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최대의 ‘물수능’이라는 오명(汚名)을 들었던 2015학년도 대학수학능력평가. 주된 원인 중 하나는 바로 영어 과목 난이도 조절의 실패였다. 만점자가 무려 3.37%(1만9564명)나 나오면서 수능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너무나 쉬웠던 영어 문제가 물수능 논란의 주요 원인으로 거론됐다.
이러한 논란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키는 변수가 더해졌다. 지난해 12월25일 정부가 2018학년도 대학입시부터 도입되는 수능 영어를 절대평가로 실시하겠다는 계획을 밝힌 것. 이미 지난해 8월 황우여 교육부장관이 정부세종청사에서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수능 영어를 지금의 상대평가에서 절대평가로 바꾸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고 밝힌 데 이어 구체적인 실행 시점이 발표된 것이다.
절대평가의 핵심은 수험생이 일정 점수만 넘으면 그 수준에 해당하는 등급을 매기는 것이다. 점수 대신 등급만으로 학생들을 나누겠다는 것이다. 1점 차이로도 당락이 엇갈리는 현행 입시체제에서 폭넓은 점수를 한 등급으로 분류하겠다는 매우 파격적인 안이다. 현재 수험생들의 수능성적표에는 등급, 표준점수, 백분위로 표기되지만 절대평가가 실시되는 2018학년도부터는 등급만 표기된다.
절대평가의 구체적인 방식은 논의 중이다. 교육부는 등급의 수를 9등급 혹은 4~5등급으로 한다는 두 가지 안을 두고 고민 중이다. 세부적인 안은 앞으로 수능 개선위원회가 마련하는 중장기 수능 운영방안과 연계해 올 3월경 발표될 것으로 보인다.
9등급·5등급·2~3등급 案 논의 중
일각에서는 등급수가 단 2~3개로 파격적으로 줄어들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절대평가의 효과를 보다 확실하게 거두겠다는 취지에서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지난 1월15일 ‘대학수학능력시험 영어영역 절대평가 도입방안 연구보고서’에서 “교육부가 제안한 9등급이나 4〜5등급 외에 2〜3등급으로 나누는 방안도 검토해야 한다”고 제시한 바 있다. 지난해 10월20일 첫 번째로 열린 ‘수능 영어 절대평가 도입방안 공청회’에서 박찬호 계명대 교수 또한 과목을 ‘합격’과 ‘불합격’으로 나누도록 2개 혹은 3개 등급 정도로만 구분하는 절대평가 방식을 내놓은 바 있다. 여기에 수능만을 이용한 변별력 부족은 고교 내신 성적으로 혼용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획기적인 방안이지만, 그만큼 부작용에 대한 걱정과 우려는 높아지고 있다.
교육부는 절대평가 방식이 사교육 시장을 크게 줄일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또한 절대평가로 등급을 단순화하면 현재 불과 1점차로 등급이 엇갈려 대학 당락 여부까지 바뀌게 되는 일도 없어질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교육계와 학부형, 그리고 학생들의 의견은 정부의 바람과는 전혀 달랐다. 사교육 시장이 줄기는커녕 다른 쪽으로 쏠리게 될 것이라는 목소리가 대부분이었다. 취재 중 만난 대다수 사람들이 수능 절대평가 방식에 대해 강도 높게 비판하는 의견을 들려줬다. 절대평가 방식을 적용받게 되는 중학교 3학년 아들을 둔 한 학부형의 말이다.
“영어 사교육 시장은 대학 입시 제도가 달라진다고 줄어들 수 있는 차원이 아니라고 본다. 이미 영어는 한국어만큼이나 사회생활의 기본적인 능력으로 자리 잡고 있는데, 정부 정책은 시대를 역행하고 있는 것 같다. 아이들이 좋은 대학을 가려는 것은 결국 좋은 직장을 가기 위한 것 아닌가. 그런데 그 좋은 직장에서는 영어 능력이 필수인데, 그럼 대학에 들어가고 난 이후에 영어 공부를 하라는 것인가. 절대평가로 바뀐다고 해도 영어 교육을 소홀히 할 학부형은 많지 않을 것이다.”

취직·대학원 진학 위해 영어는 필수
비교적 최근 수학능력시험을 치른 경험이 있는 대학생들도 대부분 비판적이었다. 연세대 행정학과 재학생 J씨(23)의 말이다. “절대평가를 해서 변별력을 낮추면 대학들은 논술이나 내신 비율, 혹은 비교과 영역을 높여 결국 나름의 변별력을 찾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사교육 시장은 국어나 수학 등 다른 과목으로 옮겨가게 될 것이다. 또한 상위권 대학에 가려면 과도한 경쟁은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독일 같은 유럽 국가들은 정말 공부하고 싶은 애들이 대학을 가기 때문에 대학진학률 자체가 낮고 무한경쟁이란 말이 없는 것이지 한국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다. 중위권 학생한테는 일부 이득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대학입시만을 놓고 생각하는 단기적인 이득이라고 본다.”
취지는 좋지만 실효성은 의문이라는 데에는 대부분 공통된 입장을 보였다. 사교육 시장이 줄어들기보다는 다른 과목으로 옮겨갈 것이라는 의견과 함께, 동시에 영어 사교육이 크게 줄지 않을 것이라는 목소리도 많았다.
일산 지역에서 영어 학원을 운영하고 있는 한 원장은 “대학들이 수능 영어에서 떨어지는 변별력을 보완하기 위해 논술고사나 학생부를 통해 검증하려고 할 텐데 학생들은 또다시 그 방식에 맞춰 사교육을 하게 될 것이다. 지금은 어떤 방식이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학생들이나 학부모들이 더 혼란스러워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수능 영어 절대평가가 전반적인 학력 저하로 이어지게 될 것이라는 지적도 높다. 한국영어교육학회 부회장을 지낸 한문섭 한양대 영어교육과 교수는 “영어만 잘한다고 좋은 대학에 갈 수는 없지만 유독 영어에 관심이 많은 이유는 영어 공부는 대학에 무사히 들어갔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오히려 대학에 들어오자마자 전공을 불문하고 대학생들의 최대 관심사는 영어다. 이것은 비단 원서를 읽고 영어전용강좌를 듣기 위해서 뿐 아니라, 대학 졸업 후 취직이나 국내외 대학원 진학을 위해 영어가 필수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 모두가 영어에 사활을 걸고 덤비는 현상은 사실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들이 영어 공부에 전념하는 이유는 막연한 불안감이나 기대감이 아니고 바로 닥쳐온 현실이기 때문이다. 대학생들이 너나할 것 없이 토익 등 각종 영어 점수 올리기에 열을 올리는 것은 각 기업에서 일정한 영어 능력을 갖춘 신입사원을 주로 선발하기 때문이다. 또한 취직한 후에도 일정 직급까지는 계속 영어공부를 해야 기업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우리나라 기업들이 이렇게 영어 능력을 요구하는 것은 영어가 기업의 사활이 걸린 매우 현실적이고 당면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천연자원이 부족하고 내수 시장이 작기 때문에 자연히 수출에 의존해야 한다. 그러한 상황인 만큼 대다수 기업에서 영어 능력은 기업의 생존이 걸린 문제이기도 하다. 한문섭 교수는 “정부의 안이한 생각이 국가 경쟁력에도 위기를 가져오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현 정부 들어서 영어교육 정책을 추진하는 것을 보면 전문가 입장에서는 매우 우려가 된다. 정작 큰 문제는 절대평가로 인해 낮은 수준의 영어실력을 가진 학생들이 대학에 들어가면 그때부터 시작된다. 대학에서는 일정 수준 이상의 영어 능력을 갖춰야만 수업을 따라갈 수 있고, 많은 대학에서 일정 수준의 영어 능력을 갖추어야 졸업할 수 있는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또한 졸업 후 진로를 정할 때 영어 실력은 필수다. 결론적으로 대학입시 때 보류해 놓았던 영어 공부를 대학 가서 더욱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단 고등학교 시절의 영어 사교육은 어느 정도 진정될 수 있지만 결국 대학생이 돼서 다시 사교육 시장을 기웃거리게 되는 셈이다. 이것은 사교육을 진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미루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학생들은 더욱 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영어공부를 계속해야 하는 것이다.”
강하영 강남대성학원 영어과 학과장은 “올해 수능 결과로 만일 9등급이 실시될 것으로 가정하면, 90점 이상에 해당하는 학생들인 15% 정도가 1등급을 받게 된다고 볼 수 있다. 즉 50만명 중 7만5000명이 1등급을 받는 것인데 그렇다면 서울 소재 대학의 학생들 모두가 영어 1등급이 되는 셈이다. 변별력이 전혀 없어진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실용영어 위한 또 다른 사교육 시장 생길 것
정부는 영어 절대평가를 실시함으로 인해, 실용영어 중심의 고등학교 영어 교육이 실시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하지만 이 또한 현실과는 엄청난 거리가 있다는 지적이다. 강하영 학과장은 “현재의 학습방식과 교과목은 그대로 두고 실용영어로 바꾸라고 하면 기존의 고등학교에서 이를 제대로 시행할 수 있는 곳이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실용영어를 위한 또 다른 사교육이 생겨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국 단기적으로 보면 사교육이 줄어드는 효과는 있겠지만 장기적으로는 또 다른 사교육 시장이 만들어지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동덕여대 아동가족학과 재학생 S씨(23)는 “중요한 것은 교사, 학습, 과정인데 이에 대한 대안은 내놓지 않고 평가기준을 바꿀 테니 알아서 바꾸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솔직히 중고등학교에 당장 말하기·쓰기 수업을 진행할 역량이 되는 선생님들이 얼마나 있을지도 의문”이라고 말했다.
더 나아가 영어 절대평가로 인한 가장 큰 부작용은 이것이 결국 국가 경쟁력에도 악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한문섭 교수는 “대한민국 영어교육 정책은 시대를 거꾸로 흘러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은 지난 20여년간 내수 시장이 활성화돼 해외에 눈을 돌리지 않는 정책을 써왔다. 최근 일본은 그런데도 국내 사정이 좋아지지 않자, 국제경쟁력 강화·세계화라는 슬로건을 정부에서 제시하고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물론 이 정책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뒤늦은 영어 교육정책이다. 우리가 지난 20년 동안 해왔던 정책을 일본은 이제야 시작하려는 것이다. 요즈음 영어 교육 분야에서 일본은 우리나라를 부지런히 벤치마킹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이제 반석 위에 올라섰으니 조금 쉬었다 가려 하고 있다. 이대로 가면 머잖아 우리는 다시 일본에 추월당하고 세계화에 뒤처지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영어라는 것은 비단 대학에 가기 위한 수단일 뿐 아니라, 계속해서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노력해야 하는 분야다.”
조성아 기자(jsa@chosun.com)/양지윤 인턴기자·연세대 신문방송학과 3학년(yjy9398@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