메디치 가문을 지지해온 수많은 시민들은 크게 환영했다. 1434년의 일이다.
이때부터 코시모는 피렌체의 실질적인 지도자로 부상하게 된다. 다음해인 1435년에는 피렌체 정부의 대표자 격인 ‘곤팔로니에레(Gonfaloniere)’에 취임한다. 공식적인 통치자가 된 것이다.
코시모가 피렌체를 이끌어가던 15세기 이탈리아 반도는 여러 도시국가로 사분오열돼 있었다. 북부 지역은 밀라노 공국(公國: 군주가 아닌 공작이 통치하는 소국)과 베네치아 공화국이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고, 남부 지역은 나폴리 왕국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 피렌체 공화국을 비롯한 여러 중소 도시국가들이 끼여 있는 형국이었다. 피렌체는 상업 발달 덕분에 주요 국가에 포함되기는 했지만 군사력은 상대적으로 약한 편이었다. 주변 강대국에 끼여 있는 오늘날 한국과 비슷한 처지였다고 할까.
어쨌든 피렌체의 통치자 코시모는 국가의 평화와 안정을 보장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안고 있었다. 당시 이탈리아 반도의 세력 판도를 감안하면 무엇보다 주변국과의 외교관계가 중요했다. 코시모는 외교전략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국익을 위해 매우 전략적이고 유연한 대외정책을 구사했다. 무엇보다 특정 국가의 세력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 여러 국가와 탄력적인 외교관계를 맺어나갔다. ‘힘의 균형’을 위해서라면 심지어 전통의 우방인 베네치아와도 등지는 파격적 포석을 두기도 했다. 코시모는 치밀하고 냉철한 외교전략을 바탕으로 피렌체의 평화를 유지했다. 나아가 이탈리아 전체의 정세를 안정시키는 구심점이자 중재자 역할을 했다.
‘외교술의 달인’ 코시모 데 메디치
훗날 <군주론>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사상가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코시모에 대한 인물평을 이렇게 남긴 바 있다. “그는 대단히 사려 깊은 사람이었다. 외모는 중후하며 예의가 바르고 덕망이 높았다. 초년은 고통과 유배와 신변 위협 속에서 지냈으나, 지칠 줄 모르는 관대한 성향으로 모든 정적(政敵)을 누르고 사람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었다. 큰 부자이면서도 살아가는 모습은 검소하고 소탈했다. 당대에 그만큼 국정에 통달한 사람도 드물었다. 그 덕분에 변화무쌍한 도시 피렌체를 30년 동안 실질적으로 지배할 수 있었다.”
1439년 피렌체에서 그리스 정교회(비잔틴교회)와 로마 가톨릭교회의 종교회의가 열렸다. 이른바 ‘피렌체 공의회’다. 이전 수 세기 동안 대립과 반목을 거듭해왔던 두 교회가 만난 것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이 역사적 회동을 기획하고 주선한 주인공이 바로 코시모였다. 코시모는 700여명에 달하는 그리스 정교회 대표단의 모든 참가비용을 직접 부담했다.
피렌체 공의회는 동방과 서방의 이질적인 문화가 만나는 극적인 접점 구실을 했다. 당시 그리스 정교회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가했던 비잔틴제국의 철학자 게미스토스 플레톤은 흥미진진한 플라톤 철학 강연으로 피렌체 지식인들의 호기심을 크게 자극했다.
피렌체 공의회를 조직한 코시모 역시 플레톤의 강연에 큰 감명을 받았다. 나아가 코시모는 사재(私財)를 털어 피렌체 인근에 ‘플라톤 아카데미’를 개관한 후, 인문학자 마르실리오 피치노에게 플라톤 전집을 라틴어로 번역하도록 시켰다. 이를 계기로 유럽인들은 처음으로 플라톤 철학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됐다. 특히 플라톤 아카데미는 훗날 유럽의 사상 및 철학 발전에 큰 영향을 주는 근거지가 된다.
코시모의 인문학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나날이 커졌다. 그는 가치가 있는 고문서를 닥치는 대로 수집했다. 학자와 필경사(筆耕士) 등으로 이뤄진 코시모의 대리인들은 유럽 안팎을 돌아다니며 희귀하거나 귀중하다고 판단되는 서책이라면 모조리 사들였다. 코시모는 아낌없이 돈을 쏟아 부었다. 이렇게 수집된 엄청난 양의 장서들은 모두 ‘메디치 도서관’에 보관됐다. 메디치 도서관은 나중에 로마 교황청이 설립한 ‘바티칸 도서관’의 벤치마킹 모델이 됐다. 나아가 르네상스 시대의 학문적, 사상적 기초 역할을 하게 된다.

르네상스 시대 학문의 구심점 ‘메디치 도서관’
피렌체의 현자(賢者)이자 수호자, 또한 르네상스의 초석을 놓은 인문학의 열렬한 후원자였던 코시모는 1464년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코시모의 치세(治世)에 정치·사회적 안정과 경제·문화적 번영을 구가했던 피렌체 시민들은 그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했다. 피렌체 정부는 코시모를 ‘국부(國父)’로 부르기로 하는 법령을 통과시켰다.
코시모 사후에 메디치 가문의 바통은 장남 피에로 데 메디치(Piero di Cosimo de’ Medici, 1416~1469)가 이어받았다. 그는 품성이 온화하고 현명했지만 평생 통풍이라는 고질병을 앓아온 병약한 인물이었다. 실제 그는 아버지로부터 가문을 물려받은 지 불과 5년 만에 세상을 뜨고 만다.
하지만 메디치 가문에는 ‘준비된 후계자’가 있었다. 피에로의 장남 로렌초 데 메디치(Lorenzo di Piero de’ Medici, 1449~1492)가 그였다. 로렌초는 불과 스무 살의 나이에 메디치 가문과 피렌체의 미래를 두 어깨에 짊어지게 됐다. 하지만 그는 어려서부터 매우 영민하고 용감한 데다 조숙하기까지 했다. 할아버지 코시모가 가문의 적통(嫡統)을 이어갈 장손에게 일찌감치 후계자 교육을 시켰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버지 피에로도 플라톤 아카데미를 주관하던 당대 최고의 인문학자 마르실리오 피치노를 개인교사로 기용해 로렌초에게 최상의 교육을 시켰다.
로렌초는 조부와 부친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메디치 가문의 젊은 계승자는 피렌체 시민들의 지지를 받는 당당한 지도자로 서서히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로렌초의 정치적 리더십이 가장 빛을 발한 순간은 1478년 나폴리 왕국과의 사이에 전운이 감돌 때였다.
당시 로마 교황 식스투스 4세는 메디치 가문에 악감정을 품고 있었다. 수 년 전 로렌초는 식스투스 4세의 대출 요청을 정치적 이유로 거절한 바 있다. 얼마 후에는 교황이 측근인 프란체스코 살비아티를 피사 대주교로 임명하자 그의 피사 진입을 막아 섰다. 피사 대주교는 전통적으로 피렌체 정부의 결정에 따라 임명돼 왔다. 그런 관례를 교황이 깨뜨리자 로렌초가 반발한 것이다. 교황 식스투스 4세는 메디치 가문의 젊은 리더인 로렌초가 괘씸했다. 그는 은밀히 자객을 보내 로렌초와 그의 동생 줄리아노를 암살하도록 사주했다. 이 암살 기도는 로렌초가 가까스로 화를 모면하면서 실패로 끝났다. 그러자 식스투세 4세는 나폴리 왕국의 국왕 페란테를 부추겨 피렌체에 전쟁 선포를 하도록 만든 것이다. 페란테는 이탈리아 반도의 패권을 호시탐탐 노리던 야심가였다.

‘위대한 자’ 로렌초 데 메디치
피렌체 공화국은 돌연 심상치 않은 전운에 휩싸이게 된다. 전쟁에 대한 불안감과 공포가 시민들에게 빠르게 확산됐다. 이때 로렌초가 나섰다. 그는 피렌체 정부(시뇨리아)에 서신을 보냈다. “나는 여러분의 승인 하에 나폴리로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나야말로 적이 가장 원하는 대상이기에, 내가 가게 되면 피렌체의 평화를 되찾으리라 믿습니다. 이 시대의 그 어떤 시민보다 큰 명예와 의무를 지닌 나는 목숨을 거는 한이 있더라도 나라를 위해 봉사해야 합니다. 이제 나는 갑니다. 내가 죽든 살든 상관없이 우리 도시에 도움이 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로렌초의 서신이 낭독되자 시뇨리아에 모인 피렌체의 지도층 시민들은 모두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피렌체 정부는 로렌초의 결심을 받아들여 그를 나폴리 대사로 임명했다. 로렌초는 곧장 나폴리로 떠났다. 그에게는 무기도, 군대도 없었다. 하지만 피렌체를 수호하겠다는 사명감과 나폴리 왕국의 국왕 페란테와 반드시 담판을 짓겠다는 결의가 가슴 속에서 맹렬히 솟구치고 있었다. 로렌초는 적진에 석 달간 머무르면서 페란테와 수시로 만나 협상을 벌였다. 서로에게 전쟁보다는 평화가 이롭다는 점을 꾸준히 설득시켰다. 마침내 페란테는 나폴리 왕국과 피렌체 공화국의 평화협정을 선택했다. 교황 식스투스 4세도 군대를 가진 페란테의 결정에 더 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피렌체에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서른 살의 젊은 지도자 로렌초의 목숨을 담보로 한 건곤일척의 승부수 덕분이었다.
로렌초는 23년간 피렌체를 통치했다. 그는 자신의 통치기간에 메디치 가문과 피렌체 공화국의 최고 전성기를 일궜다. 뛰어난 외교 수완과 풍부한 인문학적 교양, 그리고 관대함이라는 메디치 가문 고유의 덕성을 지닌 그를 가리켜 피렌체 사람들은 ‘일 마그니피코(Il Magnifico: ‘위대한 자’라는 뜻)’라고 불렀다.
로렌초는 메디치 가문 고유의 전통인 학문·예술 후원활동에서도 큰 발자취를 남겼다. 학자와 작가들에게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수많은 서책과 문서를 수집해 메디치 도서관의 장서(藏書)를 늘려나갔다. 피사대학과 피렌체대학에도 매년 거액의 기부를 했다. 당대의 지식인 대다수가 로렌초의 후원을 받았다.
미켈란젤로 등 르네상스 예술가 키워내
특히 로렌초의 지지와 후원 덕분에 많은 예술가들이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으로 성장했다. 그 중에서도 젊은 시절의 미켈란젤로는 로렌초의 특별한 배려를 받아 메디치 궁(宮)에 4년간 머무르면서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마음껏 발산할 수 있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보티첼리,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 등도 로렌초의 후원을 받은 유명 예술가들이다. 로렌초의 문예 후원활동은 15세기 피렌체가 이탈리아 르네상스 운동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로렌초의 집권기에 최고 전성기를 구가한 메디치 가문은 이후 여러 차례 부침(浮沈)을 거듭한다. 그러면서도 16세기에 2명의 교황을 배출하기도 했다. 첫 번째는 교황 레오 10세, 두 번째는 교황 클레멘스 7세다. 교황 레오 10세는 ‘위대한 자’ 로렌초의 둘째 아들이다. 또한 메디치 가문은 혼인을 통해 프랑스 왕실과도 인척관계를 맺었다. 메디치 가문의 딸인 카테리나 데 메디치와 마리 데 메디치는 각각 프랑스 국왕 앙리 2세와 앙리 4세의 왕비가 됐다. 메디치 가문의 영향력은 때때로 굴곡을 겪었지만 18세기까지 이어졌다.
피렌체에서 상업으로 일어선 메디치 가문은 약 350년에 걸쳐 이탈리아를 넘어 유럽 전체에 거대한 발자취를 남긴 위대한 가문이다. 르네상스 운동의 기폭제가 된 메디치 가문의 아낌없는 문예 후원활동은 세계사적으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김상근 연세대 신과대학 교수의 말이다. “메디치 가문의 가장 탁월한 점은 시대의 흐름을 정확히 읽었다는 점이다. 새로운 문화운동인 르네상스를 이끌어간 주역이자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사회지도층의 도덕적 의무)’에 관한 한 최고의 모델이다. 한국의 재벌이나 부자들도 메디치 가문에게서 본받을 대목이 많다.”
※참고서적 : <350년 동안 세상을 지배한 메디치 이야기 - 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
<부·패션·권력의 제국 - 메디치 가 이야기>
※도움말 : 김상근 연세대 신과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