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용.수. 그의 이름 세 글자를 빼고 대한민국의 패션을 논할 수는 없다. 지난 40여년 동안 국내 패션계에 다양한 업적을 남긴 그는 이름 자체만으로도 이미 패션계의 역사다. 하용수 디자이너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 이야기들은 패션계의 역사 실록과도 같았다. ‘패션’이라는 큰 틀에 있지만 영화, 음악, 그리고 스타배우들의 매니지먼트까지 대중문화 전반을 아우르는 내용이었다.
그는 인터뷰 장소였던 커피숍 인근 광화문 일대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여기 아카데미 극장이 있었던 걸 기억하세요? 조선일보가 있던 이 자리에 아카데미 극장이 있었는데, 이곳이 바로 청춘 영화의 산실이었어요. 신성일·엄앵란씨가 나오는 영화는 거의 이곳에서 상영됐죠. 당시 트렌드세터들이 죄다 몰렸죠. 또 이 근처에 초원다방이라고 LP 자주 듣던 곳이 있었고 광화문 근처에 금란다방, 여로다방 등 유명한 곳이 많았죠.”
하용수의 입에서는 과거 화려했던 전성기 시절의 이야기들이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그의 눈빛과 기백은 여전히 청년 같았다. 60대의 나이에도 그는 아직도 핫한 트렌트세터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런 기질은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몸에 밴 것이었다. 패션을 정식으로 배운 적이 없던 그가 디자이너가 된 것 또한 그에겐 물 흘러가듯 당연한 것이었다.
영화는 내게 패션의 바이블
“난 초등학교 때부터 극장 가서 하루에 영화를 네 편씩 봤어요. 그야말로 ‘할리우드 키드’였지. 영화는 내게 패션의 바이블이었고, 그로 인해 풍부한 감성을 가지게 됐고. 덕수초등학교 다니면서 어린 시절 이미 부르주아가 무엇인지도 경험했죠. 다른 이들과는 확연히 다른 사춘기를 보냈고 그 누구보다 패션을 할 수 있는 경험이 내겐 많았습니다. 우리 땐 구제품 시장에 가서 내 스타일에 맞는 옷을 찾아 입었는데, 그때 유명한 뚱보 아줌마인 전씨 아줌마라고 있었는데 옷 보따리가 오면 우릴 불렀어요. 그러면 우리 같은 과들이 빨리 달려갔죠. 마음에 드는 좋은 옷 있으면 작아도 그걸 사서 입었어요, 하하. 옷 좋아하는 김용건씨도 그때 자주 오던 멤버예요. 구제품시장 가면 미싱만 30~40개가 돌아가는데 최고의 패턴사들이 수선을 해줬죠. 어느 집은 맘보바지를 잘하고 어느 집은 판탈롱을 잘하고. 어릴 때부터 그렇게 살아오다 보니 디자이너는 내게 먼 이야기가 아니었어요.”
디자이너로 데뷔하게 된 계기도 남들과는 달랐다. 1974년 디자이너 진태옥의 쇼를 통해서 그는 패션계에 한 획을 그은 사건의 주인공으로 급부상했다.
“진태옥 선생님한테 왜 우리나라 쇼는 이렇게 전근대적입니까, 제가 한번 혁명을 일으켜보겠다 했죠. 그래서 그 해 가을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은 쇼가 탄생하게 된 겁니다. 대한민국 최초의 패션디렉터가 등장한 거죠. 캄보밴드(소규모 재즈밴드) 쓰고 모델 7~8명이 무대에 나오던 시절에 제가 한 스테이지에 15명씩 모두 45명을 등장시켰거든요. 전 이사도라 던컨의 군무(群舞)와 같은 한 편의 뮤지컬처럼 연출하고 싶었어요. 모델 아이들보고 워킹하지 말고 그냥 뛰어나가라고 했죠. 진 선생님이 그때 쇼 끝나고 감동받아서 펑펑 울었어요. 그냥 ‘한방’에 보내버린 거죠(웃음).”
‘딴따라’ 기질이 운명적으로 나를 이끌었다
‘디자이너 하용수’ 이전엔 ‘배우 하용수’가 있었다. 고등학교 때 코카콜라 모델로 데뷔했던 그는 대학 1학년 시절 친구 따라 갔던 오디션에서 박카스모델로 발탁됐고, 우연히 보게 된 TBC(동양방송) 공채 탤런트 시험에선 친구들은 다 떨어지고 혼자 1등으로 붙게 된다. 그의 ‘딴따라’ 기질이 운명적으로 이 세계로 이끌었던 셈이다.
“그러다가 신상옥 감독의 ‘혈류’라는 영화에서 신인 배우를 뽑는다기에 직접 전화를 걸어 배우 지망생인데 사장님 좀 뵙자고 했죠. 그러고 보면 내가 참 당차긴 했던 거 같아요. 지금 생각하면 꼬마 시절이었는데 자기가 직접 로비해서 주인공 배역을 따냈던 거지. 무대 딱 한 번 서봤을 뿐이고 연기도 제대로 안 해봤는데 카메라 앞에서 공포가 없는 거예요. 난 인생 모토가 그냥 ‘I Can Do, I’m not worry(난 할 수 있어. 걱정 안 해)’였어요. 신성일씨랑 둘이 나오는 버디무비였는데, 그때 성일이 형한테 연기 정말 많이 배웠어요. 거의 단 둘이 찍는데 내가 연기를 못하면 안 되니까 나한테 연기를 안 가르쳐줄 수가 없었던 거죠. 형이 ‘다른 친구들은 그저 얼굴 믿고 신성일 아류 같은 배역을 하는데 넌 잭 니콜슨 같은 너만의 캐릭터가 있다’면서 기특해 하더라구요. 신성일씨는 ‘넌 처음부터 뭔가 다른 놈’이라면서 그때부터 날 어려워했어요. 아직도 날 만나면 좀 어려워해요. 만날 때마다 ‘용수야, 나 옷 어떻게 입어야 되냐’ 그러면서 지금도 나한테 재롱떨어요(웃음). 그렇게 시작해서 영화를 한 18편했어요. ‘별들의 고향’만 조연이었고 다 주연이었죠.”
배우로서 잘 나가던 그는 갑작스레 ‘대마초 사건’에 연루되게 된다. 1974년의 일이다. 이미 오래 전 일임에도 그때 일에 대해 하용수는 할 말이 남은 듯했다.
“난 마약을 하지도 않았는데 대마초 사건으로 7년 동안 억울한 시간을 보냈어요. 고위층이 연루된 비리에 나까지 철퇴를 맞은 거죠. 그게 스물일곱에서 서른넷까지였는데 배우로선 정말 아까운 나이였어요. 그 이후 금보라의 데뷔작이기도 했던 김수용 감독의 ‘물보라’라는 작품에서 바보 ‘일렬’이라는 배역으로 컴백했는데, 그 작품 찍고 나서 정인엽 감독의 ‘종점’에서 장미희하고 주인공 한 번 더 하고. 그러고 나니까 영화는 지루하게 느껴지더라구요. 바로 접었어요. 그 시기에 영화가 점점 TV에 밀리기 시작하기도 했구요.”

힘들게 보낸 7년의 시간은 오히려 그에게 약이 되었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더욱 집중했다. 종각에 음악을 마음껏 들을 수 있는 카페 ‘템테이션’을 연 것도 그 무렵이다. 그에게 음악은 패션과 영화만큼이나 중요한 삶의 요소다. “7년 동안 음악만 듣고 프랑스문화원에만 다녔어요. 문화에 대한 식견과 마인드가 굉장히 풍요로워졌던 소중한 시간이었어요.”
하용수에게 음악은 매우 특별하다. 머릿속에 음악 10만곡쯤을 넣고 다닌다는 그는 “내가 듣는 음악 때문에 나를 기억하는 이들도 많다. 오전엔 이런 음악, 비올 땐 이런 음악, 난 시간과 분위기에 따라 듣는 음악이 다르다”고 말했다. 최근엔 비매품으로 그가 추천하는 곡들이 담긴 컴필레이션 음악 CD를 제작하기도 했단다. “음악뿐 아니라 잘 놀기 위해서 몰래 노력을 한다”며 웃음을 보였다.
중저음의 근사한 음색을 가진 그는 노래도 가수 못잖을 정도로 잘 부른다. 가수 이은미를 직접 발굴해 키운 안목이니 매니지먼트 실력도 탁월하다.
“저는 정말로 가수는 노래를 잘해야 한다는 기본 원칙에 충실합니다. 그래서 노래 잘하는 가수를 좋아했어요. 윤복희·패티김 누나, 임희숙 등이랑도 친하죠. 제가 이은미도 픽업했죠. 재즈가수 웅산도 무명시절부터 봐왔어요. 그 친구들하고 어울리려면 저도 노래를 좀 해야 하니까 레퍼토리가 좀 있죠(웃음). 프로가 노래를 할 땐 너무 오버해서도 안 되고 너무 단조로워도 안 되고 적절한 레서피가 있어야 해요. 노래에도 적절한 양념이 필요한 법이거든요. 이런 얘길 제가 가수들한테도 늘 합니다. 저는 로큰롤도 잘 하고, 발라드, 엔카(演歌) 등 장르 구분이 없이 다 즐겨 불러요. 만나는 사람에 따라 그 분위기에 맞춰야 하니까, 허허.”
하용수는 캐주얼이라는 말조차 생소했던 1970년대에 ‘유니섹스’라는 콘셉트를 내세워 남대문 ‘페인트타운’, ‘커먼플라자’, 명동의 ‘비상구’를 만들었다. 젊은 층들을 위한 멀티플렉스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페인트타운과 커먼플라자는 기획 당시 하용수가 백지수표를 받은 일화로도 유명하다.
동숭동에 만든 하이패션 브랜드 ‘파라오’는 당시 강북 부자들 사이에서 가장 앞 순위로 거론된 옷이었다. 하용수는 “그때 옷 한 벌에 300~400만원씩 받았었다. 파라오는 강북 부자들이 엄청 사 갔다”고 전했다.
승승장구 하던 그에게도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가 찾아왔다. 닉스, 클럽 모나코, 쏘베이직 등 손을 대기만 하면 성공했던 브랜드들을 잇달아 론칭하며 성공했던 그는 1997년 절친한 지인의 공금 횡령으로 인해 부도를 맞게 된다. 도피하듯이 미국으로 떠났던 이유다. 하용수는 “15년 동안 빚만 300억원을 갚았다. 그땐 돈이 들어와도 24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바로 압류됐었다”고 털어놨다.
“미국에서 들어오게 된 건 어머니가 위중하셨기 때문이에요. 너무나 많은 상처를 받았을 때니까 모든 사람들하고 소원하게 지냈어요. 그렇게 지내다가 들어와서 어머니 장례를 치르는데 병원에서 지금껏 가장 많은 조문객이 왔다고 ‘국상(國喪) 났느냐’고 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때 내가 인생을 헛살진 않았구나 싶더라구요. 장례식장에서 한 가지 에피소드가 있는데, 발인할 때 제가 너무 피곤해서 선글라스를 꺼내 쓰니까 죄다 따라 쓰더라구요. 마치 마피아 장례식 같았어요(웃음).”

수많은 스타를 배출해낸 그에게 기억에 남는 배우에 대해 물었다. 그는 서슴없이 이정재와 김혜수를 떠올렸다.
“(이)정재를 처음 봤을 때 여백이 있는 얼굴이 참 좋았어요. 쌍꺼풀 안 진 눈, 광대가 나온 몽골리안 얼굴인데 매우 세련된 이미지를 가졌고 피부가 정말 대리석 같았죠. 그런 이미지를 가진 배우가 없었거든요. 정재를 본 열 중 아홉은 배우 못 한다고 했어요. 당시 쌍꺼풀 진한 얼굴이 인기가 있었거든요. 저는 개인적으로 그런 얼굴은 별 매력이 없어요. 정재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 멋져지고 있어요. 사실 ‘하녀’ 제작자가 저랑 절친한 사이인데 애초엔 다른 배우가 낙점돼 있었어요. 제가 ‘대한민국에서 양복 입혀 놨을 때 제일 간지 나는 건 정재다, 연기 안 해도 그 자체로 멋있다’고 추천했죠. 대타로 투입된 정재가 배역을 너무 잘 소화해줬고 결과적으로 정재도 이 작품으로 또 한 번 전성기를 맡게 돼 너무 뿌듯했습니다. 사실 배우란 굳이 연기를 안 해도 그 존재 자체로 오브제가 될 수 있을 때 좋은 배우라고 생각해요. (김)혜수는 중 3때부터 영화 ‘깜보’를 통해 인연을 맺었어요. 혜수, (오)연수, (고)현정 엄마는 내 와인 친구들이에요. 얼마 전에도 한번 뭉쳤죠. 혜수는 자칫 핸디캡일 수 있는 너무 건강해 보이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는데, ‘너는 여배우를 해야 하니까 섹시함으로 어필해야 한다’고 말해줬죠. 그 이미지에 맞게 레드카펫 드레스도 만들었구요.”
하용수는 배우를 캐스팅 할 때 기본적으로 인성(人性)부터 평가한다고 강조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첫 번째 기준이라고 한다.
“저는 사람을 볼 때 인성부터 봐요. 그래서 제가 키우는 배우들은 비교적 예의가 있는 친구들이에요. (이)정재, (주)진모, 송일국, 배수빈 등 모두가 기본적으로 인성이 된 애들이에요. 배우라면 생을 살아가는 여러 가지 애티튜드(태도)가 남들에게 표본이 돼야 한다는 게 제 나름의 지론이에요.”
하용수는 1992년 ‘사의 찬미’로 대종상 의상상을 받기도 했다. 의상상 부문은 하용수로 인해 최초로 생긴 것이었다. 그는 “디자이너는 단지 옷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 시대의 문화를 창조할 수 있어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옷 꼬매는(꿰매는) 법이나 일러스트만 배울게 아니라 역사를 알아야 하고 소양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서양의 복식사도 공부해야 하지만 그 시대의 문화, 그 시대의 향기로웠던 영화들 이런 것들을 탐독하면 저절로 감각이 나오는 겁니다. 저도 어릴 때 역사 공부를 제일 좋아했고, 훗날 그것들이 내겐 다 소양교육이 되었어요.”
그는 대규모 아시안 프로젝트로 기획됐던 영화 ‘몽유도원도’에 대한 기억도 떠올렸다. 최인호 원작의 ‘몽유도원도’는 삼국사기의 도미부인 설화를 소재로 한 작품으로 2001년 당시 첸카이거(陳凱歌) 감독이 연출을 맡으며 큰 주목을 끌었다. 이러한 대형 프로젝트를 기획했던 주인공은 하용수 디자이너와 이주익 보람 엔터테인먼트 대표였다.
“대규모의 아시안 프로젝트를 하고 싶어서 보람영화사 이주익하고 머리를 맞댔어요. ‘몽유도원도’ 그 작품이 동양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첸카이거가 감독을 맡고 ‘클리프행어’의 촬영감독을 했던 존 브루노, 음악은 ‘마지막 황제’의 사카모토 류이치가 맡게 됐죠. 그때 내가 정재하고 (김)희선이를 쓰려고 했어요. 아쉽게 무산됐지만 당시로선 어마어마한 프로젝트였죠.”
내년 상하이에 플래그십 스토어 오픈 예정
그는 내년 중국 상하이(上海)에 플래그십 스토어를 오픈할 계획이라고 한다. 첸카이거 감독의 ‘패왕별희(覇王別姬)’에서 의상과 아트디렉터를 담당했던 그는 패션업계에서 중국 시장의 가치가 매우 커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상해는 새로운 신세계입니다. 그곳의 로컬 마켓도 재미있지만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이 그곳으로 운집하고 있어요. 곧 제2의 뉴욕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앞으로 전 철저히 10대를 대상으로 한 옷, 그리고 5~10살 사이의 유아복도 해보고 싶어요. 특히 유아복 시장은 엄마들을 소비층으로 하는 건데 요즘의 ‘슈퍼맘’들을 겨냥한 고급 브랜드가 없거든요. 해리포터 같은 느낌의 판타지가 담긴 옷을 만들고 싶어요. 브랜드 이름도 ‘앙팡테리블’이라고 이미 지어 놓았구요. 우리가 팀 버튼 감독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도 리얼 스토리가 아니지만 판타지가 있기 때문이잖아요. 그리고 아동복 브랜드가 아닌 존 갈리아노, 장폴 고티에, 비비안 웨스트우드 같은 가장 패셔너블한 성인복 브랜드를 벤치마킹할 거예요.”
하용수는 최근 책도 쓰고 있고 페이스북도 열심히 하고 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세상과 단절하고 살았지만, 이젠 소통하고 싶어서다. 그는 “일상의 에피소드에서 느끼는, 사람들에게 보내고 싶은 메시지를 글로 쓰고 싶다. 내가 조금 ‘짬밥’이 있는 사람이라서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일 것”이라며 웃었다.
60여년의 인생 동안 최고의 화려함과 희열, 그리고 세상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의 좌절을 모두 경험했던 그는 여전히 신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
“돈은 다 뺏어가셨지만 아직도 멋지고 매력 있는 60대의 모습으로 나를 살게 해주시고, 여유를 잃지 않는 소년 같은 웃음을 남겨주셨기 때문이죠. 이제야 비로소 내가 밝게 웃을 수 있게 되었어요. 그건 돈하고 상관없는 것이더군요. 내 주변의 돈 많은 사람들도 그 많은 재산을 다 못 쓰고 죽어요. 세상 사는 즐거움이란 결국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는 것 아닌가요. 그런 면에서 나는 누굴 원망해선 안 될 것 같아요. 하고 싶은 것을 원 없이 하고 살았고, 또 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할 수 있으니까.”
▒ 하용수 디자이너는 …
1971년 한양대 행정학과 3년 중퇴, 74년 한국모델협회이사·조선호텔 프랑소와즈 가을 컬렉션(진태옥 쇼) 연출, 82년 남대문 페인트타운·커먼플라자 기획, 86년 하이패션 브랜드 베이직 설립, 91년 춘사영화제 의상상(사의 찬미), 92년 대종상 최초 의상상(사의 찬미), 93년 해태그룹 GV2 베이직 진 출범 및 총괄 기획, 95년 SBS ‘모래시계’ 의상 협찬(최민수·이정재), 95년 파라오 패션쇼, 98년 SBS ‘백야 3.98’ 의상 제작, 98년 보성 인터내셔널 고문, 99년 클럽모나코 기획·소베이직 론칭·닉스 총괄 디렉터, 2000년 하용수 오뜨 꾸띄르 오픈, 2001년 엔터테인먼트사 ‘FRAME 21’ 설립(최민수·이정재·주진모·예지원·손창민·오연수 등), 2001년 최인호 원작 영화 ‘몽유도원도’ 기획(첸카이거 감독·사카모토 류이치 음악), 2002년 첸카이거 감독 ‘투게더’ 의상 담당, 2011년 쌍방울 상임 고문, 2013년 홈앤쇼핑 여성 의류브랜드 ‘엘렌느’ 론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