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기원전 387년 아테네 근교에 ‘아카데메이아’라는 학교를 세워 제자들을 가르치고 학문을 연구했다. 그리스 최초의 학교 아카데메이아는 기원후 529년까지 존속됐다. 그로부터 900여 년이 지난 1462년, 학문과 예술의 후원자로서 르네상스 시대의 초석을 놓은 주역인 메디치(Medici) 가문이 이탈리아 피렌체 인근에 ‘플라톤 아카데미’를 개설했다. 이곳은 인문학자와 예술가가 모여들면서 학문과 예술의 전당이 됐다. 나아가 르네상스의 거점으로서 유럽의 근대적 사상 발전에 크나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중세의 끝자락에 문을 열었던 플라톤 아카데미가 21세기 한국에서 부활했다. 그 지향점은 인문학 심화와 확산이다. 2010년부터 재단법인 ‘플라톤 아카데미’를 이끌고 있는 김상근 연구책임교수를 만났다.
- 김상근 교수가 플라톤 아카데미 사무국 응접실에서 포즈를 잡았다. 그는 “인문학과 기업이 찰떡궁합을 이룰 수 있다”고 강조했다.
- 김상근 교수가 플라톤 아카데미 사무국 응접실에서 포즈를 잡았다. 그는 “인문학과 기업이 찰떡궁합을 이룰 수 있다”고 강조했다.

2010년 1월 말이었다. 김상근 연세대 신과대학 교수는 동료 교수들과 회의를 하던 중에 한 통의 국제전화를 받았다. 평소 자신이 주관하는 한 학습모임에 ‘학생’으로 참가하고 있던 기업가 A씨였다. “여기는 스위스 다보스입니다. 지금 창 밖에 눈이 펑펑 내리고 있네요. 교수님, 잠시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뜻밖의 전화였다. 물론 반갑기도 했다. ‘무슨 용건이기에 스위스에서 국제전화까지 걸었을까?’ 김 교수는 궁금했다. 두 사람은 대화를 이어갔다. A씨는 자초지종을 말하기 시작했다.

“얼마 전 함께 갔던 피렌체 학습여행에서 배우고 느낀 점이 많았습니다. 메디치 가문의 발자취와 성 프란치스코(San Francesco d’Assisi: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며 청빈한 삶을 산 이탈리아의 수호성인)의 무덤 앞에서 많은 생각을 했어요. 모든 것을 갖추고 태어난 내가 의미 없는 삶을 산다는 것은 매우 부끄럽고 세상에 죄를 짓는 일인 것 같습니다. 무엇인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A씨의 말에 감동을 받은 김 교수는 “우리 사회에 모범적인 가치를 보여주는 일을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라고 반문했고, A씨는 “재단을 하나 만들면 어떻겠습니까. 제가 열심히 돈을 벌어 기부할 테니 교수님이 아름답게 써주시면 좋겠습니다”라고 화답했다. 재단법인 플라톤 아카데미의 씨앗이 뿌려진 순간이었다.

김상근 교수의 말이다. “제가 A씨한테 일회성으로 하는 일이라면 관여하지 않겠다고 했어요. 인문학에 대한 아낌없는 지원과 관대한 후원을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분은 흔쾌히 동의했죠. 사실 옛날에 전례가 있었습니다. 바로 메디치 가문입니다. 그 좋은 모델을 따라 진정으로 아낌없이 인문학을 후원하고, 그걸 통해 한국에 르네상스가 열릴 수 있다면 정말 감사한 일이죠. 그 대신 저는 재단에서 자원봉사를 합니다. 흔히 재단에는 항상 돈 때문에 문제가 생기거든요. 그래서 저는 재단을 아주 투명하게 운영합니다. 그러다 보니 신뢰가 쌓여 기부자들도 파격적인 지원을 하죠.”

김상근 교수는 ‘연구책임교수’라는 직함으로 사실상 플라톤 아카데미의 최고경영자 역할을 한다. 재단 설립 및 운영을 위한 자금을 기부한 기업가 A씨는 전면에 나서지 않고 묵묵히 후원자 역할만 하고 있다. 자신의 이름이 알려지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는 게 김 교수의 귀띔이다.

예수는 제자들과 군중들 앞에서 행한 산상설교(山上說敎)에서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도록 하라”고 했다. 칭찬을 받거나 평판을 얻기 위해 선행을 하는 것은 진정성이 없다는 가르침이다. A씨의 사례는 이 대목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한다.

2010년 11월 출범한 플라톤 아카데미는 국내 최초의 순수 인문학 연구지원 재단이다. “인간정신의 보편적 발전과 인격의 탁월함을 추구하는 ‘성찰의 인문학’을 심화·확산시킨다”는 것을 사명으로 삼고 있다. 그에 따라 사업 내용도 크게 인문학 심화 및 확산이라는 두 가지로 나뉜다.

국내 최초의 순수 인문학 연구지원 재단
먼저 인문학 심화 사업은 인문학자들의 심화 연구 지원, 학술대회 및 학술지 지원, 대학 학술 지원 등을 수행한다. 현재 플라톤 아카데미는 이석재 서울대 철학과 교수와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에게 아무 조건 없이 ‘깜짝 놀랄 만한’ 연구비를 지원하고 있다. 또 미국 스탠퍼드대에 한국학 석좌교수를 임용하는 비용을 매칭펀드 형식의 기금으로 제공한 바 있다.

인문학 확산 사업은 인문학적 성찰을 사회에 널리 전파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인문학 대중강연(인문학 아고라), 대학생 인문학 학술동아리 판플러스(PAN+) 지원, 10대를 위한 인문학 교실 ‘책 읽는 토요일’, 인문학 고전 오디오북 보급, 플라톤 아카데미 TV 운영, 인문학 다큐멘터리 제작 지원, 인문학 도서 보급(플라톤 아카데미 총서 발간)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으로 구성된다.

“플라톤 아카데미는 가장 근본적인 성찰을 통해 사회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무엇인가 공헌하자는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가령 ‘어떻게 사유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죽음이란 무엇인가’ 등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들어가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는 학자들의 연구 결과물을 대중에게 전파하는 ‘인문학 대중화’가 목표죠. 일반인들도 인문학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대중강연, 출판, 방송, 신문 등 다양한 채널을 열어주는 거죠. 그래야만 인문학적 지혜가 세상에 널리 퍼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저희 재단은 요컨대 ‘인문학 확산의 마중물’ 역할을 하자는 사명을 실천해나가고 있습니다.”

플라톤 아카데미가 그간 펼쳐온 사업들 중에 가장 큰 반향을 일으킨 것은 인문학 강연 프로그램인 ‘인문학 아고라(Agora: 광장)’다. 이는 교수나 학자들이 일반 시민들을 대상으로 인문학의 다양한 주제를 알기 쉽게 풀이해주는 공개 대중강연 프로그램이다. 2012년 가을 처음 닻을 올린 인문학 아고라는 연세대, 서울대, 경희대를 거쳐 현재 고려대 인촌기념관에서 진행되고 있다. 매번 10~12명의 강사진이 ‘인문학 대중화’의 전도사로 나서고 있다. 경희대에서 개최된 인문학 아고라 강연 내용은 경제전문방송 SBS CNBC를 통해 시청자들을 찾아가 화제를 낳기도 했다. 지금까지 인문학 아고라에 참여한 누적 청중 수는 대략 7만~8만명에 달한다.

“인문학 아고라는 2012년 9월 김언종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의 <시경(詩經)> 강연으로 첫 걸음을 뗐습니다.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네요. 그날 비가 억수같이 내렸거든요. ‘야, 이거 망했구나’ 하며 탄식하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연세대 강당이 청중으로 꽉 찼습니다. 너무 기뻤죠. 서울대에서 개최했을 때는 버스에서 내려 강당까지 뛰어가는 분들도 많았어요. 좋은 자리 차지하려고요.(웃음) 인문학 아고라는 매번 개최할 때마다 최소 1000명 이상이 꽉꽉 들어찹니다. 특히 중년 이상의 어른들은 캠퍼스를 걸으며 석학들의 강의를 들으러 가는 것에서 굉장한 로망을 느낍니다. 작년 4월 서울대에서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주제로 한 강연을 했을 때인데요. 50대 중후반쯤 된 아주머니가 저를 알아보시고는 손을 잡더니 ‘우리 같은 사람들이 석학들의 강연을 들을 수 있게 해줘서 너무 고맙다’고 하시는 겁니다. 그분은 온라인으로 수강 신청을 한 후 일주일 동안 가슴이 설레었다고도 하더군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강당으로 함께 걸어갔는데, 그때 마음이 참 흐뭇했습니다. 플라톤 아카데미를 이끌어가면서 큰 보람을 느낀 순간이었죠.”

- 플라톤 아카데미 사무국 입구에는 ‘Who Am I(나는 누구인가)?’라는 영어 문장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있다.
- 플라톤 아카데미 사무국 입구에는 ‘Who Am I(나는 누구인가)?’라는 영어 문장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있다.

‘인문학 아고라’, 일반인들에게 큰 호응
김상근 교수는 16세기 교회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기독교 신학자다. 미국에서 학위를 받고 3년간 워싱턴에 위치한 ‘와싱톤한인교회’ 부(副)목사를 하기도 했다. 이 교회는 배를 타고 미국으로 떠났던 한인 이민 1세대들이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함께 모여 조국의 안녕과 평화를 기도하다가 만든 교회다. 미국 동부 지역 한인교회 중 가장 역사가 깊다.

그는 마흔 살 되던 해에 연세대 교수로 임용되면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당연히 목사직도 그만뒀다. 김 교수는 대학 강단에 서면서 10년 단위의 공부 계획을 세웠다. 40대의 10년간은 르네상스를 연구한다는 목표였다. 이 목표는 이미 달성됐다. 그는 6권의 르네상스 관련 저술을 펴내기도 했다. 르네상스에 관한 권위자가 된 셈이다. 50대에 이른 지금은 고대 그리스를 공부하고 있다. 이 연구를 마치면 60대에는 고대 로마를 천착(穿鑿)할 예정이다. 나아가 70대에는 일본 여성작가 시오노 나나미(鹽野七生)의 <로마인 이야기>를 다시 쓴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워 놓았다. 시오노 나나미는 최근 일본 극우파 작가로 지탄 받고 있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는 로마사를 자기 입맛대로 해석한 엉터리 같은 대목이 너무 많아요. 제가 책을 읽다가 분노했다니까요. <로마인 이야기>가 한동안 우리나라에서 얼마나 열풍을 일으켰습니까. 저는 제국주의적 성향을 가진 시오노 나나미가 쓴 <로마인 이야기>를 반드시 타도할 작정입니다. 우리가 일본 사람의 시선으로 로마를 본다는 게 웃기잖아요. 진짜 가당치도 않은 일이죠. 반드시 제 손으로 <로마인 이야기>를 바로잡아 놓을 겁니다.”

문득 신학자이자 목사인 그가 어찌하여 인문학과 깊디 깊은 인연을 맺게 됐는지가 궁금해졌다. 세상을 구제하려 했던 예수의 복음과 인간의 본성을 연구하는 인문학은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 듯도 하다.

김상근 교수의 말이다. “서구 사회 전통의 두 가지 축이 헬레니즘(Hellenism: 고대 그리스 문화를 바탕으로 한 서양의 문화)과 헤브라이즘(Hebraism: 구약성서에 근원을 둔 서양의 사조)이지 않습니까. 헬레니즘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고대 그리스 시대에 완성한 인문학적 성찰에 뿌리를 두죠. 헬레니즘은 인간 이성의 존엄함을 중시합니다. 반면 헤브라이즘 전통에서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약하고 악한 존재라고 봅니다. 그래서 신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거죠. 초기 기독교 교회의 위대한 사상가인 성(聖) 아우구스티누스가 쓴 <고백록(告白錄)>이 바로 인간의 본성은 완벽하지 않다는 깨달음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렇게 보면 인간의 본성을 탐구한다는 점에서 인문학과 기독교는 굉장히 연관성이 크죠.”

인문학(人文學, Humanities)은 쉽게 말해 인간과 관련된 문제, 사상, 문화 등을 다루는 학문이다. 인문학은 서구에 뿌리를 두고 있다. 어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르네상스 시대 초기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들이 문예·학술 활동을 가리킨 ‘스투디아 후마니타티스(Studia Humanitatis)’에서 비롯된 말임을 알 수 있다. 이 용어는 ‘인간다움’이라는 뜻의 라틴어 ‘후마니타스(Humanitas)’에서 유래됐다.

“인문학은 스투디아 후마니타티스를 우리말로 번역한 용어죠. 원래 ‘인간다움’에 대한 학문이라는 뜻이죠. 14세기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인문주의자인 페트라르카가 만든 용어입니다. 그런데 인문학이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살펴보는 게 중요합니다. 12~13세기 유럽의 대학이 너무 현학적(衒學的)으로 빠져들었습니다. 13~14세기 무렵에는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상공인과 부자들이 나오기 시작했죠. 그런데 상공인들이 자식을 대학에 보내려고 하니까 아무 쓸모가 없는 것들을 가르치는 거예요. 그래서 대학은 안 되겠다 싶어서 학자를 집으로 불러 자녀 교육을 시킨 겁니다. 당시 역사, 도덕철학, 시, 수사학(修辭學), 문법의 5가지 과목이 인문학의 시작이었죠. 요즘 우리나라 대학에서 인문학이 고사(枯死)상태라고들 말하는데, 원래 인문학은 대학을 반대하는 흐름에서 나온 겁니다. 그러니 대학에서 인문학이 죽어가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뭘 잘 모르고 하는 소리죠. 옛날 유럽의 부자와 상공인들이 왜 인문학으로 자녀 교육을 시켰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자기 사업을 키우는 것과 자기 사업을 자식한테 물려주는 게 가장 큰 관심사였습니다. 그 수단이 바로 인문학이었습니다. 요컨대 기업과 인문학이 찰떡궁합이라는 말입니다. 요즘 인문학이 기업에서 부흥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 김상근 교수가 자신이 직접 촬영한 이탈리아 피렌체 두오모 성당의 흑백사진을 보면서 말하고 있다. 그는 향후 피렌체에 한국 대학생들을 교환학생으로 받아 글로벌 교육을 하는 대학을 설립하겠다는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 김상근 교수가 자신이 직접 촬영한 이탈리아 피렌체 두오모 성당의 흑백사진을 보면서 말하고 있다. 그는 향후 피렌체에 한국 대학생들을 교환학생으로 받아 글로벌 교육을 하는 대학을 설립하겠다는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성찰적 인문학’으로 세상의 변화를 꿈꿔
플라톤 아카데미는 ‘성찰적 인문학’을 우리 사회에 널리 전파해나가고 있다. 벌써 재단이 출범한 지도 만 4년이 됐다. 인문학을 배우고, 그 깨달음을 실천하는 사람들의 나라. 그것은 플라톤이 꿈꿨던 ‘이상국가(理想國家)’일지도 모른다. 현실에서는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탐욕과 이기주의, 물질만능주의에 사로잡힌 우리 사회가 그 뿌리 깊은 적폐(積弊)들을 조금씩 쓸어나가려면 인문학적 성찰이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플라톤 아카데미를 통해 세상에 변화를 주고자 합니다. 사람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인문학을 하자는 겁니다. 고대 로마의 정치가이자 웅변가, 저술가였던 키케로가 어떤 시인을 변론하는 글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위대한 시대에는 위대한 인물들이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후마니타스(인간다움)를 지향하는 공부를 했다. 그 공부는 나이든 사람에게는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 주고, 젊은이에게는 용기를 불러일으킨다.’ 그 공부가 바로 인문학입니다. 그런데 조심할 게 있습니다. 젊은이가 마음의 평화를 얻고, 노인이 용기를 내면 안 됩니다.(웃음)”  

 

▒ 김상근 교수는 …
1964년생. 연세대 신학과를 졸업하고 프린스턴대 신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 신과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며, 재단법인 플라톤 아카데미의 연구책임교수(본부장)로 활동 중이다. <르네상스 창조경영>, <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 <르네상스 명작 100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피렌체, 천재들의 도시>, <인문학으로 창조하라>, <마키아벨리,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현자>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