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첫사랑의 향기를 만들고 싶습니다.”   지난 가을의 일이다. 중년 남성 A씨는 향수 공방을 찾아 옛 첫사랑에게서 났던 그 향을 다시 찾고 싶다고 했다.

“다시 만날 수 없잖아요. 첫사랑을 못 잊어서 그 추억을 향기로라도 곱씹고 싶은 거죠. 향을 수십 번 조합한 끝에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셨어요. 은은한 사과향이 나는 그런 향수였어요.”

정미순 지엔 퍼퓸 플레이버 스쿨 대표는 “향(香)은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한다”며 “향으로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읽고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정 대표의 말을 들어보니, A씨가 첫사랑에게서 났던 향을 만들기 위해 이곳을 찾은 건 예정된 수순이 아니었을까.

정 대표는 지난 10여 년 동안 조향사(調香師)의 길을 걸어왔다. 조향사라는 직업이 잘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미개척 시장을 일구워왔다. 정 대표는 “조향사라는 직업이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옛날부터 있었다”며 “화장품의 탄생과 그 역사를 같이 한다. 주로 화장품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회사 측이 조향법을 기밀처럼 다루다 보니 언론에 노출되지 않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 대표의 말로 추측해보자면 조향사는 화장품이 본격적으로 제조된 1960년대부터 있어 온 직업이다. 국내에는 향수가 대중화되기 시작한 2000년대 중반부터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잘 알려지지 않은 직업을 어떻게 꿈꾸게 됐을까.

“중학생 때 미국 화장품·향수 제조업체 ‘에스티 로더’의 창립자 에스티 로더의 자서전을 읽고 화장품 회사를 가거나 조향사를 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그 꿈이 계속 이어져서 전공도 화학과를 선택했죠.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재밌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앞으로 더 비전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화학과를 졸업한 정 대표는 조향사와는 관계없는 프랑스 합작회사에서 3년간 일하다가 잠시 접어두었던 꿈을 다시 떠올렸다. 정 대표는 “출장차 프랑스를 오가다 수만 가지 향수를 접했고 프랑스의 향 문화에 빠져들게 됐다”며 “향에 대한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무작정 일본으로 떠났다”고 말했다.

일본 유학은 정 대표가 국내 최초로 조향 전문 교육 기관을 설립하는 계기가 됐다. 2000년대 초반 당시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일찍 향에 대한 연구를 시작해 조향 학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정 대표는 타국에서 조향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하면서 ‘국내에도 체계적인 조향 교육 프로그램이 도입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국에 돌아온 정 대표는 한동안 화장품·미용업계에서 일하다가 프랑스 향수 브랜드 갈리마드(Galimard)사(社)와 라이센싱 계약을 맺으면서 향수 스튜디오를 오픈하고 조향 교육·맞춤 향수 사업을 시작했다.

조향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향을 기억하는 것이다. 많은 향을 맡아보고 기억하는 ‘후각 훈련’이 진행된다. 코와 뇌로 향을 기억하고 나면 향과 향을 섞는 ‘조향 작업’이 이뤄진다.

정 대표는 “후각은 인간의 감각들 중 가장 쉽게 피로해지는 감각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다양한 향을 맡아보고 기억하는 것은 어려운 작업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반복해도 힘들지 않게끔 숙달시키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좋은 향과 안 좋은 향을 두루 맡아보는 것도 중요하다. 향수를 만드는 재료는 좋은 향료만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직업에는 저마다의 직업병이 있는데 조향사의 직업병은 무엇인지 궁금했다. “예상하시다시피 길을 가다가 어떤 사람에게 좋은 향이 나면 쫓아가서 무슨 향수 쓰냐고 묻는 일이 부지기수예요. 또 꼽아본다면 일하는 데 후각이 중요하다 보니 컨디션을 항상 좋게 유지하는 정도랄까요. 운이 좋은 건지, 향을 다루다 보니까 감기에 안 걸리는 체질이 된 건지 모르겠는데 지금까지 일하면서 감기에 걸린 적이 없어요.(웃음)”

특별히 건강관리를 하지 않는데도 감기에 안 걸린다는 것은 ‘우연’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 대표가 타고난 조향사인 것은 아닐까. 정 대표는 “피곤하면 모든 감각이 다운돼 기능이 떨어지기 때문에 잘 자는 편이고 요가와 명상을 한다”며 “조향할 때 심리 상태가 많이 반영되는데, 심리적으로 안정됐을 때 좀 더 평온하고 안정감 있는 향이 만들어진다”고 설명했다.

정 대표는 후각만큼 조향사에게 필요한 감각은 ‘창의성’이라고 전했다. 조향은 기존의 향과 향을 섞는 작업이지만 이전에 없던 향을 새로이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코로 향을 구별해내는 것은 생리적인 감각이지만 코로 맡은 감각의 신호, 감각의 정보를 분석하고 그걸 다시 디자인·재창조하는 것은 머리가 하는 작업입니다. 조향 감각을 키우기 위해서는 책이나 그림 등 시각적인 것에 눈길을 자주 보내면 좋습니다. 또 글 쓰는 것, 표현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데 언어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조향을 하는 데 유리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향을 표현하는 수단이 바로 글이기 때문입니다.”

- 정미순 대표는 차분해지는 계절인 가을에 잘 어울리는 향으로 오렌지 꽃향(Orange flower)을 추천했다. 그는 “오렌지 꽃향은 너무 달콤하지 않으면서도 고전적이고 세련된 향”이라고 말했다.
- 정미순 대표는 차분해지는 계절인 가을에 잘 어울리는 향으로 오렌지 꽃향(Orange flower)을 추천했다. 그는 “오렌지 꽃향은 너무 달콤하지 않으면서도 고전적이고 세련된 향”이라고 말했다.

“향수 스토리에 담긴 단어 하나하나의 뉘앙스가 향에 나타나”
정 대표는 향수가 점차 대중화되면서 향수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도 변화되는 현상을 목도했다. “제가 처음 조향 공부를 시작했을 때는 향수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었어요. 사람들이 먹고 살기 바빴기 때문에 향을 생각할 수 없었죠. 최근에는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니 사람들이 여유를 찾고 행복을 추구하게 된 겁니다. 향수가 주는 위안과 위로는 무의식적으로 사람을 끌리게 하거든요.”

2002년 처음 향수 스튜디오를 열었을 때 맞춤 향수를 주문하러 오는 사람은 한 달에 10명이 채 안 됐다. 요즘에는 한 달에 평균 50명가량이 이곳을 찾는다. 대학생 커플, 직장인 커플, 엄마와 딸, 향수로 첫사랑과의 추억을 떠올리려는 중년 남성까지.

50㎖ 맞춤 향수 제작 비용은 5만원. 커플 할인은 없냐는 기자의 질문에 정 대표는 사업가다운 순발력을 보였다.
“커플 할인? 좋은데요. 2명 제작하는 데 5만원으로 가죠!”

조향사는 향수를 만들 때 향수에 스토리를 입힌다. 조향 작업은 스토리에 담긴 단어 하나하나의 뉘앙스까지도 향에 표현해야 하는 지난(至難)한 과정이다. 이젠 향수를 뿌릴 때 조향사가 표현하고자 했던 메시지를 떠올려보는 건 어떨까. 그 향수 역시 좋은 향을 만들어내기 위해 수십 번의 조향 작업을 거친 결과물일 것이다.  

 

▒ 정미순 대표는…
1965년생. 87년 연세대학교 화학과 졸업. 91~93년 일본 미야 프래그런스 스쿨 조향과정 수료. 2004년 대구한의대 보건학 석사과정 수료. 2010년 서울대 바이오엔지니어링 박사과정 수료. ~현재 상명대 생명정보과·강원대 바이오자원환경학과 향료학 강의. 아로마하우스·지엔 퍼퓸 플레이버 스쿨(조향교육기관)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