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묵었던 호텔 부근의 경비가 삼엄한 이유가 바로 주변에 미국대사관을 비롯한 이탈리아, 독일, 영국 등 각국 대사관이 밀집해 있기 때문임을 이튿날 알게 되었다. 수개월 전 사우디아라비아 한 부호가 이 호텔을 구입해 그랜드 하얏트(Grand Hyatt)에서 그랜드 나일 타워(Grand Nile Tower)로 개명하고 호텔 내에서 음주판매를 일절 금하게 했다. 그 결과 이 호텔에는 투숙객이 동급의 다른 호텔에 비해 줄어들게 되었으며 여기에 최근 이집트 정정(政情) 불안에 따른 사회혼란으로 카이로를 찾는 관광객이 대폭 줄어든 탓에 호텔 안이 적막할 정도로 텅 빈 상태가 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아침 조식 뷔페식당에도 식사 손님이 우리와 몇몇 서양인 투숙객이 눈에 띌 뿐이었다. 그렇지만 조식에 나온 망고주스를 비롯한 과일주스와 빵 맛은 식욕을 채워주기에 충분했다.
식사 후 체크인하고 8시30분 호텔을 출발해 기자의 피라미드 지구로 향했다. 카이로에서의 가이드는 한국 출신으로 정했다.
이집트인과 결혼해 꽤 오래 카이로에서 살고 있는 중년여성으로, 이집트 정정 불안으로 한국 관광객이 끊어져 여행사들이 개점 휴업상태라고 걱정이었다. 피라미드로 가는 길은 잘 닦여 있었다. 가도 가도 발밑에는 황사뿐이다. 때로 옆으로 낙타 몇 마리가 지나갔다. 그렇게 길을 따라 40여분을 가니 어느새 피라미드가 웅장한 모습을 드러낸다.
큰 피라미드가 세 개, 작은 피라미드가 몇 개 있었고 인면수신(人面獸身)의 스핑크스도 눈에 들어왔다. 사방이 온통 황갈색 모래 빛이다. 오늘 공기가 청명하지 않아 선명한 모습의 피라미드 형상은 볼 수 없었으나 어떻든 숱하게 사진이나 영상으로 봐왔고 또한 와보고자 별렀던 피라미드 앞에 서니 흥분과 열정이 솟는 것은 어쩔 수 없었으리라.
그중 가장 크고 오래된 쿠푸왕의 피라미드를 마주하고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어 곧장 쿠푸왕의 관이 안치되어 있었다는 내부의 석실로 들어갔다. 20여 분간을 안쪽으로 기어오르다시피 하여 내부의 위쪽, 관람객에게 공개된 지점까지 다다랐다. 쏟아지는 땀을 닦으면서 잠시 상념에 잠긴다.
쿠푸왕의 관 바라보며 상념에 잠겨
이곳이 과연 파라오 쿠푸왕의 무덤 속이란 말인가. 거대한 피라미드 그 현장에 서니 그 동안 피라미드에 관하여 품어왔던 의문이 꼬리를 잇는다.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있던 피라미드의 상식이 실은 현대인의 지적 오만은 아닌가? 인류는 지금까지 이집트 문명이 어떻게 쇠락했는지는 이해할 수 있으나 도대체 어떻게 그 문명이 건설되었는지는 전혀 모른다.
고고학자들은 이 피라미드 유적이 기원 전 2500년 전인 이집트 고(古)왕국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단정한다. 저명한 기술자들이 직접 답사하면서 측량한 결과, 현대의 최신식 기기를 동원할지라도 고대 이집트의 기술 수준에 도달하기가 어려우며 자칫 여러 어려운 문제에 봉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실제 현대의 기술로 이 수평면을 측량해 보니 남동쪽의 모퉁이와 북서쪽 모퉁이의 오차는 불과 20cm이며 방위의 오차는 2~5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4000~5000년 전 이집트인들의 기술 수준은 어느 정도였으며 또 그 국력은 어떠했을까? 역사는 반드시 앞으로만 나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밖에 없다.
현재 우리가 피라미드에 관해 자주 인용하는 최초의 자료는 고대 그리스의 역사학자인 헤로도투스가 이집트를 여행했을 때 기록한 것이다. 얼핏 보면 권위 있는 내용 같지만 실은 그가 이집트를 답사한 것은 기원전 5세기로서 이미 피라미드가 건설된 지 2000년, 아무리 박하게 잡아도 1500년이 훨씬 지난 시점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우리로서는 삼국시대 초기의 일에 관해 기술한 것과 다를 바 없다. 아직까지 우리는 피라미드를 건설한 목적이나 건설과정, 방식에 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다고 한다면 나의 지나친 억측일까? 파라오의 무덤이라고 했는데 누가 그 속에서 파라오 쿠푸왕의 시신인 미라(Mummy)를 본 적이 있는가, 도굴되었다고? 역시 추측일 뿐이다. 오히려 많은 학자들은 피라미드가 각종 건축 수치나 천체 운행의 규칙과 대응하고 있다는 점에서 고대인이 후대 사람들에게 남긴 지적 유산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2. 카이로 고고학박물관 앞에서
사진제공 : 이석연
인류 피라미드에 관한 해독 기회 놓쳐
인류는 피라미드에 관하여 어느 정도 해독할 수 있는 기회를 어리석은 실수로 놓치고 말았다. 그 하나는 기원 전 47년 카이사르가 이집트를 침략했을 때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도서관 장서 70만권을 모두 불태운 사건이다. 불탄 장서 중에는 유명한 <이집트사>도 포함돼 있었다. 두 번째는 기원 후 390년 로마황제가 이교(異敎)를 금지하면서 유일하게 고대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이집트 제사장 계층을 몰아냈다. 이로써 고서와 고대 비문을 해독할 수 있는 사람들의 대가 끊겼다.
그 후 19세기 프랑스의 천재 언어학자 샹폴리옹에 의해 로제타스톤의 상형문자가 해독되어 이집트학의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으나 현장에 남아 있는 상형문자만으로는 피라미드의 열쇠를 푸는 데 역부족이었다. 이집트 문명뿐만 아니라 인류의 위대한 고대 문명사에는 아직 숱한 의문들이 우리의 해독을 기다리고 있다. 피라미드 앞에 서면 늘상 보고 듣던 주입식 지식만 가지고 스스로 인류의 역사를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는 양 이러쿵저러쿵 단정적으로 얘기한다는 것이 얼마나 가소로운 일인가를 깨닫게 된다. 우리가 5000년 고대문명 앞에서 겸손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땀이 흠뻑 젖어 피라미드 밖으로 나왔다. 밖이 오히려 시원했다. 햇빛이 따갑게 비치고 있으나 바람이 불어오는데다 습기가 거의 없어 그렇게 찌는 듯한 더위는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생각보다 다니기가 용이하고 사막의 열풍이 그리 힘겹게 느껴지지 않는다. 왠지 친근하고 오랫동안 가보지 못한 고향마을 옆 동네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어 가운데 있는 쿠푸왕의 차남인 카프라왕의 피라미드와 그 뒤의 손자인 멘카우라왕의 피라미드를 둘러보고 세 개의 피라미드가 모두 잘 보이는 전망대에 가서 사진을 찍으면서 그 장엄함을 다시 체험했다. 흔히 사진으로 볼 때는 세 개의 피라미드 중 가운데 카프라왕의 것이 가장 크게 보이고 있으나 실은 맨 왼쪽 쿠푸왕의 피라미드가 가장 크고 웅장할 뿐만 아니라 먼저 만들어진 것이다.
1시간여에 걸친 3개의 피라미드 관람 후 쿠푸왕의 피라미드와 연결되는 바로 옆의 스핑크스를 찾았다. 스핑크스 앞에 있는 돌기둥 군(群)의 가운데에서 나온 석조상으로 인하여 카프라왕의 이름이 밝혀지고 그의 피라미드도 제 이름을 찾게 된 것이라 한다. 아내가 그 발굴 지점에 1000원권 한국지폐를 던지고 여행과 일상의 행운을 빈다. 카이로 고고학 박물관에는 그 안에서 가장 작은 금상이 하나 있는데 조각난 그 금상을 조립해보니 발 부근에서 쿠푸왕을 뜻하는 상형문자가 발견됨으로써 오늘날의 쿠푸왕 피라미드 신화가 탄생했다고 한다. 가장 큰 건조물의 축조자가 제일 작은 금상의 모습을 남긴 것이 아이러니하다.
이집트 시내로 돌아와 쾌적하고 정돈이 잘된 한 공원 구내의 레스토랑에서 오찬을 하면서 카이로에서의 망중한(忙中閑)을 즐겼다. 식사 후 3시간에 걸쳐 카이로 고고학박물관을 둘러보았다. 피라미드와 더불어 내 카이로 방문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다. 고왕국, 중왕국, 신왕국, 프톨레미우스 왕조, 그리스·로마 시대까지의 이집트의 역사와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세계 최대의 가장 풍부한 유물박물관이다.

투탕카멘 유물 지금 사용해도 좋을 만큼 완성도 높아
내일 탐사할 예정인 룩소르의 왕가의 계곡에 있는 소년왕 투탕카멘 무덤에서 나온 유물 전시관에서 나는 쉽게 걸음을 뗄 수 없었다. 투탕카멘의 통치는 짧았다. 그는 뚜렷한 업적도 남기지 못한 채 기원 전 1352년 열여덟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가 살았던 때는 이집트 역사상 가장 찬란했던 제18왕조 시대였다. 그 왕조의 신비는 1922년 영국의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에 의해서 풀렸다. 20세기 최대의 고고학적 발굴로 평가되는 투탕카멘 왕의 무덤에서 나온 발굴품은 모두 이곳에 전시되어 있다. 투탕카멘의 일상을 쾌적하고 편안하게 하기 위한 온갖 물건들은 지금 사용해도 좋을 것 같다. 석고항아리에 든 향수, 구운 오리고기와 송아지고기(방부처리 됨), 타조깃털 부채, 금세공한 슬리퍼, 목 부분을 둥글게 판 이집트식 롤베개, 체스 비슷한 놀이판, 오락용의 전차부품들…. 5중으로 된 투탕카멘의 관은 석관 속에 포개진 금도금한 네 개의 관(棺)을 하나하나 분리해서 전시하고 있었다. 그 중 맨 안쪽 관의 왕의 미라를 감싸고 있는 황금마스크와 왕의 의자에 새겨진 투탕카멘과 왕비 안케세나멘의 금형초상의 그림은 이미 이집트고대문명을 상징하는 세계인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현장에서 직접 마주하니 그 감동이 가벼운 흥분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박물관에서의 3시간이 짧게 느껴졌다. 박물관 바로 앞 광장, 3년 전(이 글을 쓴 시점인 2013년 기준) 무바라크 철권통치를 끝내게 한 시민혁명의 발상지로 시위대의 집결지였다. 그 옆의 경찰정보국 건물은 무바라크 독재의 상징건물로 찍혀 시위 중 불에 탔는데 아직도 그을린 형상으로 그대로 있어 음산하게 폐허를 연상시키고 있다. 혁명은 지금도 끝나지 않고 있으며 그 후의 집권자들은 전임자보다 오히려 더 무능하고 탐욕적이어서 시민의 열망을 국정에 반영하는 데 무기력함을 보이고 있다.
이 달(2013년 5월) 17일에 대규모 시위가 이곳 혁명광장에서 예정돼 있다고 한다. 시민혁명의 여파로 이집트의 사회불안과 그로 인한 치안부재 현상으로 관광객의 발길이 끊어지면서 경제에 주름살을 더하고 있는 것이다(내가 귀국한 직후인 2013년 6월 카이로에서 또 다시 반정부 시위가 발생하였다. 군부가 개입하여 현직 대통령이 연금 상태로 물러나고 그를 지지하는 세력과 군부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 수백 명이 사망하는 대규모 유혈사태로 발전했다).
이집트의 전통시장 바자르를 둘러본 후 술탄 하산사원, 무하마드 알리사원을 찾았다.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올드 카이로 지구에 있는 고대 이집트 귀족들의 공동묘지인 일명 ‘죽은 자들의 도시’. 나는 그 앞에 차를 멈추고 걸어 들어갔다. 2만명이 넘는 지방에서 올라온 빈민들이 죽은 자와 동거하는 모습은 삶이 곧 죽음으로 가는 길이요, 죽음이 다시 태어나는 삶의 길임을 뼈저리게 느끼게 한다. 기원 전 3000년 전부터 5000년간 인류 문명의 꽃을 피웠던 이집트인들의 역사, 지금 생각하면 삶과 죽음의 반복이 아니었던가.
나일강의 무심한 흐름 속에, 카이로의 해맑게 내려 쬐는 태양 그 하늘 아래에서 문득 정비석의 <산정무한(山情無限)> 마지막 구절이 뇌리에 떠오르면서 내 마음을 달래주는 듯하다.
“고작 칠십 생애에 희로애락을 싣고 각축하다가 한 움큼 부토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라 생각하니 의지할 곳 없는 나그네의 마음은 암연히 수수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