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20대 새댁을 대상으로 조사를 해보면, 고부갈등을 크게 느끼지 않는다는 응답이 주를 이룬다고 한다. 시어머니 전화번호를 입력한 후 이름 난에 ‘안받아’라고 적는다니, 젊은 새댁 머리에 시어머니 자리가 없어지면서 자연스레 고부갈등도 엷어지고 있다는 게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 의미심장한 변화가 진행되고 있음은 33쌍의 부부를 심층면접한 후 이들의 흥미진진한 스토리를 담아 2001년 출판한 책 <장남과 그의 아내>에서도 이미 감지되고 있었다. 당시 책의 첫머리엔 제목을 굳이 <장남과 그의 아내>로 붙인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었다. 예전 여성들 사이에선 ‘맏며느리 노릇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어른들 말씀대로 맏며느리는 하늘이 낸다’는 믿음이 암암리에 구전돼 왔건만, 이즈음에 이르러선 맏며느리 스스로 “제 남편이 장남이에요” 당당히 말하는 모습을 보며 신선한 충격을 받은 것이 제목 선정의 이유였다는 것이다.

‘처가의 경제력’이 결혼 조건
“제 남편이 장남이에요”란 말 속엔 그간 여성들의 핵심 역할이었던 며느리 정체성이 눈에 띄게 약화됐음을 반영하고 있음은 물론이요, 한 걸음 더 나아가 ‘장남 노릇 제대로 하려면 맏며느리인 내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함축하고 있다는 해석이 이어졌다.
그러고 보니 며느리들 생각만 빠르게 변화한 것이 아니라, 장래 사위 후보들 의식도 획기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듯하다. 결혼 적령기라 할 30~32세 남성들의 배우자 선택조건을 알아보니 1순위는 단연 ‘연봉’으로 밝혀졌다. 예전엔 맞벌이, 생활력이 강한 여성, 능력 있는 여성 등으로 포장을 했건만 요즘 남성들은 자신의 속내를 굳이 숨기려 하지 않는 것 같다. 다음 2순위로는 ‘착한 여자’가 등장했는데, 알고 보니 마음씨가 고운 여성이란 뜻이 아니라 미모가 뛰어나거나 외모가 훌륭한 여성을 ‘착한 여자’로 칭한다는 게다.
3순위가 압권인데 마침내 ‘처가의 경제력’이 결혼 조건으로 당당히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겉보리 서 말만 있으면 처가살이 안 하겠노라’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이젠 처가 덕 못 보면 모자란 사람 취급을 받는다 한다. 이러니 세월의 변화를 따라잡는데도 현기증이 날 판이다.
처가의 경제력이 결혼 조건으로 부상하고 있는 배경에는 실제 맞벌이 부부 10쌍 중 7쌍가량이 처가나 친정 가까이 살림집을 마련하는 요즘 세태와 무관치 않음은 물론이다. ‘사위는 백년손님’이요, ‘처가와 뒷간은 멀수록 좋다’던 그 시절을 돌아보면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다.
하기야 요즘은 고급 아파트일수록 화장실을 안방에 모시고 있지 않은가. 결국 처가와 친정과의 유대가 강화되고 교환이 빈번해지면서 사위·장모 간 긴장과 충돌도 증가하고 있고, ‘사위 사랑은 장모’라던 덕담을 대신해서 ‘장모님 잔소리 때문에 머리에 쥐가 난다’는 사위들 푸념이 일상화되고 있는 것일게다.
친족간 갈등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문화권에서 예외 없이 발견되는 흥미로운 현상이다. 다만 친족들 사이에서 누가 누구와 갈등을 일으키는지 여부는 친족관계의 특성이 부계제냐 모계제냐 양계제(兩系制)냐에 따라 달라진다.
실제로 한국 가족의 아킬레스건이라 해도 좋을 고부갈등은 전형적으로 부계혈연 중심 친족제도가 발달된 곳에서 나타난다. 고부갈등은 잘 들여다보면 부계중심 친족제도 하에서 ‘각성(各姓)바지’인 여성들이 한 남성을 사이에 두고 시어머니는 아들에 대한 엄마(母)로서의 권리를 주장하고, 며느리는 남편에 대한 아내로서의 권리를 주장할 때 파생되는 현상이다. 이 때 갈등의 원인 제공자인 아들(또는 남편)은 빠지고 여성들끼리 분노와 억울함을 분출하면서 ‘여자는 어쩔 수 없다’는 자괴감에 빠지곤 하는 것이다.
흥미로운 건 모계 친족제도 하에서는 고부갈등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모(母)를 따라 혈통이 계승되는 상황에선 아이를 둘러싸고 생물학적 아버지와 외삼촌 사이에 미묘한 줄다리기가 표출된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미국이나 유럽식의 양계제(兩系制) 하에서는 장모·사위갈등이 가장 빈번한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만화책을 펼쳤는데 벼슬이 시뻘건 닭이 등장해서 누군가를 쪼아대는 장면이 나오는 경우, 이는 예외없이 장모가 사위를 향해 잔소리 해대는 모습을 풍자적으로 묘사한 것이라 한다.
양계제로 바뀌는 친족관계
이제 한국 사회도 부계 친족제도로부터 부계와 모계를 동시에 고려하는 양계제를 향해 친족관계의 지각변동이 진행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럴진대 현재의 과도기에선 부작용 내지 역기능이 만만치 않게 표출되고 있는 듯하다. 인터넷에선 일방적으로 ‘시월드’를 비방하고 비난하는 글이 넘쳐나고 있다. “너는 네 부모 챙기고 나는 내 부모 챙기겠다”는 이기적 주장이 만연하는가 하면, “모두 주면 굶어 죽고, 안 주면 맞아 죽고, 적당히 주면 시달려 죽는다”는 시부모들 푸념도 곳곳에서 들려온다.
가족이란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보다는 무엇을 말해선 안 되는가에 대한 규범이 보다 정교하게 발달한 제도라 한다. 친족관계도 예외는 아니어서 터놓고 의논하기보다는 터부시되는 주제들이 쌓여가고 있는 것 같다. 이제 시부모든 친정부모든 아들, 딸, 사위, 며느리 구분하지 말고, 친족 네트워크를 건강하게 공고히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초고령 사회를 지혜롭게 지나갈 수 있는 길임을 필히 기억할 일이다.
2년 전 싱가포르 국립대학을 방문한 길에 태국인 교수를 만나 물어보았다. “불교국가인 태국에선 명절 때 시댁을 먼저 챙기나요, 친정을 먼저 챙기나요?” 교수 왈 “가족 상황에 따라 실용적으로 대처한다.”
명분만 남은 부계제의 추억에 연연해하기보다 양육과 부양의 중심이 시댁으로부터 친정을 향해 이동해가는 현실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면서, 낯설지만 실용적인 새로운 친족규범을 하나씩 하나씩 만들어가길 희망해 본다.
※ 함인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이화여대 사회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고, 미국 에모리대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가족과 생애주기 그리고 세대 공존을 주제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일상과 예술 속의 커뮤니케이션>(공저) <다양한 가족제도와 미완의 양성평등>(공저) <현대 한국인의 세대 경험과 문화>(공저) <60세 정년연장 의무화법에 대한 근로자 인식과 정책 니즈> <한국 가족연구 50년의 평가와 전망> 등 다수의 논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