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가이세키(會席) 요리는 조리사의 정성과 먹는 이의 맛에 대한 감동 등 무엇 하나 버릴 게 없는 일본 요리 문화의 최고봉이다. 서울시 강남구 신사동에 위치한 일식집 ‘하카타 셉템버’는 일본 전통의 가이세키 요리에 한국적 스타일을 가미시켜, 색다른 맛을 표현해내는 곳이다. 하카타 셉템버는 계절감을 중시하는 가이세키 요리를 기본으로 삼고 있어 메뉴가 매달 바뀐다. 지난 10월2일 방문했을 때 요리 테마는 ‘국화’였다.
이제 본격적인 코스 요리의 시작이다. 핫슨이란 ‘여덟 마디’(八寸)라는 뜻으로, 한 마디가 약 3cm, 즉 길이 24cm의 접시에 여러 가지 요리를 보기 좋게 담아내는 가이세키 요리의 한 종류다. 이날 핫슨으로는 △살짝 구운 규 야마토니(牛大和煮·소 채끝 등심) △하몽(스페인 전통 발효 햄)으로 싼 크림치즈를 무화과와 함께 먹는 것 외에 △그린 빈(Green Bean) 참깨 무침 △토란 튀김 △살짝 익힌 고등어 초밥 △속을 파낸 라임에 제주산 영귤(초귤), 연어 알을 버무린 무침 등 6가지 요리가 올라왔다. 다소 느끼할 수 있는 치즈를 하몽에 싸 먹으니 균형이 잡힌다. 여기에 단맛의 무화과는 맛의 풍미를 더해주는 연출자다. 연어 알은 톡톡 깨지면서 안에 나오는 액즙이 약간 비리고 짠맛이 나는데 이를 제주산 영귤의 신맛과 향긋함이 가려준다. 녹색 빛의 라임에 담겨져 나오면서 시각적인 느낌도 좋다.
하카타 셉템버 셰프가 다음에 내놓은 음식은 스이모노(吸物)라는 국물 요리다. 돼지 목살에 무와 우엉 등 야채를 채 썰어 국물을 냈다. 일반적으로 일본 요리는 다시마와 가쓰오부시(節·가다랑어 포)를 넣고 약한 불에 은근히 끓인 것을 국물로 사용한다. 그래서 맑고 개운하다. 다만 돼지고기 목살의 비린내를 없애는 데는 맑은 국물이 한계가 있었다.
일본 요리의 주인공은 뭐니뭐니 해도 생선회다. 계절에 따라 가장 맛이 좋은 횟감을 사용해 생선회를 내는데, 이날 나온 요리는 방어, 고등어초절임, 참치, 대왕오징어, 단새우다. 고등어초절임 위에는 제주산 양하(荷)가 올려져 있다. 양하는 강한 향기를 지니고 있다. 매력적인 쌉쌀한 뒷맛이 상당히 독특하다. 특히 고등어의 비린내를 잘 잡아준다.
입속 잡냄새를 없애기 위해 다음에 나온 요리는 야키모노(燒物)다. 구이 요리로 불리는 야키모노는 밤과 팥을 넣어 지은 밥을 바닷장어로 불리는 아나고(穴子) 구이로 싸서 올렸다. 아나고는 민물장어에 비해 기름이 적어, 담백하다. 팥과 밤으로 한 밥의 ‘찰짐’과 바닷장어의 ‘부드러움’이 괜찮은 조합이다. 먹는 이에게 마치 스시(壽司)를 먹는 느낌을 주기 위해 만든 듯했다. 그러나 이 점은 다소 아쉬운 대목이다. 일본 스시에서 밥은 너무 강하게 뭉쳐서는 안 된다. 잘 만든 스시일수록 밥알이 적당히 뭉쳐져 생선회와 조화를 이뤄야 한다. 딱딱하게 밥을 뭉치면 밥알과 밥알 사이 공기층이 적어 생선회의 제 맛이 그만큼 반감된다. 그런데 하카타 셉템버는 팥과 밤을 사용해 찰지게는 만들었지만 점성이 지나치게 강해, 스시 특유의 부드러움을 느끼지는 못했다. 다음 아게모노(揚物) 음식은 크림소스에 5가지 버섯을 넣고 그 위에 튀김옷을 입혀 만든 고로케다. 바삭한 고로케를 자르니, 크림버섯스파게티 소스가 흘러나왔다.
무쇠 솥에 한 눈볼대 밥에서 진한 감동
이제 남은 음식은 정찬의 정점을 알리는 고한(御飯), 즉 식사다. 무쇠 솥에 기름에 볶은 밥, 대파, 눈볼대(赤)가 함께 나왔는데, 흰 살 생선답게 눈볼대 맛이 담백하다. 밥맛도 고소하다. 추억의 음식인 마가린 밥맛과 비슷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밥에 마가린 한 수저를 푹 퍼, 비벼먹는 마가린 밥은 칼로리 걱정하는 요즘 세태로 볼 때는 상상하기 어려운 음식이다. 느끼할 수 있는 밥맛을 잘게 썬 대파가 잘 받쳐준다. 이제 모든 식사는 끝났다. 마무리로 나온 디저트는 찹쌀떡과 단팥을 올린 호박 무스였다.
하카타 셉템버는 잘나가는 IT(정보기술)기업 최고경영자(CEO) 자리를 박차고, 뒤늦게 요리사의 길에 뛰어든 서영민 대표의 오랜 꿈이다. 그는 일본요리전문학교인 나카무라(中村) 아카데미 한국분교에서 1년간 공부한 뒤, 일본 후쿠오카(福岡)에서 요리사로 일했다. 가게 이름인 하카타(博多)는 나카무라 아카데미 소재지이자, 그가 일한 후쿠오카 일부 지역의 옛 이름이다. 셉템버(September)는 서 대표의 생일이 속한 달(月)이자, 그가 요리사라는 부푼 꿈을 품고 일본에 도착한 때다. 정성스러운 음식을 만들겠다는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 서 대표는 음식의 맛과 함께 문화를 중시한다. 하카타 셉템버의 요리는 그래서인지 단순한 요리가 아니라, 일본 문화와 가을 정취를 입 안에 담는 느낌을 주고 있다.
스타 셰프가 추천하는 이 집
만든 이의 정성 담긴 일본요리 진수
지난 추석 연휴 동안 일본에서 휴가를 보냈다. 이시카와(石川)현의 한 온천 료칸(旅館)에서 시간을 보냈는데, 료칸 주인장이 내온 가이세키 요리를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가이세키 요리를 한 단어로 표현하면 ‘정성’이다. 만든 이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게 가이세키 요리다. 하카타 셉템버도 정성이 듬뿍 담긴 요리를 지향하는 것 같다. 스타일로 보면 일본 정통보다는 한국식이 다소 가미됐다. 음식마다 간결함이 묻어 있다. 잘 조리된 일식을 말할 때 식재료 본연의 맛을 잘 살렸다고 하는데, 하카타 셉템버가 그렇다. 매월 메뉴가 바뀌기 때문에 스토리텔링(Storytelling) 요소도 있다. 저녁식사값(인당 9만원)도 강남지역의 다른 정통 일식집에 비해 저렴하다.
오정미 푸드스타일리스트는… 서울대 미대 조소과 출신으로, 미국 유명 프렌치(FCI), 이탈리안요리학교(ICIF)를 졸업한 국내 1호 푸드스타일리스트다. 미국 뉴욕의 유명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스타 셰프로 활약한 그녀는 지난 2001년 국내 푸드스타일리스트 등용문(登龍門)인 ‘오정미푸드아트인스티튜드’를 열었다. 지금은 남편 요나구니 스스무(與那國進)와 함께 광화문과 여의도에서 이탈리안, 프렌치 레스토랑 ‘오키친’을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