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슬기 하시 대표는 스물두 살(2005년)에 외식업을 시작해 중견 외식업체(이자카야 ‘하시’, 족발전문점 ‘오목집’, 고깃집 ‘이층집’)를 이끌어 가고 있다.
- 김슬기 하시 대표는 스물두 살(2005년)에 외식업을 시작해 중견 외식업체(이자카야 ‘하시’, 족발전문점 ‘오목집’, 고깃집 ‘이층집’)를 이끌어 가고 있다.

‘스물두 살’

이 나이에 무얼 했었는지 여러분은 기억이 나시나요?

‘대학교 2학년, 군대, 재수학원, 사회 초년병’

필자는 새로 들어온 88학번 새내기들의 군기를 잡는다고 막걸리집과 생맥줏집을 맴돌았던 기억이 난다. 군대에서 휴가 나온 선배를 붙잡고 어떻게 해야 편한 보직을 받을 수 있는지 쓸데없는 질문을 던졌고,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군사정권에 대한 무한 증오로 똘똘 뭉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논쟁으로 시간을 보냈다.

얼마 전 뒤통수를 망치로 얻어맞는 듯한 충격이 있었다. 둔기로 타격을 당해본 적이 없으니 그 고통이 어느 즈음에 해당하는지 정확한 측정은 불가하지만 자신은 엄두도 못 낼 경험을 한 자(者)와 맞닥뜨렸을 때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이기에 나도 차용(借用)하고자 한다.

단골로 다니던 청담동 뒷골목의 이자카야(선술집) 하시의 대표가 서른한 살이랬다. 하시는 청담동에서도 물 좋기로 유명한 명소로, 쭉쭉빵빵한 선남선녀가 아니라 의사, 변호사, 디자이너, 카피라이터 등 전문직 종사자들이 바글바글댄다. 김슬기 하시 대표는 스물두 살(2005년)에 외식업을 시작해 올해 9년째 중견 외식업체(이자카야 ‘하시’, 족발전문점 ‘오목집’, 고깃집 ‘이층집’)를 이끌어 가고 있다.

“반갑습니다. 김유진입니다.” 무림의 고수처럼 기계적이고 날렵하게 명함을 내밀었다.

“네네. 제가 명함을….”

명함 교환을 예상하지 못했던지 한참을 이 주머니 저 주머니를 뒤적거리다 위급할 때에는 표창으로 써도 좋을 만큼 각지고 단단한 명함을 꺼냈다. 옷차림이며 헤어스타일이 ‘기생오라비’ 같지 않아 마음에 든다. 강남에서 레스토랑을 한다는 친구들 거개(擧皆)는 뻔지르르하게 빼입고 다니는 게 보통이다. 제대하고 이제 막 도서관에 나오기 시작한, 착한 복학생 같은 인상과 패션이다. 완벽에 가까운 표준어를 구사하지만 목적어와 접미어에선 착한 전북 사투리(정확히는 전주)가 간간이 느껴진다.

영웅으로 추앙받는 이들의 공통된 특징 중 하나가 출생 후 버려지거나 일찍이 아버님을 여의고 홀어머니를 모시는 어린 가장이 되거나 하는 것인데 김 대표는 후자에 해당된다. 그나마 가장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기 전에도 전국에 뿔뿔이 흩어져 사는 이산가족의 일원이었으니 성공 스토리의 주인공으로서 충분한 자격을 가지고 있다 하겠다.

그는 대학을 중퇴하기로 결심한다. 여타의 설명을 생략한 이유는 어린 가장과 중퇴라는 단어만으로도 그 부담감을 충분히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왜 이자카야였을까? 일반인이라면 범접하기 어려운 요리주점 아닌가! 직접 물은 적은 없으나 초기의 주주 구성을 보면 대충 추측이 가능해진다.

‘아버지처럼 대해주시던 이모부’라고 묘사하는 분이 2000만원, 어머니가 1000만원, 알바로 모아놓은 1000만원, 그리고 친한 선배이자 일식 조리사인 동업자가 1000만원.

그에게는 든든한 조력자가 있었다. “지금도 요리 하나만큼은 대한민국 최고라고 자신합니다”라는 담대한 발언이 가능한 것도 예의 동업자 형 덕분이리라. 지금이야 논현동 먹자골목이 번화하지만 8~9년 전만 해도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김 대표는 그중에서도 열악한 주택가 골목으로 비집고 들어갔고 손님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곳에 둥지를 튼다.

처음엔 그랬다. 하루에 한두 테이블 들어오는 날이 허다했고 아예 매출이 ‘0원’인 날도 있었다. 임대료를 내고 달랑 한 명뿐인 직원 월급을 주기 위해 낮 시간에는 다른 매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했다. 당시가 가장 힘들었지만 그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디고 버텨낸 덕에 지금의 성(城)을 지을 수 있었다고 다부지게 말을 맺는다.

지나가던 주민들이 괜찮겠냐고 물어왔다. 임차료는 내겠느냐? 어제는 몇 명이나 왔다 갔냐? 가게에서 자면 춥지 않냐? 번갈아가며 묻고 걱정해주었다. 그래서 오신 손님들에게 지극정성을 다했다. 김 대표는 물론이고 동업자 겸 선배인 주방장 그리고 막내 홀 직원까지 손님에게 맨투맨으로 서비스를 제공했다. 주인이 진심을 담아 접객(接客)하면 양질의 손님이 모이기 마련이다.


강남 최고의 이자카야로 입소문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다. 극진한 대접을 받고 돌아선 손님들은 단골이 되어 찾아왔다. 다시 들렀을 때는 일행이 늘어 있었고 또 그렇게 단골이 더 늘어 갔다. 곡능유성(曲能有誠)이면 감천이다. 하나에 집중하고 몰두하면 하늘도 탄복하는 법. 때마침 근처에 연예기획사들이 하나둘 입주했다.

유명 연예인들이 드나들며 삽시간에 논현동 아니 강남 최고의 이자카야라는 타이틀을 갖게 된다. 당시 드나들던 손님들은 스물두 살짜리 대표가 애쓰는 게 안타깝고 대견스러웠단다. 그렇지 않겠는가? 손님에서 단골이 되어준 것만도 감사한데, 급기야 호형호제(呼兄呼弟)하는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영화 쪽 인사들도 만나게 되었고 김 대표의 서비스에 감탄한 선배들은 앞을 다투어 도울 일이 없느냐고 물어왔다. 마침 2호점을 준비 중이던 그는 과감한 결단을 내린다. 영화 미술감독에게 인테리어 디자인을 의뢰한다. 마치 세트장을 방불케 하는 그의 매장은 삽시간에 소문이 났고 1호점과는 비교할 수 없이 빠른 속도로 자리를 잡아갔다.

이렇게 시작된 그의 직영점 퍼레이드는 논현, 청담에 이어 학동 3호점까지 연전연승. 각 점포의 1일 매출이 1000만원을 넘기기 시작했다. 돈이 돈 같지 않아 보였고, 어깨가 귀에 걸릴 정도로 으스대며 다녔다고 한다. 눈에 뵈는 게 없고 건드리면 다 대박이 나는 줄 알고 다른 사업에 관심을 가졌다. 해이(解弛)해진 그를 다잡아 세운 건 다름 아닌 초창기 단골손님들이었다.

그를 쭉 지켜봤던 ‘형님’들은 딴전 피우지 말라 충고했고, 가게에 집중하지 않으면 다시 보지 않겠노라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덕분에 다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4호점을 낼까 망설이던 중 대한민국 이자카야 업계가 위기를 맞는다.


1. 이자카야 하시의 안주요리2, 3. 오목집의 대표 메뉴인 족발과 해물나베
1. 이자카야 하시의 안주요리
2, 3. 오목집의 대표 메뉴인 족발과 해물나베

최고의 족발맛 찾기 위해 전국 투어

김슬기 대표와 같은 1세대 이자카야 오너들은 안주를 요리라고 생각하기에 주방에 많은 힘을 실었지만 우후죽순처럼 생긴 프랜차이즈 업소들은 달랐다. 동일한 도매업체나 수산물 임가공업체 그리고 몇몇 수입업체들로부터 반(半)가공 상태의 재료를 받아 편하게 사업을 확장해갔다. 어디를 가나 맛이 똑같으니 변별력이 사라지고 정성이라는 것은 찾아볼 수 없게 된다.

소비자는 바보지만 매서운 배신자이기도 하다. 결국 고객들이 발걸음을 끊었고 이자카야 열풍은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이런 위기를 겪으며 이자카야의 한계를 발견했다. 그래서 네 번째 매장이자 두 번째 아이템으로 족발을 구상한다. 아무래도 족발은 저녁 장사이니 점심을 강화한 콘셉트로 접근하였다. 그렇게 탄생한 게 목동의 족발전문점 ‘오목집’이다.

이자카야와는 판이한 아이템인데 김 대표의 전략은 다시 한 번 보기 좋게 들어맞는다. 오픈 후 딱 석 달 헤맨 걸 제외하고는 4연타석 홈런이다. 방송국 관계자들은 물론 인근 샐러리맨들까지 마술피리에 꾐을 당한 착한 쥐들 마냥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자리를 채웠다.

목동은 정말이지 만만치 않은 상권이다. 다른 지역에 비해 목동 고객들의 입맛은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그 격전지에서 당당히 족발의 1인자로 살아남았다.

‘온족발’이 일등공신임에 틀림없다. 왜 굳이 ‘온’ 이라는 수식어를 붙였을까? 지금이야 ‘오목집 스타일’로 불리며 확고히 자리 잡았지만 사실 일반 소비자들에게는 낯선 메뉴였다. 따뜻한 온기를 머금고 있어서인지 살이 야리야리 부들부들하다. 이제껏 먹어 온 그것들과는 온도, 식감, 차원이 완전히 달랐다.

이 대단한 족발의 개발과정을 듣고 있노라면 소름이 끼친다. 김 대표는 이자카야의 성장 한계를 간파한 뒤 전국을 뒤진다.

새로운 아이템을 찾기 위한 여정의 시작이다. 결국은 한식인데, 그중에서도 가장 생명력이 강한 녀석을 찾고 찾다 족발에 시선이 꽂힌다. 대표인 본인을 포함해 7~8년을 형제처럼 지내 온 스텝들과 위장취업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본격적인 현장 실습에 뛰어든다. 대여섯 개의 점포에 각각 취업했다. 주방은 물론 홀 직원으로서 짧게는 6개월, 길게는 1년 가까이 족발에 관련된 거의 모든 시스템을 공부했다.

저녁이면 모여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인기업소의 비결과 비법을 공유했다. 맛을 잡기 위한 테스트용으로 수천 마리의 돼지족(足)을 버렸지만 아까워하지 않았다. 단 한 가지만 부족해도 손님들은 외면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만들고 시식하고 아니다 싶으면 버렸다. 김 대표는 버리는 데 과감하다. 실패를 거듭할수록 완성에 가까워진다는 믿음이 그를 안심시켰다. 연구하고 배워가는 과정이 하도 신이 나 힘들 틈도 없었단다.

대단한 작품을 만들어보겠노라는 그들의 치밀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주류 매출을 높이기 위해 ‘술을 부르는 안주’ 개발에 착수한다. 소주와 폭탄주에 어울릴만한 든든하면서도 개운하고, 기왕이면 목젖을 따꼼거리게 만들어 줄 ‘한 방’이 필요했다.

이렇게 탄생한 작품이 ‘해물나베’다. 싱싱한 채소와 어우러진 게, 홍합, 모시, 바지락, 대합 국물이 주당들의 엉덩이를 들썩이게 만들었다. 90%가 넘는 족발집들이 대충 끓인 멀건 콩나물국을 내주는 데 비해 공짜로 서비스가 되는 오목집의 해물나베는 그 충격파가 정말 크다. 새로 생긴 족발집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흘겨봤던 행인들이 스스로 몰려와 손님이 되었다. 따뜻한 족발과 해물나베에 감동한 고객들은 저녁시간은 물론이고 점심 때에도 문턱을 넘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한우를 넣고 끓인 된장전골을 주문하면 수제 돈가스를 무제한으로 준다는데 안 가면 바보다. 아무리 무한리필이라지만 자꾸 시키면 미안해지는 법. 하지만 오목집에서는 7접시라는 돈가스 최고 기록을 깨 줄 손님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빠른 기간에 족발집이 자리를 잡자 김 대표는 3년이나 애지중지 간직하고 있던 아이템을 꺼내 놓았다. 그런데 특이한 건 메뉴가 아니라 인테리어였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외식업계를 흔들어대고 있는 이 젊고 당돌한 대표는 인테리어가 성공의 절반이라 생각한다. 평당 인테리어 비용이 평균보다 2배 가까이 상회하는 이유도, 공사 기간이 서너 배 더 걸리는 이유도, 영화 미술감독을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참여시키는 이유도 다 여기에 있다. 이런 까닭에 전국 구석구석을 훑는다.


1. 김슬기 대표는 레스토랑의 인테리어가 성공의 절반이라 생각한다. 평당 인테리어 비용이 평균보다 2배 가까이 상회한다. 사진은 이자카야 하시 청담점.2. 김 대표는 살이 야리야리 부들부들한 족발로 까다로운 목동 고객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사진은 족발전문점 오목집.
1. 김슬기 대표는 레스토랑의 인테리어가 성공의 절반이라 생각한다. 평당 인테리어 비용이 평균보다 2배 가까이 상회한다. 사진은 이자카야 하시 청담점.
2. 김 대표는 살이 야리야리 부들부들한 족발로 까다로운 목동 고객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사진은 족발전문점 오목집.



고객 감동 위한 직원 서비스 직접 교육

여정 중 부산 자갈치시장 옆 곱창골목에서 탄성을 지르는 일이 발생한다. 스탠드바 형식의 아주 특별한 공간 연출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래 이거야! 70~80년대 어느 어스름한 저녁에서 시간이 멈춰버린 선술집이 그에게 손짓을 했다. 참을 수 없는 유혹이다. 아이디어를 디자이너에게 설명하고 디자인을 받고 3D 모델로 체크하고 머릿속의 기물(器物)들을 실제로 제작해봤다. 애초에 그렸던 전형(典型)을 조립하고 해체하고 다시 조립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인테리어라기보다는 설치예술이나 드라마의 세트 같은 느낌이 난다. 처음 온 손님도 늘 다니던 집이라 착각하게 만드는 전략도 곳곳에 숨어 있다. 또 먹혀들었다.

고깃집들의 공동묘지라고 불리던 교대역 뒷골목에 사람들이 모여들더니 불과 3개월 만에 예약 없이는 갈 수 없는 고깃집, ‘이층집’이 탄생했다. 이 정도에 만족할 김 대표가 아니다. 이자카야 하시 3곳과 목동 오목집에서 능력이 가장 뛰어난 실장이나 점장을 이층집으로 불러들인다. 서비스가 어색해서는 고객들의 동감을 끌어내고 감동을 주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해서 제대로 훈련된 그의 친위대를 매장에 배치했다.

특이하게도 이층집에서는 쌈 채소를 내지 않는다. 대신 고기와 환상적인 궁합을 만들어내는  명이장아찌와 순태젓갈, 갓김치, 씻은 묵은지, 고추절임을 당당히 펼쳐놓는다. 큼직한 통고기를 올려 스테이크처럼 굽고 자른 뒤 손님들에게 일일이 설명을 한다. 첫 점은 소금에, 두 번째는 명이에, 세 번째는 묵은지에, 네 번째는 갓김치에, 다섯 번째는 고추절임과 먹으라고. 그래서 왜 쌈을 안 주냐는 원망 따위는 들을 일이 없다. 아차, 하마터면 파절이 이야기를 지나칠 뻔 했다. 점심 장사가 끝나고 나면 직원들이 하나 둘 홀 한 편으로 모여든다. 대(竹)소쿠리에 가득 담긴 대파를 채썰기 위함인데 기계를 쓰지 않는 것이 의아해 물었다. 답이 걸작이었다.

“힘이야 들죠. 그런데 기계로 자르면 물이 질질 흐르고 또 파의 알싸한 향이 사라지더라고요.”

다른 집 같았으면 직원들이 반발했을 테지만 오히려 즐기는 분위기다.

“저희 모두 같이 개발한 메뉴예요. 이 방법이 제일 맛있다는 걸 알고 있고 동의했는데 기계를 쓰면 안 되죠.”

이런 고객에 대한 배려 덕분에 눈 깜짝할 사이에 교대 앞 최고의 고깃집으로 자리를 잡은 게다. 김 대표는 치밀하고 영리하고 과감하다. 이거다 싶으면 망설이는 법이 없다.

대기업 대표들을 상대로 특강을 할 때도 김슬기 대표 대목에서는 대부분이 자리를 고쳐 앉고 볼펜을 꺼낸다. 한번 생각해보라. 이제 서른을 갓 넘긴 대표가 직원을 위해 매장 계약과 동시에 숙소를 준비하고 남들보다 하루 더 쉬게 해주고 비전을 나눈다. 다 알고 있지만 못하는 기본을, 그는 지킨다. 덕분에 남들은 제대로 된 사람을 못 구해 난리인데 이 집 식구들은 나가라고 애걸복걸을 해도 못들은 체 한다. 매일 매순간 자신들의 미래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들의 대장이 입만 벌리면 하는 소리가 있다.

“함께 만들어 사는 거예요. 저 혼자였다면 벌써 무너지고 포기했을 거예요.”

애써 공을 돌리지만 그가 용장(勇將)이고 덕장(德將)이고 맹장(猛將)이 아니었다면 과연 가능했을까?

지금도 주방장을 형이라고 부르는 김 대표. 그에게 어리다는 수식어는 필요 없다. 대한민국 그 어느 평론가보다 날카롭고, 그 어느 기업의 대표보다 너그럽고, 그 누구보다 대중의 입맛을 꿰뚫을 줄 안다. 그래서 난 그를 감히 ‘장사의 천재’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