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사람 어땠어?”
누군가를 인터뷰하고 오면 주변 사람 중에 꼭 이렇게 물어보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질문에 항상 깔끔하게 대답해주지 못했다. 그만큼 누군가를 한 마디로 정의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지난 3월19일 서울 천호동 한 볼링센터에서 전직 리듬체조 국가대표 선수였던 신수지씨(24)를 만나고 온 직후, 예의 그 질문을 또 받았다. 잠깐의 고민 끝에 웬일로 대답이 툭 나왔다. “자기 영역에서 성공하는 법을 아는 사람인 것 같아.”
2011년 리듬체조 선수로 은퇴한 후 4년 만인 지난 3월5일, 신씨가 프로볼러로 데뷔전을 치렀다. 서울 노원구 공릉볼링경기장에서 열린 이날 경기에서 그의 성적은 여자부 79명의 선수 중 57위. 그의 늦은 출발을 생각한다면 결코 낮은 성적은 아닐 것이다. 난생 처음 볼링공을 잡은 지 1년 반. 이 짧은 시간 만에 프로 데뷔가 가능할 정도로 실력이 증가했다는 팩트 뒤엔 그만의 엄청난 노력이 숨겨져 있었다.
정확한 방향 설정, 불타는 목표의식, 그리고 피나는 연습. 신씨에겐 이 같은 ‘성공하는 습관’이 마치 굳은살처럼 온몸에 배어 있었다. 이 정도면 스포츠 선수로서뿐 아니라 어느 방면에 내놓아도 입지를 굳힐 수 있지 않을까. 인터뷰 장소를 떠나면서 ‘이 사람, 성공지침서 같은 거 쓰면 정말 잘 쓰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저만의 단계별 목표설정 노하우가 있죠.”
“제 생각엔 누구라도 노력하면 국가대표 선수는 될 수 있어요.” 폭탄 발언이다. 국대가 어떤 자린데, 누구라도 될 수 있다니.
“아니, 제 말은, 적절한 목표를 세우고 거기 맞는 노력을 하면 최고의 스포츠 천재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히 높은 수준의 스포츠 기량은 달성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거죠.”
그는 그렇게 체조 국가대표로 성장해갔다. 그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보고 매료됐던 리듬체조. 그때는 그저 그런 체조를 하는 사람이고 싶었던 게 그의 꿈이었다. 그렇게 무작정 시작해 학교에서 제일 잘하는 사람이 목표가 됐다. 이 목표를 향해 달리다보니 학교대표가 됐고, 이번엔 전국대회에 입상하는 것이 다음 목표가 됐다. 신씨는 그렇게 차근차근 올라가 베이징 올림픽에까지 출전하게 됐다.
“단계별 목표설정은 이를테면 이런 거예요. 윗몸 일으키기를 1000번 해야 하는데 ‘1000번’이라니. 듣기만 해도 질리잖아요. 몸은 자기 생각대로 가거든요. 생각에서 질려서는 몸이 안 따라주죠. 그래서 목표를 절반으로 줄이고 대신 윗몸일으키기 두 번을 하나로 카운트했죠.결국 하는 건 1000번이지만 마음에 부담이 덜하잖아요.”
체조선수에서 프로볼러로 전향할 때도 그랬다. 그는 “‘체조에서 은퇴했으니 그 다음은 어떤 종목을 해야 잘할까’ 하는 식으로 생각했다면 지금처럼 즐기면서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볼링은 우연히 접하게 됐다. 신씨는 은퇴 후 이제껏 즐기지 못한 자유시간을 만끽하던 중 친구를 따라 볼링장이라는 데를 처음 가 봤다고 했다. 2013년 겨울의 일이다. 첫 성적은 하우스 볼로 60점 정도였다. 워낙 낮은 점수 탓에 친구들은 신씨를 자기 팀에 껴주지 않으려고 했다. 여기에서 그의 승부근성에 불이 붙었다.
이날 이후 그는 매일 볼링장에 출퇴근했다. 오픈할 때 가서 문 닫을 때까지, 30게임은 족히 쳤다고 한다. 180점 정도까지는 그렇게 해서 쑥 올라갔다. 그런데 거기서 더 늘지 않았다.
“그때 지금의 코치님이신 박경신 코치님을 만났죠. 제가 찾아가서 제자로 받아달라고 부탁드렸어요. ‘알았다, 가르쳐주겠지만 너도 목표가 있어야 빨리 늘지 않겠나’면서 이듬해 프로 데뷔를 목표로 하자고 하셨어요.
제가 처음 볼링을 잘못 배워서 잘못된 자세를 다 뜯어고치느라 초반에 많이 힘들었어요. 그때까진 볼을 잡고 볼링이 아닌 체조를 했던 거죠. 성적도 낮아져 슬럼프도 있었지만 6개월 정도 지나니까 자리가 잡히더라고요. 자만할 수 있는 시기였는데, 스승님께서 ‘체조선수치곤 잘하지만 프로치곤 못 한다’고 하시더군요. 이 말이 저를 또 한 번 자극했죠. 결국 10개월 정도 초집중해서 프로볼러로 합격하게 됐어요.“

집중하면 주변 신경 안 써…엽사 찍히기도
“제가 볼링 레일에 올라서 공만 굴리면 눈이 이렇게 돼요. 사진 찍히는 것 신경 안 쓰고 집중하느라…. 그래서 제가 유독 엽사(엽기사진)가 많은 것 같아요.”
아닌 게 아니라 레인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품새는 프로모델 못지않게 자연스러웠지만, 연습을 위해 실제로 공을 굴리자 이내 표정이 싹 바뀌었다. 카메라를 의식하던 웃음은 오간데 없고 높이 치켜 뜬 눈매에 굳은 표정. 그의 몰입력 역시 성공하는 사람의 습관으로 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은퇴한 후 다시 선수가 될 줄은 정말 몰랐어요. 스포츠를 좋아하니까 어려서부터 자유롭게 다양한 종목을 즐겼어요. 야구, 승마, 골프, 스쿼시, 수영, 웨이트 리프팅…. 볼링은 정말 우연히 마주치게 된 종목이죠. 이렇게 끝장까지 보자는 맘으로 하게 될 줄 몰랐어요. 웃자고 시작한 건데 죽자고 하게 된 거죠. 저도 체조 이후로 이렇게 열정을 쏟아 부을 것을 또다시 찾았다는 게 신기할 따름입니다.”
체조와 만나기 전, 그는 기계체조선수였던 아버지, 음악가 집안인 어머니 등 온 가족이 예체능에 능한 분위기에서 자라났다. 덕분에 어릴 때부터 이것저것 원 없이 해볼 수 있는 편이었다고 한다. 본격적으로 체조를 하기 전까진 피아노, 종이접기, 미술, 성악 등 다양한 예체능 교육을 즐기고 있었고, 서예에 꽂혀 살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날 만나게 된 리듬체조는 신세계였다. 당시엔 리듬체조라는 분야가 전혀 앞이 보이지 않는 미개척지였지만, ‘좋으니까’ 몰입했다. 한 단계, 한 단계 성취할 때의 기쁨. 돈이 드는 운동이란 건 알았어도, 그 정도까지 들 거라는 건 처음엔 상상도 할 수 없었으니까, 그냥 매진하면서 조금 앞에 두었던 목표지점까지 오는 데 온 힘을 기울이며 살았던 세월이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목표했던 지점에 도달했을 때 온 몸에 퍼지는 쾌감으로도 힘든 것은 다 잊을 수 있었다.
“마약이라는 게 이런 건가 싶을 때도 있어요. 진짜 그래요. 볼링도 체조와 똑같이 그런 매력이 있어요. 계속 승부욕을 자극하고 몰입하게 만들죠.”
늦게 시작한 리듬체조로 2008년 베이징올림픽 국가대표,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 국가대표가 되기까지 그녀를 이끌었던 것은 적절한 목표였다. 하지만 그 목표를 달성하게 해준 것은 그녀의 집중력과 몰입력이었다.
죽을 때까지 현역으로 남는 게 소원
“작은 소망이라면 부모님 해외여행 보내드리고 싶은 거구요, 최종적으로는 스포테이너로서 지도자가 되고 싶어요.”
신씨는 부모 사랑이 각별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것은 부모님의 사랑이 그만큼 각별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부모님은 그를 ‘기적의 선물’로 여긴다고 한다. 첫 아이인 신수지의 언니를 낳고나서 그의 어머니는 자궁협착증으로 수술을 받아야 했다. 다시는 아이를 낳지 못하게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 건강한 모성을 회복한 후 갖게 된 신씨에 대해 부모의 애정이 남다른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제가 좀 멘탈이 강해요. 멘탈 갑(甲), 멘갑이죠. 뭐든지 좋아서 시작하는 편이어서 처음부터 죽기 살기로 했던 건 아니거든요. 그런데 부모님이 너무 고생하시니까…”
리듬체조 선수로 일취월장(日就月將)하는 딸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부모는 결국 러시아 전지훈련 결단을 내리게 된다. 말이 쉽지 월 3000만원의 돈을 마련해야 하는 코스였다. 집을 팔고도 모자라 신씨의 아버지는 월급으로 부족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밤에는 대리운전까지 했다.
“어느 날 아침 쿵 하는 소리에 현관 문을 열어보니까 아빠가 쓰러져 계시는 거예요. 밤새 운전하시고 너무 지쳐 집 앞에서 의식을 잃으신 거죠.”
그렇게 해서 어린 신씨는 훈련 중에도 시간이 돈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둘째에게만 집중된 집안의 관심이었지만 그의 언니는 이해해줬다. 그는 “오히려 ‘너에게 관심 주느라 날 놔줘서 편했어’라고 하는데 그 말 뒤에 어떤 맘이 있겠어요”라며 온 가족의 희생이 자신을 만들었다는 점을 되새겼다.
“그래도 맘과 몸이 따로 노는 거예요. 훈련하느라 힘들면 엄마한테 짜증만 내게 되죠. 그러고 나면 후회되면서도 막상 엄마를 대하면 또 짜증내고. 지금도 생각하면 죄송해요. 이제부터 남은 시간들은 어떻게 해서든 열심히 벌어 갚아드리고 싶어요.”
이런 가족사랑이 그를 ‘독종’ 소리 듣는 연습 벌레로 만들었다. 혼자 힘으로 따낸 올림픽 티켓에서 체조동작을 시구(始球)와 접목시켜 화제를 부른 ‘일루전 시구’, 은퇴 후 또 다른 종목에서 프로 데뷔…. 그 중 하나만 하더라도 한동안 사회를 뜨겁게 달굴 만한 핫이슈였다. 그 이면에는 연습에 또 연습을 거듭하는 그녀의 노력이 있었던 게 아닐까.
프로볼러로 데뷔한 후에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서너 시간은 연습한다는 그는 방송 일정까지 겹치는 날이면 일정이 없는 다음날 하루 종일 기절한 것처럼 잠만 자기도 한다고 했다.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달리게 할까.
“평생 할 수 있는 일을 찾았기 때문에 안정감 같은 게 있어서 더 몰두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볼링이나 제가 또 좋아하는 운동인 골프는 은퇴연령 크게 신경 안 쓰고 롱런할 수 있는 운동이니까요. 이렇게 뛰는 일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그 기쁨을 여러 분들에게 알리고 함께 하고 싶어요.”
어디든 미개척지에서 앞장 서왔기 때문에 롤모델이 따로 없다는 그. 앞장서는 일은 언제나 힘들지만, 여러 방면 아울러서 그렇게 하는 일은 몇 곱 더 힘들 테다. 프로볼러로서 입지를 다져가면서 방송에서 스포테이너라는 영역을 개척하고, 그러고도 후학(後學)을 가르치는 지도자가 되고 싶다는 그는 욕심쟁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뒤에는, 그녀를 자신들 삶의 축복으로 여기고 모든 것을 주는 든든한 가족의 힘이 있었다.
“저에겐 가정이 정말 중요한가 봐요. 이제 만으로 24살인데, 또래친구들은 결혼 생각을 거의 안 하거든요. 근데 저는 좋은 사람 만나서 따뜻한 가정을 꾸미고 싶어요. 남친요? 없은 지 오래됐어요. 이렇게 운동만 하는데 어떻게 만나겠어요. 하지만 마음에 맞는 사람을 만나면 한 1년 정도 지켜보고, 괜찮으면 빨리 결혼했음 좋겠어요.”
※ 김경민 기자
1986년 생. 2010년 서울대 인류학과를 졸업하고 <주간조선>에 입사해 2014년까지 취재기자로 활동했다. 탈북자 문제 전문기자로서 <주간조선>에 탈북자 인터뷰 기사를 연재했고, 다방면의 문화계 인사 인터뷰를 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