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희(63) 디자이너는 ‘퍼스트레이디 룩’으로 이름난 디자이너다. 1980년 패션디자이너로 첫발을 내디딘 그는 대통령부인은 물론 재벌가 인사들의 옷을 만들며 유명세를 얻어왔다. 지난 1993년엔 아시아 패션진흥협회로부터 ‘올해의 아시아 디자이너’로 선정되는 등 대한민국의 대표 디자이너로 명성을 얻어왔다. 평생 옷을 만들며 살아온 그는 몇 년 전부터 ‘희망고 운동’을 펼치고 있다. 아프리카 남수단의 작은 마을 톤즈에 망고나무를 심고 있는 그의 요즘 이야기를 들어봤다.


2009년 난생 처음 간 아프리카 남수단 톤즈. 그곳에서 아이를 안고 길가에 앉아 있는 어린 엄마를 만났습니다. 하루 종일 굶은 엄마의 입에 사탕 하나를 넣어줬습니다. 맛있게 먹던 것도 잠시, 사탕은 엄마 품에 안겨 있던 아이의 입으로 들어갔습니다. 자꾸 아이만 먹여 입에 넣어줬는데 그것마저 아이에게 주던 깡마른 엄마, 그 엄마가 자꾸 아른거렸습니다. 낯선 땅, 처음 본 어린 엄마의 모습에서 어려운 이웃을 위해 평생 헌신하신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이광희 디자이너가 2009년부터 ‘희망고 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였다. 당시 그를 수단으로 이끈 이는 바로 오랜 벗인 탤런트 김혜자씨였다. 월드비전 친선대사로 활동해온 김혜자씨는 이광희 디자이너에게 아프리카 수단에 함께 가보자고 권했다.
망설임 끝에 처음 찾았던 수단은 열악함 그 자체였다. 그가 갔던 톤즈는 남수단 북서부에 위치한 도시로, 우리에게는 이태석 신부가 의료 봉사를 하면서 잘 알려진 곳이다. 2001년부터 내전이 이어지고 있어 가난과 질병이 끊이지 않고 있고, 한센인 환자들의 정착촌이기도 하다.
“아프리카 전문가들조차도 ‘여긴 아프리카도 아닙니다’라고 할 만큼 모든 상황이 열악했습니다. 더구나 제가 갔을 땐 건기(乾期)였기 때문에 그 넓은 땅에 아무 것도 없었어요. 파란색이라고는 없었죠. 사람들이 먹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풀뿌리 하나 없더라구요. 처음엔 그저 구경꾼과 같은 입장에서 ‘여기 내가 두 번 다시는 안 오겠다’ 싶었죠. 하지만 며칠이 지나면서 ‘그래도 내가 힘닿는 한 무엇이라고 해보자’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이광희 디자이너는 아프리카로 떠나면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큰아들이 아르바이트를 해 모은 돈 1200달러를 가지고 갔다.
그는 “아들이 모은 돈을 의미 있게 써주고 싶다는 생각에 아프리카에 그 돈을 가지고 갔었다. 그 돈을 시드머니(seed money)로 해서 무언가 그곳에 일을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하루는 시장을 따라갔는데 시장이니 기념품도 있고 살거리가 있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먹을 거라고는 양파와 망고뿐이더라구요. 그나마 건기에도 먹을 수 있는 건 바로 망고구나 싶었습니다. 저게 바로 생명의 열매라고 생각했죠. 망고는 척박한 아프리카 땅에서도 뿌리를 내리면 100년을 사는 기적의 나무예요. 물과 먹을 것이 부족한 건기에도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에 먹을 수도 있고 땔감으로도 쓰일 수 있는 중요한 자원이 됩니다. 잘 키운 망고나무는 한 가족의 기본적인 생활을 지속할 수 있게 하는 거죠. 저는 어려서부터 늘 부모님한테서 도와주는 건 소모적인 게 아니라는 것을 배웠고, 패션디자이너로서 도네이션 행사를 할 때도 소모적인 도움보다는 작은 거라도 뿌리를 내려 지속적인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을 늘 해왔었어요. 그래서 아들의 돈으로 망고나무 100그루를 사서 심었습니다.”
그것이 ‘희망고(HIMANGO) 운동’의 시작이었다. 한국에 돌아와 사단법인 ‘희망고’를 만든 이광희 디자이너는 이후 지금까지 톤즈 주민들에게 망고 묘목을 직접 심게 하고 농업 교육도 하고 있다.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하는 지속 가능한 나눔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그곳에 심은 망고나무는 어느 새 3만여 그루로 늘어났다. ‘희망고’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희망의 망고나무’를 줄인 말이기도 하고 ‘희망을 울리는 북(鼓·고)’, ‘희망+고(GO)’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 이름은 남편인 홍성태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가 직접 지었다.
그는 “한국에 돌아와서 패션 일을 하면서 워낙 거리도 먼 곳을 돕는다는 것이 쉽진 않았다. 해야 할 이유보다는 안 해야 할 이유가 훨씬 많았다”고 말했다. 그는 어머니를 떠올리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어떻게 이 일을 이어갈 수 있을지 고민이 될 때마다 늘 저를 붙잡아 주시는 분이 어머니였어요. 어머니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셨을 지를 생각했죠. 희망고의 정신 자체가 바로 엄마의 마음입니다.”
이광희 디자이너의 아버지 고(故) 이준묵 목사와 어머니 김수덕 여사는 1953년 ‘해남등대원’을 설립해 50여년 동안 전쟁고아 수천 명을 돌봤다. 고 이준묵 목사는 이 공로로 1999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간호사 출신인 어머니는 남편과 함께 평생을 다른 이들을 돕는 일에 힘썼다.
“단지 망고나무를 심어주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2012년부터 ‘희망고 빌리지’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자립할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었어요. 대부분의 NGO(비정부단체)들이 아이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에 반해 우리는 엄마의 자립심을 키우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농업교육, 재봉교육을 실시하고 남성들에게는 목공, 건축도 가르치고 있어요. 처음에는 우리도 전문 기술이 없다보니 온갖 씨를 다 보내서 싹이 나오는지 한 번 뿌려보라고 했어요. 막연했지만 무작정 시도했던 거죠. 그런데 몇 달이 지나자 수박이 열리고, 오이가 달리고 토마토가 나오기 시작했어요. 그 과정에서 느낀 희열과 감동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제가 그 사진을 김혜자 선생님한테 보여줬더니 ‘정말 대단하다’면서 눈물을 보이시더라구요. 처음에는 여기에서 옷을 다 만들어서 보냈는데, 이제는 그들 스스로 옷을 만들어 입고 있어요. 처음엔 어느 정도 발전할 수 있을지 그 가능성을 가늠할 수가 없었는데 재봉 도구를 나눠주고 시켜보았더니 굉장히 하고 싶어 하고 재미를 느끼더라구요. 그들이 옷 만드는 기술을 배우고 해내는 과정을 보면서 정말 기적 같다고 생각했어요.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모릅니다.”
아프리카를 떠올리며 인터뷰 중 간간이 눈물을 보이기는 했지만, 이광희 디자이너의 마음 깊숙한 곳에는 그보다 큰 희망이 자리 잡고 있는 듯 했다.
“저는 아프리카 사람들이 불쌍하고 안됐다는 생각보다는 그 사람들에게서 가능성을 보았어요. 우린 21세기에 와있지만 그 사람들은 단지 시간이 좀 더 천천히 흘러 우리보다 조금 늦은 시대에 살고 있을 뿐이에요. 먼저 알게 된 우리가 조금 길잡이 역할을 해주면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우리가 일하는 현장에는 눈물이나 비극적인 장면이 없어요. 늘 웃으면서 일하죠. 성금 모금에 도움이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요.(웃음) 제가 아프리카에 갈 때마다 가족들은 걱정을 하기도 하지만, 이 나이에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건 제 복(福)인 것 같아요.”
이광희 디자이너는 인터뷰를 가진 지 이틀 후 또다시 수단으로 떠났다. 이번에는 그곳의 한센병환자촌을 찾아가볼 예정이다. 그는 “사실 그동안은 의료 봉사 쪽으로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어느 날 현지 직원이 나환자들의 사진을 보내 왔어요. 상황이 너무나 열악하다는 것을 알고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가보고 나환자촌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워보려고요”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