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대 이집트인들의 삶의 현장을 보러온 것이지 현재의 이집트를 보러온 것이 아니다.’
이번 이집트 여행에 임하는 나의 기본 입장이었다. 때문에 나는 가능한 이집트의 열악한 현실이나 이집트 국민들의 어두운 면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려 했다. 이집트의 영광과 몰락은 고대 세계의 영욕을 대변하는 것이지 거기에 현대 이집트의 정치상황, 사회현실을 대입(代入)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행의 참뜻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야를 찾아가는 것이라는 평소의 내 지론에 비추어서도 다음의 경험만은 꼭 남기고 싶다.
룩소르 역에서 5월6일(2013년) 오후 6시25분 출발, 아부심벨로 가는 전초기지인 아스완 역에 밤 9시25분 도착하는 열차를 타기 위해 출발 20분 전에 역에 도착했다. 역사(驛舍)는 작고 아담했으나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개찰구를 벗어나 플랫폼에 당도하자 현지 가이드는 그때서야 얻은 정보라면서 열차가 1시간가량 지연된다고 하였다. 그는 아스완으로 가는 자기 친구에게 우리를 좀 도와주라고 부탁했다면서 떠났다. 그 젊은 친구는 자신을 현지 영어관광가이드라면서 기차는 1시간 이상 기다려야 하며 언제 도착할지는 정확히 모른다는 실망 섞인 말을 꺼낸다.
이집트 가이드, 김정은을 한국 대통령으로 착각
그러면서 우리가 한국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한국의 대통령이 누구냐? 어떻게 생겼느냐?” 등을 물었다. 내가 얼마 전 여성 대통령이 처음으로 취임했다고 하니 그는 고개를 저으면서 “젊은 멋쟁이 남성이 아니냐?”고 되물었다. 그제야 나는 저 친구가 북한의 김정은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여 그는 3대째 대를 이어 군림하는 북한(North Korea)의 수장이라고 답해주고 나는 대한민국(South Korea)에서 왔다고 하니 좀 멋쩍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런 해프닝은 당시(2013년) 북한의 핵개발과 전쟁위협 발언 등이 국제사회 이슈로 부각되면서 김정은이 좋든 나쁘든 세계 언론에 크게 부각되는 데 따른 것이 아닌가 추론했다.
현지 여행사를 통해서 내가 산 열차표는 특급열차 1등석 3호차로 좌석이 001, 002였다. 이 친구는 앞쪽 세 번째 차량에 탑승하라고 했다. 당연히 열차 호수를 찾아서 타면 되겠지 하고 한쪽 귀로 흘려들었다. 열차는 1시간이 되어도 오지 않고 언제 온다는 안내방송도 없었다. 안내멘트가 나온다 해도 아랍어로만 하기 때문에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섭씨 35도가 넘는 플랫폼에 대부분 현지인이거나 수단 등 인근 국가 국민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부대끼고 오가면서 나와 아내를 외계인 보듯 쳐다보면서 요상한 표정을 짓기도 하고 무언가 시비를 걸어올 듯한 자세를 취하기도 한다. 5~15세로 보이는 애들이 ‘땟국’이 절절 밴 옷을 걸치고 맨발차림으로 떼 지어 다니면서 우리의 앞에서 “원달러, 원달러”를 외치면서 손을 내민다. 어떤 녀석들은 조금 아는 영어로 수작을 걸어오기도 했다.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 중 외국인은 우리 외엔 눈 씻고 찾아도 없었다. 1시간을 기다려도, 2시간 가까이 기다려도 열차는 오지 않고 간간이 정차하는 열차는 낡고 더럽고 먼지와 흙이 뒤덮이고 차창 밖에는 벌레들이 기어 다니고 있었다. 2시간 정도 기다리자 드디어 아스완행(行) 열차가 도착했다. 설마 내가 타고 갈 열차는 아니겠지 했다. 내가 기대했던 특급열차가 아닌 간간이 정차했던 바로 그 열차였다. 사람들로 북적여 어디가 몇 호차인지도 모르고 출입문으로 들어가는 곳은 막혀버릴 정도로 북새통이었다.

아스완行 열차 안 외국인은 우리뿐
그 인계 받은 친구는 자기 칸을 찾아야 한다면서 우리 보고 앞쪽으로 가라고 하면서 모른 척하고 떠났다. 난감했다. 트렁크도 우리가 직접 들고 움직여야 하고 더욱이 어느 칸을 타야 할지 막막했다. 열차에는 밖이건 안쪽이건 몇 호차 표시가 전혀 없었다. 그제야 앞에서 세 번째 차량이 3호차라는 것을 가이드가 강조한 것을 떠올려 그쪽으로 가려고 하니 각 문 출입구마다 사람들이 뒤엉켜 짐을 끌고 그곳을 빠져나가기도 힘들었다. 겨우 세 번째 칸을 찾아 들어가니 차 안은 벌써 비집고 들어설 틈조차 없다. 통로까지 사람들이 꽉 들어차 앉거나 기대어 있었다. 그런데 웬걸 좌석번호가 적혀 있지 않았다. 빈 좌석도 없었다. 제일 앞쪽의 두 좌석을 가리키고 물으니 그곳에 앉아 있던 젊은 친구 하나가 서투른 영어로 그 좌석이 아니라고 하면서 우리 표를 보면서 옆쪽의 한 좌석씩 있는 앞뒤 두 좌석이라고 한다. 이미 점거하고 있는 두 사람을 몰아내고(?) 좌석을 겨우 확보했다. 그들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자리를 떠나고 있다.
에어컨은커녕 선풍기조차 없어 열차 안은 찜통이다. 퀴퀴하고 비위가 상할 듯한 냄새가 코를 찡그리게 하였다. 차창을 여는 손잡이에는 먼지가 겹겹이 쌓여 무심코 손을 댔다가 숯검정만 묻혔다. 의자와 바닥은 더럽고 벌레가 간간이 기어 다니는 모습도 눈에 띈다. 게다가 출입문 옆이어서 시도 때도 없이 문을 쾅쾅 여닫으며 불량배로 보이는 애들이 떼를 지어 왔다 갔다 하면서 우리를 흘끔 쳐다보고 뜻 모를 웃음을 짓곤 한다. 가방과 소지품에 신경 쓰면서 몸을 뒤로 기대거나 눈을 감고 있지도 못할 긴장된 상태로 3시간 이상을 가야 한다니 끔찍했다.
뒷좌석의 아내는 잔뜩 겁에 질린 상태로 긴장을 풀지 못하고 있었다. 대부분 무임승차하는 현지인들로 보이는 이들이 끊임없이 열차 안을 들락거리면서 큰소리로 떠들고 연신 담배를 피워댄다. 열차 안에도 외국인은 우리밖에 없었다. 열차는 각 역마다 정차하고 안내방송은 없었으며 역표시 사인보드에도 아랍말만 적혀 있고 큰 역 외에는 알파벳 병기가 안 돼 있다. 다행히 내가 내리는 역이 종착역이라 역을 놓칠 염려까지는 안 해도 되었다.
나는 해외여행시에는 열차여행을 즐겨한다. 1주일 넘는 여행에는 유레일패스(유럽)나 JR패스(일본)를 구입해 편안한 좌석에서 느긋함과 사색에 젖으면서 식사를 즐기곤 했다. 이번에도 대부분 관광객들이 많이 이용하는 나일강 크루즈 대신 한 구간만이라도 열차여행을 택했던 것이다. 밤 8시가 넘어 출발했기에 밖은 이미 어두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특급열차 1등석에서 나일강변을 달리면서, 석양빛에 물든 사막의 풍경을 눈요기 삼아 저녁식사를 열차 내에서 하겠다는 꿈같은(?) 생각은 이 냉혹한 현실에 대한 합리화의 한 위안으로 자리 잡은 지 이미 오래였다.
무임승차자들이 1등석까지 점거
식사는커녕 이제 신변의 불안까지 염려할 정도로 비참한 현실이 되었다. 이집트 열차는 완행, 특급의 구분 없이 모든 열차가 그게 그거였다. 1등석, 2등석도 별 의미가 없었다. 무임승차자들이 엄청 많고 그들이 1등석에 들어와 빈 좌석이나 아니면 통로를 점거하면 그만이다. 표 검사하는 승무원 한 명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이집트가 무바라크 장기 독재로 찌들었고 그를 몰아낸 뒤 구관(舊官)이 명관(名官)이라 할 정도로 정치·사회 혼란이 계속되고 있다 하더라도 그리고 소득수준이 후진국에 머물고 있다 하더라도(1인당 GDP 1100달러 정도), 이 정도까지 무질서하고 심각한 상태인지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국민소득 1000달러 미만 나라로 국민들의 행복수준이나 사회질서가 안정적인 나라들이 많지 않은가!
어느 역에서는 30분 넘게 정차하고 있다. 인내의 한계를 실험하고 있는 듯하다. 아울러 열차여행을 아무렇지도 않게 주선한 현지 여행사에 대한 원망이 솟는다. 한편으론 “왜 이런 고생을 하면서까지 아부심벨을 보러 가야 하는가?” 하는 생각에까지 미친다. 이때 갑자기 법정스님이 ‘인도기행’에서 쓴 인도 여행 중 일반칸 열차를 탔다가 화장실 통로에 쪼그리고 앉아 9시간을 밤새워가면서 수행자로서의 참된 인내의 미덕과 영감을 얻었다는 구절이 떠올랐다.
그렇다, 저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저렇게 먼지바닥에 주저앉기도 하고 퀴퀴한 곳에서도 일상을 즐기고 있지 않는가. 똑같은 인간인 내가 이런 걸 견디지 못한다면 어떻게 저들과 같은 인간의 대열에 끼일 수 있단 말인가. 문제는 ‘관념의 차이’에 있다고 법정스님은 자문하고 있다. 관념의 차이에 생각이 미치자 이때부터 불편도 불만도 사라지면서 내 마음도 평온해지려 한다. 우리는 이 관념 때문에, 틀에 박힌 고정관념 때문에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에 맴도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이렇게 마음을 추스르면서 돈으론 살 수 없는 정말 귀중한 체험을 했다고 생각하니 어느덧 평정상태로 되돌아가고 저들 이집트 서민의 일거수일투족이 달리 보였다. 세계 최대의 고대유적지를 끼고 사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과 그들의 심성이 어떻게 일상에 투영되는지를 알게 되는 좋은 기회로 여겨졌다.

무모했던 열차여행 가장 뜻깊은 추억으로 남아
열차는 자정이 다 되어서야 아스완 역에 도착했다. 그러나 마음속의 거리와 시간은 실제 시간보다 훨씬 더 멀고 오래 걸린 것 같았다. 밤새 달려 도착한 것 같았다. 현지인 영어가이드가 오랫동안 기다렸다면서 플랫폼에 나와 있었다. 가이드 역시 열차여행은 자신들도 힘들어 한다고 말한다. 나일강 아스완 지점의 한 섬에 있는 이지스 아일랜드 호텔에 여장(旅裝)을 푸니 밤 12시가 한참 지났다. 현지 여행사가 풍치(風致)가 좋은 리조트형이라면서 추천해서 믿고 간 호텔인데 그저 그런 호텔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어떻든 새벽 3시 반에 출발하는 아부심벨 투어에 참여하기 위해서 2시 반에는 기상해야 하기 때문에 눈을 조금이라도 붙여야 했다. 하지만 열차에서 받은 충격에, 호텔의 조악한 분위기가 겹쳐 거의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날 밤 무모하게 단행된 룩소르에서 아스완에 이르는 열차 여행이야말로 이집트 여행 중 가장 고맙고 뜻있는 체험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생을 유혹했던 내 오랜 여정에서도 두고두고 음미할 만한 사건이었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