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ife is short, Art is long(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서양의학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히포크라테스가 약 2400년 전에 남긴 말이다. 그가 말한 원래 의미는 “생명은 짧고 의술(醫術)은 길다”였지만 이후 한 사람의 짧은 인생과 그가 남긴 예술 작품의 긴 생명을 비교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이 격언이 “인생도 예술도 길다. 다만 예술이 좀 더 길 뿐이다”로 바뀌어야 한다는 게 필자의 주장이다. 기대수명이 급속하게 길어지면서 100세에 근접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빈번하게 사망하는 연령을 뜻하는 ‘최빈사망연령’은 한 해 동안 사망한 사람들을 나이별로 나열할 경우 가장 많은 사람이 사망하는 나이를 말한다. 우리나라의 최빈사망연령은 이미 85세를 넘어섰다. 실제로 요즘 문상을 가면 고인의 연세가 여든 이상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아흔 이상인 경우도 볼 수 있다. 이 추세라면 2020년경 최빈사망연령이 90세에 달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최빈사망연령이 90세를 넘기 시작하면 주변에서 100세까지 사는 사람을 흔히 볼 수 있다고 해서 이른바 ‘100세 시대’에 진입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 삶 그대로 녹아 있는 아리랑
이제 100년을 살아야 하는 인생이라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대목에서 필자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민요로 서민들의 애환을 담은 아리랑을 떠올린다. 우리는 과연 어떤 아리랑을 부르며 이 긴 인생을 살아갈 것인가. 이를 위해 남한의 3대 아리랑으로 꼽히는 ‘정선아리랑,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의 가사를 차례로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정선아리랑.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너 주게, 싸리골 올동백이 다 떨어진다(이하 중략).”
첫 번째 가사는 고려 말엽 조선의 역성 혁명을 반대한 고려 유신 7명이 정선으로 은거지를 옮겨와 살면서 그들의 외로우면서도 고달픈 심정을 노래한 것이라고 한다. 두 번째 가사는 남녀 간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정선의 아우라지 나루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두 마을의 처녀와 총각이 서로 사랑하게 돼 처녀가 싸리골 동백을 따러 간다는 핑계를 대고 날마다 강을 건너가 정을 나눴다. 그러던 어느 여름 장마로 홍수가 지면서 강을 못 건너게 되자 총각을 만날 수 없게 된 처녀가 이를 원망하면서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정선읍내 물레방아는 사시장철 물을 안고 뱅글뱅글 도는데, 우리 집에 서방님은 날 안고 돌 줄을 왜 모르나”라는 가사 또한 심상치 않다. 서방님의 관심사가 다른 곳에 있었던지 아니면 외간 여자를 만나고 다녔는지는 알 길이 없다. 어쨌든 나를 안고 돌지 않는 서방님에 대한 여자로서의 성적 불만을 올곧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정선아리랑은 외로움과 그리움, 고달픔에서 시작해 원망과 불만이 쌓인 데서 오는 한(恨)을 품고 있는 노래다. 정선은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딸이 쌀 서 말 먹고 시집가면 부잣집’이라는 말을 할 정도로 먹고 살기 힘든 동네였다. 새벽부터 밤까지 죽어라 일을 해도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지역에서 사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온 한을 노래 가사로 풀어내고 있는 것이리라.
진도아리랑은 진도 총각과 경상도 처녀의 사랑에 얽힌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게 정설이다. 진도 총각이 경상도 대갓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다가 주인집 딸과 정분이 나서 진도로 도망쳐왔다. 둘이서 정답게 살다가 그만 총각이 병으로 죽자 처녀가 슬픈 마음을 달래려고 부른 게 진도아리랑이라는 것이다.
“서산에 지는 해는 지고 싶어지느냐, 날 두고 가신 님은 가고 싶어 가느냐. 문경새재는 웬 고갠고, 구부야 구부구부가 눈물이로구나.(이하 중략)”
서산으로 지는 해처럼 우리 님도 죽고 싶어서 죽었겠느냐. 그렇기는 해도 님과 함께 도망치면서 굽이굽이 넘어오던 문경새재를 생각하면 눈물만 흐르는 애틋한 심정을 노래한 것이다. 뒷부분에는 이런 가사도 있다. “오동나무 열매는 감실감실, 큰 애기 젖통은 몽실몽실. 씨엄씨 잡년아 잠 깊이 들어라, 문밖에 섰는 낭군 밤이슬 맞는다.”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며느리가 남편과의 정도 맘대로 나눌 수 없는 말 못할 고민을 털어놓고 있는 대목이다. 설사 낭군이 방에 들어왔다고 하더라도 건넌방에서 아마도 홀어미인 시어머니가 잠 못 들어 뒤척일 때마다 낭군의 손을 뿌리치는 아낙의 모습이 눈에 선한 장면이다. 진도아리랑도 정선아리랑에 못지않게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드리운 그리움과 외로움, 슬픔은 물론 고부 갈등과 성적인 고민 등을 담고 있는 것이다.
반면 밀양아리랑은 전혀 다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정든 님이 오셨는데 인사를 못해, 행주치마 입에 물고 입만 방긋.(이하 중략)” 내가 정을 준 님아 나를 보러 오세요, 만나면 선뜻 내색은 못 하지만 이 내 마음은 당신이 한겨울의 꽃처럼 얼마나 반가운지 모른다고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밀양아리랑의 기원과 관련된 전설은 결코 밝은 내용이 아니다. 옛날 밀양 부사 이모(李某)에게 아랑이라는 예쁜 딸이 있었다. 관아에서 일하던 젊은이가 사랑을 고백했지만 아랑이 단호하게 거절하면서 무례함을 꾸짖었다. 그러자 실망한 젊은이는 사모함이 증오로 변해 아랑을 살해하고 말았다. 이후 밀양의 부녀들이 아랑의 정절을 기리면서 ‘아랑, 아랑’하며 부르던 것이 오늘날의 밀양아리랑으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노래 중반부터는 아랑의 애달픈 넋을 위로하는 가사가 나오면서 다음과 같이 끝내고 있다. “저 건너 대 숲은 의의한데 아랑의 설운 넋이 애달프다. 아랑의 굳은 절개 죽음으로 씻었고 고결한 높은 지조 천추에 빛난다.”
여기서 눈여겨 볼 부분은 슬픈 전설이 깃든 이야기를 매우 빠르고 씩씩하면서도 경쾌한 노랫말과 가락으로 이끌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초반을 보면 전혀 슬픔이나 한이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남녀 간의 흥겨운 사랑놀음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하고 있다. 슬픈 전설까지도 흥겨운 가락으로 이끌어내는 밀양 사람들의 지혜 또는 해학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 사진: 조선일보 DB
세 아리랑의 지역적 특성을 살펴보면 어떤 특징을 찾을 수 있을까. 지금은 도로 사정이 엄청나게 많이 좋아졌지만 정선은 최근까지도 강원도에서도 오지 중의 오지였다. 이에 따라 정선아리랑은 잔잔한 흐름 속에 소박함과 여인의 한숨 또는 체념과 같은 서글픔을 담고 있다는 게 총평이다. 진도는 규모가 큰 섬이기는 해도 평야지대가 많은 전남 육지에 비해 농사와 어업으로 살아가기가 더 빠듯한 지역이었을 것이다. 결국 정선이나 진도나 모두 먹고 살기가 어려운 가운데 삶의 애환이 전설이나 설화에 녹아나면서 구슬픈 한이 맺힌 아리랑으로 태어난 것이다. 반면 밀양아리랑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빠르고 씩씩하면서도 경쾌한 가락을 가지고 있다. 여기다 가사 자체도 전체적으로 밝은 분위기여서 듣고만 있어도 저절로 흥이 나고 누구나 들으면 어깨를 들썩이게 만들고 있다.
무엇이 이 세 아리랑을 이렇게도 다른 가사와 가락으로 태어나게 만들었을까. 사는 게 다 어렵던 시절 슬픈 전설과 사연을 가지지 않은 지역이 있었을까. 그런데 한 가지 신기한 것은 진도와 정선이 우리나라 16개 광역시·도에서 가장 개인소득 수준이 낮은 전라남도와 강원도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2년 기준으로 전남과 강원의 1인당 개인소득은 각각 1249만원, 1288만원으로 하위 1, 2위를 차지하고 있다. 전국 평균 1477만원에 비해 200만원 안팎이나 적을 뿐 아니라 상위 1위인 울산의 1831만원과 비교하면 70% 또는 그 이하에 불과하다. 물론 현재와 아리랑이 태어나던 시절, 즉 조선시대나 구한말 또는 일제강점기 때를 비교하기는 어렵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연인지도 모르고 견강부회일 수도 있지만 한 맺힌 슬픔을 노래하는 정선아리랑과 진도아리랑이 태어난 지역의 소득 수준이 가장 낮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반면 밀양이 속해 있는 경남의 1인당 개인소득은 1379만원으로 이 역시 전국 평균 1477만원에는 못 미치지만 16개 시도 중 10위를 차지하고 있다. 경남은 특히 7대 광역시와 산업 시설이 밀집해 있는 경기, 관광도시라는 특성을 가진 제주를 제외한 7개 도 중에서는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오지 중의 오지였던 정선과, 멀기도 멀 뿐만 아니라 살기도 어려운 섬이어서 벼슬아치들의 귀양지였던 진도에 비해, 밀양은 이름 그대로 따뜻한 햇볕이 비추는 너른 벌판(密陽)의 살기 좋은 고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아랑의 슬픈 전설까지도 남녀간의 애닯지만 있음직한 사랑과 흥으로 다시 태어나게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필자의 결론은 먹고살 만해야 노래도 흥이 나고 신명이 나는 법이라는 것이다. 먹고살 만해야 어려운 일, 슬픈 일을 당해도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이 또한 지나갈 거야” 하는 긍정적·낙천적 마음을 가지기가 쉽다는 것이다. 조금 섭섭하고 조금 화가 나는 일도 그러려니 받아들이려면 나 자신이 윤택함과 품위를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특히 나이가 들수록 긍정적·낙천적 마인드를 가져야 한다. 아버지·어머니, 할아버지·할머니로서 또한 윗사람으로서 존경받고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으려면 나 자신이 살 만해야 하고 그 살 만한 정도를 온 몸으로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놀고 쓰고 베푸는 삶 살아야
그러면 어느 정도 살만한 윗사람으로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까. 이 대목에서 퀴즈 하나. 동양의 5현(賢) 또는 5자(子)라고 할 수 있는 공자·맹자·순자·노자·장자의 영원한 스승은? 이 분도 자 자(子) 돌림이다. 정답은 ‘놀자’다. 필자는 나이 든 사람, 가진 사람, 윗사람들이 존경과 대우를 받으려면 먼저 3가지 자를 잘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로 ‘놀자, 쓰자, 주자(베풀자)’다. 잘 놀고 잘 쓰고 잘 베푸는 사람을 싫어하는 사람, 싫어하는 가족과 사회는 없다. 여기다 잘 웃고 잘 걷는 사람이 되면 동양의 5자도 부러워할 5자, 즉 ‘놀자·쓰자·주자·웃자·걷자’가 되는 것이다. 잘 놀고 잘 쓰고 잘 주고(베풀고) 잘 웃고 잘 걷는 사람을 누가 싫어하고 욕하겠는가. 이때 부르는 노래가 개인의 취향에 따라 정선아리랑일수도 진도아리랑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가사대로라면 또 흥대로라면 밀양아리랑이 더 어울릴 것 같다.
마지막으로 사족 하나. 진도아리랑에서 이런 가사도 찾아볼 수 있다. “만경창파에 두둥둥 뜬 배 어기여차 어야디여라 노를 저어라. 노다 가세 놀다나 가세 저 달이 떴다 지도록 놀다 가세.”
섬사람답게 사는 게 고달플수록 바다에 띄워 놓은 배에서 한 잔 두 잔 술을 기울이면서 달이 지도록 놀고 싶은 마음을 노래한 것이다. 어스름 달빛이 쏟아지는 한 폭의 그림을 떠오르게 한다. 그래서 그런지 진도아리랑은 혼자 부를 때는 신세 타령조의 슬픈 가락이지만 여럿이 부를 때에는 빠르고 흥겨운 노래가 되면서 동질감과 일체감을 조성한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가족이나 친구들과 한잔 마시면서 밀양아리랑을 부르다 식상하면 이 대목의 진도아리랑도 부름직하지 않은가.
또 하나 필자가 좋아하는 노래가 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 늙어지면 못 노나니 ” 우리 인생에서 가장 젊은 지금 놀아야 잘 놀 수 있다. 여행은 가슴 떨릴 때 하는 일이지 다리 떨릴 때 하는 일이 아니라는 말처럼 노는 것 역시 가슴 떨릴 때 놀아야 잘 놀 수 있다. “얼씨구 절씨구 차차차 아니 노지는 못하리라 차차차 !”
최성환 한화생명 보험연구소장 겸 은퇴연구소장 · 고려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