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미조선>(옛 이코노미플러스) 창간호의 마감이 끝난 때는 2004년 10월22일이나 23일 새벽 5시쯤이었다. 사실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밤을 새고 아침을 맞이한 때였다. 10여일 동안 마감은 새벽까지 이어졌고, 마지막 3일은 밤을 새야 했을 정도로 강행군이었다. 편집장을 비롯한 취재팀은 모두 피로에 지쳐 시체처럼 너부러져 있었다. 그로부터 2~3일 후 창간호가 발간됐다. 9월초 편집팀이 꾸려진 이후 한 달 반 만이었다.
창간 당시 제호(題號)였던 ‘이코노미플러스’에는 IMF 외환위기로부터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 경제의 모든 분야에 ‘플러스’인 잡지가 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었다. 2004년 우리나라는 ‘IMF사태’를 다시 맞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확산되면서 경제적으로 우울한 시기였다.
또 종합 일간지의 경제 섹션, 주간 경제지, 국책·민간경제연구소 등을 통해 경제정보가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이코노미플러스> 창간에 대한 내·외부의 우려는 상당히 컸다. 그러나 경제정보의 단순한 전달보다는 깊이 있는 경제 트렌드의 분석, 그럴듯한 포장보다는 가계·기업·정부에 필요한 차별화된 콘텐츠로 무장하면 승산이 있다는 게 내부의 판단이었다.
이러한 판단은 맞아 떨어졌다. 창간호는 발간 후 3쇄 인쇄에 들어갈 정도로 절찬리에 판매됐다. 사실 그렇게 인기가 있을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다른 경제지에서 볼 수 없었던 콘텐츠가 인기 요인이었던 것만은 분명했다. 10년 동안 이 잡지를 만들어 온 기자의 기억에 가장 뚜렷이 남아 있는 것도 창간호다.

10년 전과 너무나 닮은 2014년
창간호의 커버스토리는 각계 전문가 220명이 미리 예측한 10년 후의 한국 모습을 그린 ‘2014 신 대동여지도’였다. 1861년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던 것처럼 10년 후 한국의 모습을 과학적이며 실증적으로 보여주자는 취지에서였다.
2004년에 본 10년 후 모습은 어땠을까. 전문가들은 2014년 한국 사회 변화를 결정할 핵심 키워드로 경제와 사회 통합을 꼽았다. 이는 현재 한국 사회에 논란이 되고 있는 현안과 너무나도 똑같다. 경제는 장기 저성장의 늪에서 헤매면서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고, 세월호 사태 등으로 인해 우리 사회는 통합은커녕 사분오열(四分五裂)됐다.
10년 후 유망산업도 얼추 맞췄다. 2014년 한국 경제의 주력산업으로는 정보기술(IT)산업이 가장 먼저 꼽혔고, 생명공학, 전통적인 제조업이 그 뒤를 이었다. 문화산업에 대한 기대도 컸다. 반도체와 스마트폰, K-팝 열풍 등을 정확히 짚어낸 것이다.
반면 완전히 빗나간 예상도 있었다. 수소자동차의 상용화라든가 가전제품마다 연료전지가 따로 장착돼 전력선이 필요 없을 것이라는 예상은 너무 앞섰다. 또 원격진료의 일상화, 무인궤도열차(PRT)의 도입 전망 등도 빗나갔다.
창간호에는 ‘경제가 살아나지 않고 있다’, ‘침체의 길로 가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이 확산되고 있다’ 등 당시 불안한 경제 상황에 대한 표현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이순신 장군 열풍이 분 것도 비슷하다. 2004년 이순신 장군 열풍이 전국을 강타했다. 2004년 9월부터 방영된 TV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이 단초가 됐다. <이코노미플러스> 12월호에는 이순신을 경영학에 접목시킨 지용희 서강대 경영대 교수의 인터뷰가 실렸다. 10년 전 과거가 경제 침체와 영화 <명량>으로 이순신의 열기가 뜨거운 현재와 너무 닮아 있다.
기자에게 하루는 너무 짧다. 특히 월간지 기자에겐 한 달이 너무 짧다. 11월에는 12월을 생각해야 하고, 12월에는 다음 해 1월을 생각해야 한다. 2004년 12월호가 나왔고, 다음 해 1월호 취재에 나서지만 그때는 아직도 2004년이다. 한 달을 먼저 살기 때문에 1년을 앞서가는 느낌이다.
생활패턴도 수월하지 않다. 마감이 끝나면 다음 호 기획회의를 준비해야 하는데, 일간지나 주간지에서 다루지 않는 기사거리를 찾는 게 쉽지 않다. 또 여러 주제를 동시 다발로 취재하고, 마감을 위해 일주일 이상 야근과 주말 근무를 해야 하는 것도 상당히 부담스럽다. 월간지 기자가 더 편할 것 같아서 이직한 기자들은 이런 생활을 당해내지 못한다. 2004년 말 한 통신사에서 자리를 옮긴 기자는 일주일을 버텨내지 못했다. 그 기자가 해야 할 일이 전부 필자에게 쏟아졌다.

중소기업·농업에 지속적인 관심
2005년 들어서면서 한국 경제에 봄바람이 불기 시작했다는 조심스런 전망이 나오기 시작했다. 2005년 3월호에 실린 ‘한국 경제에 부는 춘풍, 돛을 높이 올려라’라는 기사는 그동안 잔뜩 찌푸렸던 주요 경제지표에 파란불이 켜지면서 경제 주체들의 기대감도 되살아나고 있다고 썼다. 이후 한국 경제뿐 아니라 세계 경제는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까지 순조롭게 항해(航海)했다.
2005년 주목받았던 사건은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귀국이었다. 김 전 회장은 2005년 6월14일 귀국 행로에서 “모든 책임을 지겠다”며 사죄했다. 최근 “억울하다”는 주장과는 상반된 입장이다. 당시 그의 핵심측근들은 “대우 해체는 이미 ‘대우 죽이기’로 방침을 정한 정부의 정해진 수순에 따른 것 이었다”고 항변했다.
<이코노미플러스>는 창간 때부터 지금까지 ‘중소기업’과 ‘농업 현장’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왔다. 사실 중앙지에서 중소기업과 농업 등에 대한 기사를 꾸준히 싣는 경우는 흔치 않다. 하지만 본지는 매월 중소기업과 농업 현장의 성공사례를 발굴해 생생하게 전달하는 데 앞장섰다.
중소기업 분야에서는 2005년 국내 언론사로는 처음으로 ‘업종별 중소제조업 베스트 10’을 기획했으며, 100대 벤처기업을 선정하기도 했다. 성공한 중소기업 CEO의 드라마틱한 감동 스토리도 매달 소개했다.
특히 농업 분야에서는 민승규 삼성경제연구소 부사장의 도움이 컸다. 2005년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원이던 민승규 부사장의 아이디어로 시작된 ‘벤처농업인 성공 스토리’는 지금의 강소농(强小農)으로까지 이어졌다. 최근 몇 년간은 귀농·귀촌 바람이 거세지면서 일반 독자들의 관심이 컸던 기획으로 기억된다.
독자들에게 인기 있는 기사는 ‘사람+돈’으로 이뤄진 성공스토리였다. 독자들은 누가 돈을 벌었는가보다는 어떻게 돈을 벌었는가에 주목했다. 맨손으로 기업을 일궈 슈퍼리치의 반열에 오른 자수성가형 기업인, 수십억원에서 수백억원의 돈을 굴리는 슈퍼 개미(큰손 개인투자자), 치열한 영업현장에서 억대 연봉을 받는 대한민국의 판매왕 등이 그동안 다뤄졌다. 2006년 10월호에 실린 “상품을 팔지 말고 마음을 사라”는 대한민국 판매왕들의 불황기 세일즈 비법은 지금도 유효할 듯 하다.
2006년은 ‘창조경영’이 경제계의 주된 화두였다. 연초 이건희 삼성 회장과 구본무 LG 회장이 이를 주창(主唱)하면서부터다. 기업들은 창조경영을 위해 외부 인재 영입에 경쟁적으로 나섰다. 하지만 <이코노미플러스>는 설문 조사를 통해 창의력은 자기 업무에 열정적이면서 개성이 강한 내부 직원들이 더 많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결국 고급인재보다는 내부 직원들의 개성을 어떻게 살려내느냐가 창조경영의 성패를 좌우한다는 얘기였다. 당시 전문가들은 창조경영 다음엔 도덕경영 시대가 온다고 전망했다.
위기 때는 도전의지 심어주는 데 주력
2007년 들어서면서 한국 증시는 부흥기를 예고했다. 2006년 경기 하강국면에서도 종합주가지수는 상승했고, 증시 정체에도 자금 이탈은 없었다는 것이 그 시그널로 해석됐다. 이 예고대로 2007년 한국 증시는 2000선을 돌파하는 등 매일매일 기록을 경신했다.
2007년 한국 경제는 순항했지만 대졸 취업난은 극심했다. 특히 취업 희망자들이 대기업으로 몰리면서 중소기업은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에 <이코노미플러스>에서는 알짜 중소기업과 대졸 취업 희망자를 연결해 주는 현장 탐방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당시 이 프로그램을 담당했던 기자는 탐방이 예정돼 있던 대학생에게 두 번이나 바람을 맞았다. 연봉이나 복지 측면에서 대기업에 전혀 뒤떨어지지 않았지만, 대졸 취업 희망자에게 중소기업은 관심 밖이었다는 것을 고스란히 느낀 순간이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가 타결된 것은 2007년이었다. 2006년 6월 한미 양국의 FTA 협상이 시작되자 미국에 시장을 내주면 한국의 농업과 서비스업은 다 망할 것이라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FTA 반대 시위는 협상이 타결된 2007년에도 이어졌고, 2008년엔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둘러싼 촛불 시위로 번졌다. <이코노미플러스>는 2006년부터 한·미 FTA에 대한 심층 분석 기사를 쏟아내면서 한국 경제의 패러다임 변화를 예의주시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다른 곳에서 불거지고 있었다. 미국의 비우량 주택담보대출(서브프라임모기지) 시장이 갈수록 불안해지고 있다는 기사가 본지 2007년 5월호부터 실리기 시작했다. 당시 최우석 조선일보 특파원은 ‘모기지발 위기, 세계 금융대란의 뇌관’이라는 기사로 이러한 위기 상황을 전했다. 이후 서브프라임모기지 대란은 일파만파 퍼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2008년 9월15일 세계 금융의 심장부인 미국 월가(街)에서 파열음이 불거졌다. 미국 4위 투자은행인 리먼브라더스가 파산했고, 메릴린치는 뱅크오브아메리카에 인수됐다. 미국의 서브프라임 사태로 촉발된 금융위기는 세계 경제를 혼란에 빠뜨렸다.
2009년 1월호에 실린 설문 조사 결과에서 100명의 국내 경제·경영학자들은 “위기가 본격화되고 있다. 대규모 경기부양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후 <이코노미플러스>는 위기에서 헤쳐 나올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는 데 주력했다. 차세대 성장동력 발굴과 신시장 개척, 역발상을 통해 위기를 기회로 만든 성공 스토리가 주된 내용이었다. 글로벌 금융위기에 움츠리지 말고 적극적으로 도전해야 한다는 불굴의 의지를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재테크 면에서는 안전하게 자산을 불리는 방법 등을 전하는 데 주력했다.
불황 속에서 부자가 될 수 있는 공식이 있을까. 2009년 5월호에는 ‘재테크 비법을 얻어 큰 거 한 방 터뜨린다’는 허황된 꿈을 버리고 ‘아끼고, 모으고, 굴려서’ 적당한 수준의 부자가 되라고 조언했다.
불황이 급격한 증가의 요인이 된 경우도 있다. 바로 막걸리였다. 불경기로 호주머니 사정이 나빠지면서 상대적으로 저렴한 막걸리를 찾는 이들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일본인들의 ‘열렬한 지지’도 막걸리 판매 급증의 요인으로 분석됐다. 당시엔 막걸리에 소주와 사이다를 섞은 ‘막소사’의 돌풍이 대단했다.
2009년에서 2010년으로 넘어오면서 ‘모바일 혁명’이 본격적으로 불기 시작했다. 애플과 삼성전자가 스마트폰 진검 승부를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이후 양사는 스마트폰 시장을 두고 한 치의 물러섬이 없는 치열한 경쟁을 펼쳤다. 스마트폰 전쟁이 치열해지면서 한국 스마트폰 부품기업들이 대약진했다. 애플이든 삼성전자든 핵심부품의 상당 부분은 한국 중소기업들의 제품이었다. 특히 스마트폰에서 시작된 스마트 혁명의 여파는 스마트 기술 빅뱅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열었다.
메가트렌드·핫이슈 집중 발굴 분석
2011년 3월 신설된 ‘강석진 회장의 CEO to CEO’ 대담 코너는 재계 오너와 유명 최고경영자(CEO)를 인터뷰해 많은 인기를 끌었다. 이희범 STX에너지·중공업 회장을 비롯해 윤석금 웅진그룹 회장,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 윤종용 전 삼성전자 부회장, 구자홍 LS그룹 회장, 이승한 홈플러스 회장, 강덕수 STX그룹 회장, 이석채 KT 회장, 이수영 OCI 회장, 박영주 이건그룹 회장, 고 이운현 세아그룹 회장, 김종훈 한미글로벌 회장, 허진규 일진그룹 회장 등의 인생 역정과 경영 철학이 상세히 소개됐다.
<이코노미플러스>에서 지금의 제호인 <이코노미조선>으로 바뀐 것은 지난 2012년 11월호부터다. 조선미디어그룹의 일원이자 한국을 대표하는 경제매거진으로서 이미지를 확고히 다지기 위해서였다.
이후 <이코노미조선>은 세계 시장을 주름잡는 ‘가족기업의 진화’, 고령사회의 충격을 다룬 ‘에이지퀘이크’, 1인이 창출하는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인 ‘솔로 이코노미’, 녹색성장을 뛰어넘는 ‘청색기술·청색경제’, ‘진화하는 해외직구’, ‘LG반도체 부활 승부수’, ‘삼성 UHD TV 세계를 휘어잡다’, ‘혁신도시 부동산 판 바꾼다’ 등 국내외 경제의 메가트렌드와 핫 이슈를 집중 발굴해 분석했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면서 돌고 돈다. 경제도 마찬가지다. 지난 10년 동안 한국 경제를 이끈 키워드는 창조, 혁신이었다. 기업들이 21세기에 살아남을 또 다른 먹거리를 고민할 때, 주변을 조금만 자세히 둘러봐도 새로운 변화의 징후들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불과 10년 동안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10년 안에 또 한 번의 빅뱅이 닥칠지 모른다. 앞으로 10년이 문제다. 한국 경제는 갈 곳을 찾지 못해 헤매고 있고, 새로운 성장동력이 필요한 것은 10년 전과 마찬가지다. 기업이든, 개인이든, 국가든 앞으로 일어날 변화를 어떻게 읽고 대응할지는 각자의 몫이다. <이코노미조선>이 미래 10년을 위해 새로운 어젠다(agenda)를 준비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