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선 누룽지탕은 이향방 대표의 요리 중 가장 많이 팔린 메뉴다. 끈기 있는 대만 찹쌀로 만들기 위해 대만으로 가 주문제작을 하기도 했다.
- 삼선 누룽지탕은 이향방 대표의 요리 중 가장 많이 팔린 메뉴다. 끈기 있는 대만 찹쌀로 만들기 위해 대만으로 가 주문제작을 하기도 했다.
 


레스토랑 컨설팅 의뢰가 들어오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면접이다. 가능하면 지는 게임을 하고 싶지 않아 귀찮을 정도로 따지고 묻는다. 장사 DNA가 있는지, 스펀지처럼 내 이야기를 빨아들일 준비는 되어있는지 생각한다. 그리고는 책을 뒤지기 시작한다. 외식업의 해답이 책 속에 있는 건 아니지만 코치로서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 나부터 리부팅하는 셈이다. 특히 레시피 관련 책들은 콘셉트와 전략을 짜는 데 아주 많은 도움이 된다. 내공 높은 고수의 책을 만나면 흥이 돋는다.

반면 무늬만 요리연구가인 사람들의 엉성한 그것을 접하면 냅다 던져버리기도 한다. 한식, 일식, 이탈리아 음식 등 흔한 외식업의 성공 가능성은 20%가 안 된다. 신경질이 난다. 우리나라에는 레시피 검증 시스템이라는 것이 없다. 필자가 원고를 넘기면 맞으려니 하고 책을 출판한다. 요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다 경험해 봤을 일이다. 그나마 중식은 이향방 선생의 책들이 있어 안심이다. 올해로 40년째 현역인 그녀는 대한민국 거의 모든 중식 요리사들을 가르쳐 왔다. 또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들이 단골로 드나들던 중식당의 오너로도 유명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중식의 전설, 중화요리의 대가 이향방 선생을 선택했다.

처음부터 요리사였던 건 아니다. 손재주가 있던 그녀는 시집을 가자마자 양장점을 시작했다. 그의 손을 거친 옷들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그도 그럴 것이 변변한 패션 잡지 하나 없던 시절이었다. 화교라서 유리했다. 중국과 홍콩 등의 패션 정보를 얻는 데 누구보다 빨랐다. 자연스레 이름이 알려지자 한국인 패션디자이너 1세대들과 교류가 시작된다. 이 대목에서 그녀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다.

“나 앙드레 김이랑 같이 동대문 평화시장에 천 끊으러 다니던 사람이에요.”


- 이향방 대표는 중화권에서는 한식전도사로 알려져 있다. 중국어로 한식을 알리는 그녀는 방송 출연에도 열심이다.
- 이향방 대표는 중화권에서는 한식전도사로 알려져 있다. 중국어로 한식을 알리는 그녀는 방송 출연에도 열심이다.

전직 대통령들의 단골 중식당으로 유명

승승장구하던 그녀는 돌연 디자인업계에서 발을 뺐다. 본인 몸매는 생각지 않고 ‘뚱뚱하게 보인다’고 불평하는 ‘사모님’들의 옷은 더 이상 만들고 싶지 않아서란다.

그래도 패션계에서의 경험은 큰 자산이 되었다. 국민소득이 조금만 더 오르면 한국여성들도 집 꾸미기에 관심을 갖게 될 것이란 확신이 있었다. 틈 날 때마다 대만으로 건너가 꽃꽂이를 배웠다. 패션디자이너로서도 1세대지만 꽃꽂이 역시 원조 격에 들어간다. 그녀의 작품들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예상이 적중한 것이다. 제자가 되기 위해 작업실 문을 두드리는 이가 기하급수로 늘었다. 그렇게 바쁜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새까매진 손톱을 보며 회의가 들었다. 주위 사람들은 아름답게 만들어주면서 내 몸뚱이 하나 관리 못하는 자신이 미웠다.

모든 걸 탈탈 털고 나이 서른에 자그마한 식당을 하나 개업했다. 짜장면과 짬뽕을 주로 팔던 중국집과는 차원이 다른, 아름다운 ‘요리’를 내는 식당이 콘셉트였다. 미적 감각이라면 자신 있었다. 재료를 해체하고 조합하는 데도 타고났다. ‘국민학교’ 6학년 때 이미 밀가루로 만드는 요리는 끝을 냈단다. 달랑 테이블 4개인 이향방의 레스토랑은 미식가들의 아지트가 되기에 충분했다. 그녀의 팬들 중 가장 충성도가 높았던 이가 바로 주한 대만 대사였던 쉐위쥐 대사였다. 지금도 대사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는다.

“1978년 무렵 대사님을 알게 되었는데 그 분 덕택에 40년을 버틸 수 있었어요. 고객으로서 도와주는 차원을 넘어 제가 요리계에서 우뚝 설 수 있도록 버팀목이 되어준 분이시죠.”

이향방은 기회를 놓치는 법이 없다. 대만 요리계의 인간문화재가 한국을 방문해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로 되어 있었다. 관계자 모두가 호텔 중식당의 셰프들을 추천했지만 쉐위쥐 대사는 물러서지 않고 이향방을 밀었다. 신호탄이었다. 물 만난 고기마냥 방송을 즐겼다. 반응은 뜨거웠다. 요리사는 많았지만 중식을 가르치는 변변한 선생이 없던 시절 그녀는 서태지였고, 소녀시대였다.

이향방을 모셔가기 위해 전국에서 줄을 댔다. 처음 출간한 레시피 북이 베스트셀러가 됐던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소위 ‘청요리’라 불리며 대접받던 중화요리를 대중화시키는 데 이 대표만큼 기여한 사람이 또 있을까? 가만히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엉뚱한 질문 하나가 떠오른다. 본인이 개발한 음식 중 가장 많이 팔린 메뉴는 무엇일까?

“3등은 브로콜리를 두른 닭요리 좌종당계, 2등은 신선로에 서빙한 청경채 동파육, 그리고 1등은 삼선 누룽지탕입니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또 다른 궁금증이 생긴다. 왜 브로콜리와 신선로, 청경채, 누룽지탕에서 유난히 강하게 발음이 되는 걸까?

사연은 이렇다. 좌종당계라는 요리는 13가지 맛이 나야 정상인데 이향방은 하나를 더한다. 바로 브로콜리. 국내에서 처음으로 브로콜리를 요리에 적용한 이가 바로 그녀다. 희한한 재료가 있으면 대만에서 보따리로 들여왔다고 한다. 처음  접하는 색깔과 식감에 좌종당계의 팬은 늘어만 갔다.

다음은 청경채 동파육. 중화권 요리에는 빠지지 않는 청경채도 그녀가 처음 선보인 식재료다. 아예 종자를 들여와 전문 농업인과 계약재배를 했다. 얼마나 인기가 많았던지 청경채 농사를 짓던 농부는 이향방 덕분에 빌딩을 몇 채 샀다는 소문도 들려왔다.

그렇게 애정을 가지고 있던 청경채를 뜨거운 신선로에, 동파육과 함께 손님상에 올렸다. 접시가 아니어서 놀라고, 삼겹살과 청경채의 환상적인 궁합에 한 번 더 놀라고, 마지막은 남은 소스에 두반장을 넣어 ‘썩썩’ 비벼주는 밥에 놀랐다고들 한다. 이 대목을 듣고 있는데 양 볼에 침이 고이고 말았다. 40년 동안 가장 많이 팔렸다는 삼선 누룽지탕 역시 그녀가 최초로 선보인 요리다. 대만 여행 중 접한 누룽지탕의 ‘치이익’ 하는 소리에 마음을 빼앗겨 연구에 몰두했다.

한국에 돌아와 누룽지를 만드는데, 두툼하면서도 바삭한 식감이 도저히 살아나지 않았다. 원인은 쌀에 있었다. 우리의 찹쌀보다 대만의 것이 훨씬 더 끈기가 있어 사각형 모양을 유지하는 데 유리했다. 국내 제조에 실패한 이향방은 다시 대만으로 달려가 주문제작을 계약하고 돌아온다. 이유는 간단하다. 누룽지탕의 생명은 소스에 푹 적셔져 보드라우면서도 쫄깃거리는 누룽지에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녀의 고집은 고객들을 감동시켰고 한 번 맛본 이들은 그 중독을 끊지 못한다. 


(좌) 브로콜리를 두른 닭요리 좌종당계.  (우) 청경채 동파육
(좌) 브로콜리를 두른 닭요리 좌종당계. 
(우) 청경채 동파육



평생 모은 조리서 국립중앙도서관에 기증

이향방의 머릿속에는 3000가지의 레시피가 들어있다. 콕 찌르면 공식이 좌르르 쏟아진다. 그녀는 가장 쉽게 요리를 가르치는 선생님으로도 아주 유명하다. 40년 가까이 제자들이 그를 찾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도 대학 여러 곳에서 이향방을 초빙하기 위해 애를 쓴다. 학생들의 반응이 좋기 때문이다.

그녀는 중식에만 능한 것이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중화권에서는 한식전도사로 알려져 있다. 중국어로 한식을 알리는 그녀는 방송 출연에도 열심이다. 나고 자란 이 한반도에 감사하기에, 중식의 전설이 될 수 있도록 도와준 한국인들에게 작게나마 갚고 싶어 열심히 한식을 알리고 다닌다. 이향방은 평생 세계를 돌며 모아온 자식 같은 조리서들을 서초동 국립중앙도서관에 기증했다. 원하는 누구든 볼 수 있도록 서재를 공용으로 돌린 것이다. 감사할 따름이다.

테이블 4개에서 시작해 향원, 몽, 모리화를 성공시킨 그녀의 마지막 작품은 향방이다. 이름을 내걸었다. 자신의 인생과 모든 경력을 담보했다.

그래서인지 요리들이 부담스럽지 않고 편안하다. 혹여 누룽지탕의 원조를 맛보고 싶다면 논현동으로 가자. 백주 한 잔 기울이며 맛과 추억을 되살리고 싶다면 수화기를 들자. 상상도 할 수 없는 착한 가격으로 대가의 손맛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지척에 있다는 사실이 행복할 따름이다.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노라면 유명했던 광고 카피가 생각난다.

‘프로는 아름답다’
나는 여기에 조금 더 거들고 싶다.
‘프로보다 아름다운 이향방 선생’이라고…. 


김유진
맛칼럼니스트
dioseo@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