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이스트 미래전략대학원 내 미래전략연구센터는 국내 최초의 미래학 연구 및 교육기관이다. 이광형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의 주도 아래 과학적 미래학 연구와 국가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미래전략 수립을 미션으로 삼고 있다. 이곳에서는 국가미래전략 보고서를 주기적으로 내놓고 있으며, 이 내용을 총망라해 <대한민국 국가미래전략 2015>로 펴내기도 했다. 미래를 바라보고 있는 그가 느끼는 대한민국의 오늘은 어떤 모습일까.
— 대한민국의 현재 상황을 어떻게 진단하나.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어느 분야를 보더라도 세계 10위권에 속하는 번영을 누리고 있지만, 과연 이것을 후손들에게 안정적으로 물려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전망은 그다지 낙관적이지 않다. 성장잠재력은 둔화되고 있고 GDP(국내총생산) 성장률은 내리막에 있다. 1인당 국민소득은 2만 달러대에서 10년 가까이 정체 중이다. 경제성장의 주요 동력이었던 주력산업들도 국제경쟁에서 밀리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조선, 제철, 휴대폰, 석유화학산업이 중국의 추격에 발목을 잡힌 상태고 반도체와 자동차도 이익률이 하락하고 있다. 하지만 이를 대체할 새로운 산업이 없다. 10여 년 전부터 신성장동력을 발굴하고 육성해야 한다고 외쳤지만 그때마다 정치권은 단기성과에만 집착하며 장기투자에는 소홀했다. 현재 우리나라의 산업은 선진국과 중국 사이에 포위돼 길을 잃은 처지이다.”
이광형 원장은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한 ‘대한민국의 6대 절대과제’로 △저출산, 고령화 △사회통합, 갈등해결 △평화(통일)와 국제정치 △지속적인 성장과 번영 △지속가능한 민주복지국가 △에너지와 환경문제를 꼽고 있다.
— 국가미래전략 보고서에는 전 분야에 대한 미래비전과 전략이 담겨 있다. 특히 강조하고 싶은 점은 무엇인가.
“저출산 문제를 보자면, 인구 감소는 또 하나의 고통스러운 미래를 예고하고 있다. 출산율은 1.2명 선으로 세계 최저 수준이고, 100년 후 노령인구는 40%를 육박할 것이다. 생산인구 1.5명이 1명의 노인을 부양해야 하는 초고령 사회가 바로 눈앞에 와 있다. 사회의 모든 부분이 체질을 개선해야 하는 ‘다이어트 시대’로 접어드는 것이다. 학생도 줄고 학교도 줄고 식당도 줄고 가게도 줄고, 모든 것이 20% 이상 줄어들 것이다. 소비자인 고객이 감소하기 때문이다. 갈등이 심화되고 성장이 정체된 사회에서 또다시 국가적 체질개선을 해야 하는 고통을 감당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또 우리나라는 사회갈등과 양극화가 특히 심한 사회다. 정신문화가 점점 황폐해지면서 관용과 포용, 나눔과 배려가 점차 사라지고, 이기주의와 집단적 터부, 배타가 앞선다. 사회적 관계의 단절로 자살률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가장 높은 수준이고 반대로 국민행복지수(GNH)는 가장 낮다. 부가 세습돼 신분이동의 길이 차단되면서 젊은이들은 희망을 잃었고 전반적으로 사회가 불안한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는 국민의 능력을 한 곳으로 모으기 어렵다.”
[MESIA(메시아) 산업 육성해야]
이광형 원장은 “우리나라가 지난 40년 동안 이뤄온 성장을 지속·발전시켜야 선진국 반열에 오를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려면 성장을 견인할 신성장동력을 발굴하는 게 급선무다. 앞서 그는 ‘대체 산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 어떤 분야를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삼아야 하는가.
“전 세계적으로 굉장히 큰 산업인데 우리가 그동안 눈을 못 뜬 산업이 있다. 우리는 그걸 메시아(MESIA)라고 부른다. Medical biology(의생물학 산업), Environment(환경산업), Safety(안전산업), Intelligence service(지식 서비스산업), Aerospace(항공우주산업)가 그것이다. 예를 들어 병원에서 쓰는 기계와 소모품이 굉장히 많은데 우리는 100% 가까이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진입장벽이 높지만 그렇다고 포기해선 안 된다. 우리가 지금 잘하는 자동차나 반도체도 30년 전에는 못하던 분야다. 추격형(fast follower) 전략으로 따라잡은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고민할 필요 없이 미국과 일본 등 선진국이 가는 길을 빠르게 따라가면 됐다. 하지만 앞으로는 선도형(first mover) 전략이 필요하다. 이제 스스로 길을 개척해야 하는 것이다. 스스로 미래를 내다보고, 스스로 미래를 만들어가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 미래에 대해 30년을 기준으로 삼은 이유는.
“일반적으로 한 세대를 30년으로 보기 때문이다. 다음 세대에 물려줄 국가를 생각하며 오늘 해야 할 일을 찾자는 것이다. 즉 다음 세대의 입장에서 오늘의 상황을 바라보는 것이다. 미래전략은 미래의 눈으로 현재의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현재의 당리당략적, 정파적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운 민간 지식인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지금부터 30년 후인 2045년은 우리나라가 광복 100주년이 되는 해다. 광복 100주년이 되는 시점에 우린 다음 세대에 어떤 나라를 물려줄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5년 단임제 단기적 현안에만 급급]
— 미래전략은 장기적 관점에서 실행해야 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미래전략이 연장선상에서 논의되기 어려웠는데.
“문제는 국가의 중심에서 난국을 헤쳐 나가고 최상위 의사결정을 해야 할 정치권이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5년 단임제 정권은 단기적 현안에만 급급하다. 여야를 막론하고 국가나 국민보다 당리당략에만 골몰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국정운영의 기조가 바뀌면서, 이전 정권의 업적과 정책은 무시돼왔다. 그야말로 국가정책이 갈지(之)자 행보를 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혁신경제’는 이명박 대통령에 의해 부정됐고, 이명박 대통령의 ‘녹색경제’는 박근혜 대통령에 의해 소외됐다. 현재 박근혜 대통령의 ‘창조경제’가 처한 운명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각 정권마다 장기적인 전략을 추진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은 정권이 바뀌면서 도서관의 서고로 들어가 잠자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한반도 지도를 보고 있으면 우리 선조들의 지혜와 용기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거대한 중국대륙 옆에서 온갖 침략과 시달림을 당하면서도 자주성을 유지하며 문화와 언어를 지켜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만약 북아메리카에 있는 플로리다 반도가 미국에 흡수되지 않고 독립된 국가로 발전하려고 했다면, 과연 가능했을까. 하지만 우리 선조들은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그 비결은 ‘선비정신’이 아니었을까 한다. 정파나 개인의 이해관계를 떠나서 오로지 대의(大義)와 국가, 백성을 위해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린 선비정신 말이다. 선비정신이 있었기에 설사 나라가 그릇된 길을 가더라도 다시 바로잡을 수 있었다. 선비정신이 사라진 조선 말 100년은 망국의 길을 걸었던 과거를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21세기의 우리는 다시 선비정신을 떠올려야 한다.”
이광형 원장과 정문술 전(前) 미래산업 회장(전 카이스트 이사장)의 인연은 빼놓을 수 없다. 카이스트에 바이오및뇌공학과와 미래전략대학원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데는 정문술 전 회장의 도움이 큰 밑거름이 됐다. 그는 2001년 카이스트에 ‘미래 먹거리에 대한 연구를 해 달라’면서 300억원을 기부했고, 2014년 초에는 ‘미래전략을 연구해야 한다’는 당부와 함께 215억을 추가로 기부했다. 정 전 회장은 자신의 재산을 다섯 명의 자식들에게 물려주는 대신 기부를 통해 사회에 환원한 의로운 인물이다. 그가 기부한 515억원은 개인이 대학에 낸 기부금으로는 류근철 한의학 박사(578억원)에 이어 두 번째로, 정 전 회장은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의 ‘2014 아시아·태평양 자선가 48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정문술 前 회장 이광형 원장 믿고 515억원 기부]
정 전 회장은 1983년 반도체장비 제조회사 미래산업을 창업한 ‘벤처창업 1세대’로, 벤처기업 10여개에 투자해 ‘벤처업계의 대부’로 불렸다. 그는 자식들에게 재산을 상속하지 않을 것이라고 일찌감치 공언해 화제가 됐다. 2001년 은퇴하면서 아무 혈연관계가 없는 전문경영인에게 회사를 넘겨주고 물러났다. 그가 기부하면서 내놓았던 “돈과의 싸움에서 이겼다”는 소감 한 마디는 많은 이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 그 큰돈을 이광형 원장을 믿고 써달라고 했을 만큼 신뢰가 두터운데, 두 분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
“아주 우연한 일이었다. 90년쯤이었나, 신문에 조그맣게 난 그 분 기사를 봤다. 중소기업을 운영하고 있는데 회사를 자식한테 물려주지 않고 기술 개발해서 좋은 제품을 만드는 데 쓰겠다, 정도(正道)경영을 한다, 이런 기사였다. 모든 사람들이 자식에게 돈을 주려고 하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그 분에 대해 참 궁금했다. 직접 전화를 해서 뵙고 싶다고 했다. 천안에 있는 회사를 찾아갔는데, 그 분이 반도체 장비를 만드는데 거기에 들어가는 소프트웨어 개발에 우리도 참여하고 싶다고 말했더니 좋다고 하시더라. 그게 첫만남이었다.(웃음)”
— 기부는 어떻게 이어진 건지.
“사회에 돈을 기부하겠다는데 얼마나 많은 연락을 받았겠나. 그때 우리 연구실은 돈이 부족하지도 않았고, 나도 학교 다니면서 장학금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사회에 환원하는 게 빚진 것을 갚는 거라고 생각해왔다. 그렇게 오랫동안 서로의 생각과 뜻을 나누다보니 신뢰가 쌓인 것 같다. 정 회장께서 특히 자식들에게 고마워했다. 자식들 모두가 기부에 찬성했다는 말을 하면서 정말 큰 자부심을 가지셨다. 전셋집에 살고 있으면서 큰돈을 기부할 때 어떻게 고민이 없었겠나. 하지만 ‘부를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나와의 약속을 지켰다’며 만족해했다.”
— 제자들 중 벤처창업가들이 많다. 넥슨 김정주 회장은 연구실에서도 남달랐다고 들었다.
“김정주는 원래 다른 연구실에서 적응하지 못하다가 내 방으로 왔다. 하고 싶은 건 많고 정해진 틀 속에 갇히는 것을 못 견디는 스타일이었다. 머리도 빨갛게 했다가 노랗게 했다가 귀고리도 하고 다니고, 수업시간도 제대로 지키는 적이 없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광형 교수방에 가면 놀 수 있다’고들 했는지 독특한 친구들만 내 방으로 모였다. 사람들이 날더러 어떻게 했기에 벤처사업가들을 많이 길러냈냐고 묻는데, 난 그저 야단치지 않은 거, 방해하지 않은 거, 그거밖에 없다.(웃음) 어린왕자를 쓴 생텍쥐페리가 어린이들에게 배를 만들게 하고 싶으면 바다를 보여주라는 말을 했다. 내가 미국에 건너가 실리콘밸리에 학생들을 가능한 한 연수를 많이 오도록 한 것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오래 전부터 얘기해왔듯이 카이스트 실리콘밸리 캠퍼스를 만드는 것이 내 목표다.”

[“나의 젊은 시절, 미생의 장그래와 같았다”]
선입견이었다. ‘미래학의 전문가’ 그리고 ‘괴짜 교수’라는 타이틀 때문에 이광형 원장의 첫인상은 뭔가 남다를 것이라 예상했다. 그래서 그를 만나기 전 내심 살짝 긴장도 했다. 하지만 그는 매우 친근한 얼굴과 해맑은 웃음으로 기자를 맞이해줬다.
그는 서재에서 TV를 거꾸로 시청한다. “TV를 거꾸로 보면 긍정적인 생각도 부정적으로, 부정적인 생각도 긍정적으로 바뀔 수 있다. 무언가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이 그 이유다. “처음엔 눈도 아팠지만, 지금은 적응돼서 거꾸로 흘러가는 자막도 읽을 수 있게 됐다”며 그는 활짝 웃었다. 이렇듯 항상 ‘남들과는 다르게’를 추구해왔지만, 그는 “오히려 내 자신이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살면서 가능한 한 여러 가지 경험과 시도를 다 해봤을 것 같지만 이 교수는 술, 담배는커녕 커피도 마시지 않는다. 그는 드라마 ‘미생’을 보며 자신의 젊은 날을 투영(投影)했다고 말했다.
“젊은 시절 내 삶이 바로 미생 속 장그래와 같았다. 지난 설날에는 작심하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쉬려고 2일 동안 컴퓨터를 안 켰다. 그때 미생을 보았는데 정말 예전 내 모습 같더라. 처음에 조교부터 사회생활을 시작했는데 술도 못 먹으니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하고 늘 장그래 같았다. 그 드라마 보면서 참 찡했다. 지금 내가 변변하게 할 줄 아는 취미가 없는데 지금이야 그냥 편하게 말하지만 당시엔 열등의식 때문에 그런 말도 못하고 살았었다, 허허.”
그를 만나고 난 뒤 사회를 변하게 하는 것은 ‘수많은 미생(未生)들’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2. 이광형 원장과 정문술 전 미래산업 회장(전 카이스트 이사장)의 인연은 빼놓을 수 없다. 정문술 전 회장은 이광형 원장에 대한 신뢰로 카이스트에 515억원을 기부했다.
(사진 : 조선일보DB)
▒ 이광형 원장은…
1954년생, 1978년 서울대 산업공학과 졸, 1980년 카이스트 대학원 산업공학 석사, 1982년 프랑스 국립 응용과학원 전산학 석사, 1985년 동 과학원 박사, 1988년 리옹제1대학 대학원 박사, 1996~97년 미국 스탠퍼드대 초빙교수, 2001~2004년 카이스트 국제협력처 처장, 2003~2006년 카이스트 바이오및뇌공학과 학과장, 2006~2012년 카이스트 과학영재교육연구원 원장, 2006~2010년 카이스트 교무처 처장, 1985년~현재 카이스트 전산학·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 2014년~현재 카이스트 미래전략대학원 원장, 2014년12월~현재 미래준비위원회 위원장. 1990년 백암기술상, 1999년 국무총리 정보문화상, 1999년 신지식인상, 2004년 프랑스정부 훈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