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진: 조선일보 DB
#. 미국의 역사 저술가 해럴드 램은 자신의 책 <칭기즈칸> 서문을 이렇게 시작한다. “800년 전 한 사나이가 고비사막의 모래바람 속에 서 있었다. 그는 세계 절반의 땅에서 왕으로 군림했으며, 죽은 뒤에도 그의 말발굽이 지나간 곳은 수백 년 동안 두려움에 떨었다. 세상은 그를 끔찍한 학살자, 신이 내린 재앙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인류 최고의 전사, 왕 중의 왕이라고 불렀다. 그가 바로 칭기즈칸이다. 그는 왜 이렇게 극단적인 역사의 평가를 받는 것일까. (중략) 유럽 중심의 세계사 서술에 익숙한 현대인들은 알렉산더, 카이사르, 나폴레옹이라는 위대한 정복자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칭기즈칸은 앞서 말한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힘을 가진 정복자였지만, 그의 실체에 대해 아는 사람은 드물다. 왜 그의 역사는 고비사막의 모래바람 속에 묻혀버렸을까.”
끝이 보이지 않는 광대한 고원에 한 마리 늑대가 나타났다. 그 늑대는 일순간 고원의 적들을 평정하고 왕 중의 왕이 됐다. 이 늑대가 출현하기 전의 고원은 평화라는 게 뭔지도 모르는 세상이었다. 서로 살아남기 위해 늘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싸움을 벌였다. 그 아수라장의 전쟁터를 깨끗이 쓸어버리고 모든 적들을 하나로 결속시킨 게 바로 그 늑대다. 스스로를 ‘푸른 늑대’의 후손이라 믿었던 몽골족의 수장 테무친이었다. 그는 몽골족의 통일을 이뤘을 뿐 아니라 몽골고원의 여타 부족들도 모두 한 깃발 아래로 흡수했다. 그런 후 ‘칸(Khan: 왕)’에 올라 전대미문의 정복전쟁을 진두지휘하기 시작한다. 유라시아 대륙 정복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칭기즈칸은 1162년 몽골의 한 유력 부족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예수게이는 부족의 세력을 키우려는 야심가였다. 하지만 어느 날 적대적인 부족의 간계로 어이없이 독살되고 말았다. 그날로 열세 살 어린 소년 테무친과 그 가족의 견디기 힘든 시련이 시작됐다. 예수게이를 따르던 부족민은 대부분 테무친의 가족에게 등을 돌렸다. 유목민 부족들은 자신들의 생명과 재산, 삶의 터전을 보호해줄 수 있는 사람만을 리더로 인정하고 따른다. 남편을 잃은 아낙네와 어린아이들만 남은 테무친의 가족이 고립무원의 지경으로 빠진 것은 초원의 세계에서 불가피한 현실이었다.
어린 테무친은 이를 악물었다. 그와 가족들은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삶을 이어갔다. 간혹 들쥐와 물고기도 잡아 먹으며 어렵사리 영양분을 보충했다. 유목민들은 대개 육식을 한다. 자신들이 기르는 소와 양, 말의 고기를 취해 주된 식량으로 삼는 것이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아버지를 잃은 어린 테무친과 가족이 얼마나 큰 고초를 겪었는지 금세 짐작된다. 게다가 주변 부족들은 과거 초원의 실력자였던 예수게이의 가족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후환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어린 테무친은 생사를 넘나드는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 열네 살 때는 적에게 포로로 잡혀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구사일생으로 탈출했다. 그는 시련이 클수록 더욱더 스스로를 단련시켜 나갔다. 겨울 초원의 뼛속 깊이 파고드는 칼바람도, 호시탐탐 자신과 가족을 노리는 주변 부족들의 칼날도 모두 이겨냈다. 그렇게 푸른 늑대의 후예는 어떤 일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차돌 같은 전사로 거듭났다.

- 사진: 김영훈 대성그룹 회장 제공
혹독한 시련 거쳐 몽골고원 통일 이뤄내
1206년 봄, 몽골고원의 최북단 지역에 위치한 오논 강의 발원지에서 코릴타(쿠릴타이·부족 지도자들의 회의체)가 열렸다. 오논 강 유역은 테무친이 태어난 고향이다. 몽골족의 모든 부족과 씨족, 그리고 몽골고원의 패권을 다투다가 테무친에 무릎을 꿇은 부족의 대표들이 집결했다. 이 자리에서 테무친은 몽골고원의 모든 유목민을 통치하는 가장 높은 자리인 ‘칸’에 즉위했다. 칭기즈칸의 탄생이었다. 새로운 나라의 이름은 ‘예케 몽골 울루스’였다. 몽골어로 ‘큰 몽골 나라’라는 뜻이다.
몽골고원의 유목민 부족들이 통일을 이룬 것은 사실상 이때가 처음이었다. 이전에는 중원을 차지한 중국 왕조가 지속적으로 고원 내의 부족들을 분열시켜 왔다. 유목민들이 중원으로 내려오지 못하도록 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이었다. 하지만 칭기즈칸은 고원의 모든 부족을 하나로 묶어냄으로써 중국 왕조가 파놓은 질곡을 마침내 벗어났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 총사령관으로 활약한 버나드 몽고메리 장군은 자신의 저서 <전쟁의 역사>에서 칭기즈칸의 몽골고원 통일을 이렇게 평가했다. “과거 한 부족이 다른 부족에게 승리한다는 것은 보통 파괴와 학살을 의미했다. 그러나 칭기즈칸은 승리를 건설적으로 이용함으로써 처음부터 탁월한 사고력을 보여줬다. 즉 그는 파괴나 학살이 아닌 민족통일을 이룩했던 것이다. 그는 정복민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았고, 그러한 리더십 때문에 정복민들은 새로운 신분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는 의지력과 가공할 만한 세력으로 유목민들을 통일했지만, 한편으로는 보다 나은 생활이 뒤따를 것이라는 희망을 정복민들에게 심어줬다.”
몽골고원은 역사적으로 유목민의 세계였다. 수많은 부족과 씨족으로 나뉘어 약탈과 복수의 살육이 끊이지 않은 지역이었다. 그곳을 통일한 칭기즈칸은 다음 목표를 세웠다. 기름진 땅에서 풍요와 안정을 누리며 살던 정착민들의 국가로 시선을 돌린 것이다. 유목민들은 늘 가축을 먹일 초지(草地)를 찾아 이리저리 이동하며 사는 운명을 타고 난 사람들이다. 한곳에 머물러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 습성이 오래되다 보면 천성이 된다. ‘이동 DNA’를 갖고 태어나는 것이다. 칭기즈칸은 그 유목민적 에너지를 하나로 모아 외부 세계로 발산하는 웅대한 목표를 세웠다.
칭기즈칸은 1207년 중국 서북쪽 변경에 있는 탕구트족의 왕국 서하(西夏)를 공격해 무릎을 꿇렸다. 몽골고원을 벗어나 시도한 최초의 정복전쟁에서 승전고를 울린 것이다. 이것은 신호탄에 불과했다. 칭기즈칸의 기마군단은 파죽지세로 주변 국가들을 정복해나갔다. 1215년 선조들의 숙적인 금나라로 쳐들어가 수도인 중도(中都·오늘날 베이징)에 입성한 데 이어 1218년에는 서요(西遼)를 정벌했다.
1219년에는 서아시아 이슬람 지역의 맹주 호라즘(또는 콰레즘) 왕국과 교역하기 위해 사절단을 파견했다. 하지만 호라즘 왕국은 칭기즈칸의 사절단을 살해했다. 칭기즈칸의 이슬람 정벌이라는 악몽을 초래한 결정적 패착이었다. 칭기즈칸은 즉각 호라즘 왕국을 응징하러 군사를 일으켰다. 칭기즈칸의 정예 기마군단은 번영을 구가하던 호라즘의 도시들을 잇달아 파괴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칭기즈칸 군대의 노도와 같은 기세에 술탄 무하마드는 멀리 꽁무니를 내뺐다.
칭기즈칸이 자랑하는 최정예 병력인 ‘저승사자 군단’은 술탄 무하마드를 잡기 위해 끈질긴 추격전을 벌이면서 유럽을 떨게 했다. 몽골군에 쫓긴 술탄 무하마드는 결국 카스피해의 작은 섬까지 도주했다가 그곳에서 비운의 최후를 맞았다. 그 후 칭기즈칸은 장남 조치의 군대를 보내 러시아와 헝가리를 비롯한 유럽 정복에 성공했다.
알렉산더·나폴레옹·히틀러는 ‘명함’도 못 내밀 정도
칭기즈칸이 정복한 지역은 그야말로 광대했다. 세계사에서 ‘정복자’로 이름을 남긴 알렉산더, 나폴레옹, 히틀러가 정복한 면적을 모두 합친 것보다 넓은 땅을 손아귀에 넣었다. 손자인 쿠빌라이칸이 세운 원나라까지 합치면 몽골제국의 최대 면적은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난다. 동쪽으로는 고려, 서쪽으로는 헝가리와 러시아, 남쪽으로는 인도 북부, 북쪽으로는 시베리아 남단에 이르기까지 유라시아 대륙에서 자신들의 말발굽이 닿는 곳은 모두 다 정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는 ‘푸른 군대’로 불렸던 기마군단을 이끌고 유라시아 대륙을 종횡무진 누비며 자신의 군대와 전쟁을 치른 모든 국가들을 복속시켰다. 정말 놀라운 것은 칭기즈칸의 정복전쟁을 수행한 병력이 약 10만명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가장 많은 군사를 동원했을 때도 그 수가 20만명이 채 되지 않았다는 게 역사가들의 추정이다. 그 정도 병력으로 당시 2억~3억명에 달하는 유라시아 대륙의 인구를 모두 굴복시켰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경이로움 그 자체다.
칭기즈칸이 마법을 부렸을 리는 없다. 하지만 그 시대 어느 나라 군대보다도 전투력이 뛰어나고 사기가 하늘을 찌른 군대가 바로 칭기즈칸의 푸른 군대였다. 주목할 것은 극소수의 보급부대를 제외하고는 모든 병력이 전투병이었다는 점이다. 그것도 모두 말타기와 활쏘기, 칼싸움에 능한 기마병이었다. 칭기즈칸의 정복군이 본토인 몽골고원으로부터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중앙아시아, 페르시아, 유럽을 공략할 수 있었던 것도 당시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진군 속도를 자랑한 기마군단 덕분이었다. 물론 정복 국가와 점령 도시에서 식량과 물자를 약탈하면서 보급문제를 해결한 것도 유라시아 대륙 원정을 가능하게 한 요소 중 하나다.
포로로 잡았거나 항복한 이민족 병사들을 자신의 군대로 편입시킨 것도 군사력 강화에 큰 보탬을 줬다. 한 나라를 굴복시켜 그 나라 병사들을 흡수한 다음, 또 그 군대로 다른 나라를 치는 식으로 대륙 정복을 이어갔다는 것이다. 정복 국가의 기술자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도 주목할 대목이다. 칭기즈칸은 어떤 나라를 공격하더라도 기술자들은 죽이지 않고 데려갔다. 그들의 기술을 몽골군의 전투력 강화에 이용한 것이다. 일례로 페르시아 지역 정벌에 나섰을 때, 금나라에서 가져온 각종 첨단 전쟁무기를 대대적으로 동원하기도 했다.
칭기즈칸은 몽골고원을 통일한 후 국가 시스템을 확 뜯어고쳤다.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대대적인 개혁이었다. 칭기즈칸은 과거의 씨족제와 부족제를 과감하게 버리고 ‘천호제(千戶制)’라는 제도를 새로운 국가의 근간으로 삼았다. 천호제는 십호, 백호, 천호, 만호 단위로 구성되는 군사·행정 조직 시스템이었다. 십호는 10명의 무장 병사를 배출할 수 있는 기본 단위였다. 그 십호가 10개 모이면 백호, 백호가 10개 모이면 천호, 천호가 10개 모이면 만호가 됐다. 10진법에 따른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국가조직이었던 것이다. 이 천호제는 모든 국민을 하나로 묶어내는 총동원 체제의 기능을 했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든 개혁은 피로현상을 동반한다. 더욱이 모든 국민을 강제적으로 결집시키는 것은 한계가 있다. 일시적으로는 총동원 체제가 굴러갈 수 있다. 하지만 언젠가는 필연적으로 내부에서부터 저항세력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칭기즈칸은 어떻게 국민들을 결속시켰을까. 또 고난의 장거리 원정을 떠나야 하는 병사들에게는 어떻게 사기를 불어넣었을까. 칭기즈칸의 강력한 리더십은 어디에서 비롯했을까.

- 사진: 김영훈 대성그룹 회장 제공
‘현대식 성과급제’ 도입해 최강군대 만들어
유목민들은 부족간 전쟁에서 이기면 힘세고 빠른 자들이 전리품을 몽땅 챙겨갔다. 서로 굶주리고 가난한 처지인 까닭에 앞뒤 가리지 않고 약탈부터 하고 보는 것이다. 이러다 보니 아무리 전쟁에서 이겨도 부족 통합이 이뤄지지 않았다.
칭기즈칸은 메스를 댔다. 개인적인 약탈을 금지하는 군율을 도입한 것이다. 대신 전쟁에서 승리하면 전공(戰功)에 따라 전리품을 공평하게 나눠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성과 있는 곳에 보상 있다’는 현대식 성과급제를 도입한 셈이다. 이 군율로 병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게 됐다. ‘나도 열심히 싸워 이기면 잘살 수 있다’라는 생각은 칭기즈칸의 병사들을 더욱 용맹하게 만들었다.
칭기즈칸이 ‘예케 몽골 울루스’를 건국할 즈음, 몽골고원의 인구는 약 100만명에 불과했다. 이 적은 인구로 어떻게 거대한 유라시아 대륙을 지배하는 몽골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을까. 칭기즈칸은 정복한 국가의 국민들을 몽골인과 차별하지 않았다. 아무리 민족, 인종, 종교가 달라도 칭기즈칸에게 항복하고 복종을 서약하면 몽골제국의 백성이 될 수 있었다. 포로나 노예도 신분 상승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물론 칭기즈칸에게 끝까지 저항하는 나라나 도시는 무참하게 파괴되고 살육되기도 했다.
칭기즈칸의 피(被)정복민에 대한 포용적 정책 덕분에 ‘몽골 드림’을 이룬 이민족도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예가 금나라 관료 출신의 야율초재와 야율아해다. 야율초재(耶律楚材)는 금나라의 수도가 몽골군에 함락될 때 포로로 잡혔다. 하지만 그는 칭기즈칸의 총애를 받으며 행정가, 유학자, 점술가로 활약했다. 독실한 불교도였던 야율초재는 칭기즈칸에게 살상을 자제하라는 건의까지 할 정도였다. 또 몽골제국의 행정, 세제 등을 중원식으로 바꾸는 노력도 기울였다. 야율아해는 행정, 법률, 전략 등으로 몽골군의 약점 보완에 큰 기여를 했을 뿐 아니라 호라즘 전쟁에 참가했다가 사마르칸트의 총독까지 지냈다.
칭기즈칸의 최측근이었던 천민 출신의 대장군 모칼리도 몽골족이 아니었다. 그의 출신지는 정확하게 전해진 바가 없지만, 고려인이었을 것이라는 추정도 있다. 모칼리는 ‘좌(左) 모칼리, 우(右) 보오르초’라고 불릴 만큼 칭기즈칸의 양대 측근으로 큰 신임을 얻었다. 칭기즈칸은 서역 원정을 떠날 때 모칼리에게 금나라의 통치를 맡길 정도로 그를 아꼈다.
칭기즈칸은 유라시아 대륙을 정복한 후 명실상부한 제국에 걸맞은 통치 시스템을 갖춰 나갔다. 첫 번째가 법치 제도 확립이었다. 그는 몽골제국의 헌법에 해당하는 ‘대자사크’를 만들었다. 대자사크는 몽골에서 가장 오래된 성문법(成文法)이다. 대자사크는 몽골어로 ‘큰 법’이라는 뜻이다. 몽골제국 전체에 적용되는 법이라는 의미가 담겼다. 대자사크는 불과 36개의 조항으로 구성됐다. 하지만 인간사회에서 지켜야 할 규범은 대부분 포함돼 있었다. 최소한의 법률로 대제국을 통치한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칭기즈칸은 정복전쟁을 펼치면서 때로는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한 무소불위의 제왕이었지만, 한편으로는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균형 감각과 합리적인 판단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중대사를 결정할 때는 반드시 회의를 열어 합의를 도출하도록 한 것이 단적인 예다. 특히 전쟁 개시나 후계자 선정과 같은 국가적 사안은 지도자들의 회의체인 코릴타에서 결정했다. 코릴타에는 국가의 원로들과 칭기즈칸 가문의 일원인 ‘황금씨족’, 천호장들이 참가했다. 어떤 사안의 경우에는 최종 결론이 나기까지 몇 달이 걸리기도 했다. 그만큼 합의를 중시했다는 뜻이다.
‘대자사크’로 법치, ‘코릴타’로 합의제 실천
칭기즈칸은 탕구트 원정을 떠났던 1227년에 세상을 떠났다. 원정 도중 낙마를 당해 입은 부상이 악화된 탓이었다. 그의 나이 65세였다. 칭기즈칸은 죽음을 몇 시간 앞두고 탕구트 주둔지의 병석에 누워 ‘칸’으로서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 적군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절대로 울거나 한탄하지 말라. 그리고 약속한 날에 탕구트의 왕과 백성들이 성을 떠났을 때 그들을 전멸시켜라.”
인류 역사상 최고의 정복자는 그렇게 운명처럼 원정길에 이승과 작별했다. 그가 죽은 후에도 몽골제국은 150여년 동안 지속됐다. 원나라가 명나라에 밀려 ‘말 타고 양 치던 고향’ 몽골고원으로 퇴각하면서 몽골제국의 신화는 끝을 맺었다. 하지만 칭기즈칸 제국의 뿌리에서 파생돼 나온 무굴제국, 오스만투르크제국, 크림칸국 등 후계국가의 명맥은 19세기 중반까지 이어졌다. 유라시아 대륙 전역에 드리운 칭기즈칸의 그림자가 500년 이상 지워지지 않았던 것이다.
미국 <워싱턴포스트>지는 1995년 ‘지난 1000년의 가장 중요한 인물’로 칭기즈칸을 선정한 바 있다. 그 선정 이유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칭기즈칸의 몽골제국은 역사는 짧았지만 세상을 바꿔놓았다. 콜럼버스처럼 칭기즈칸은 지구를 축소시킨 주인공이다. 그와 그의 후손들은 유라시아를 넘어 동(東)과 서(西)의 문명이 연결될 수 있도록 광대한 자유무역지대를 만들었다. 우리가 선택한 ‘1000년의 인물’은 박애주의자도, 뛰어난 사상가도, 위대한 해방가도 아니었다. 사실 그는 깡패였다. 그러나 역사는 때때로 깡패에 의해 만들어진다. 역사는 성인이나 천재, 해방가들의 이야기로만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참고 문헌 : <밀레니엄맨 칭기스칸>, <CEO 칭기스칸-유목민에게 배우는 21세기 경영전략>,
<헤럴드 램의 칭기즈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