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02년 4월 태국에서 열린 세계권투협회(WBA) 슈퍼페더급 타이틀매치. 이날 경기는 태국의 복싱영웅 요드사난과 몽골 출신 도전자 라크바심의 대결로 경기 전부터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결과는 요드사난의 승리로 끝났지만, 이날 경기에서 두 선수 못지않게 관중들의 박수를 받은 이가 있었다. 주인공은 한국인 국제심판 이민영 백산한의원 원장. 이 원장은 현재 WBA에서 활약하는 국내 유이(唯二)한 국제심판이다. 이 원장이 권투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지난 1974년 프로복서 홍수환이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 웨스트릿지 테니스 스타디움에서 열린 세계권투협회 밴텀급 타이틀전에서 아놀드 테일러를 15회 판정으로 누르고 챔피언에 오르면서부터다. 당시 홍수환이 수화기 너머 어머니에게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라고 외친 말은 소년 이민영의 가슴에 팍 꽂혔다.
국내 둘뿐인 WBA 공인 국제심판
이 원장은 1976년 경희대 한의과대에 입학하면서부터 권투의 길에 본격 들어섰다. 약골 체질도 바꿀 겸 시작한 그의 권투 도전기는 이후 국제심판으로까지 이어졌다. 지난 1999년 3월 WBA 산하 PABA(범아시아권투협회)가 주는 국제심판자격증을 획득한 그는 2000년부터는 WBA 공식국제심판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금까지 그가 심판을 본 세계타이틀매치만 60여회에 달한다. 동시에 이 원장은 8명으로 구성된 WBA 의무(醫務)분과위원회(Medical Committee)에 비(非)서양의학 의료인으로 유일하게 참여하고 있다.
그에게 국제심판은 단순한 취미 이상이다. 한의사 다음 가는 제2의 직업이다. 주요 국제대회는 물론 WBA 관련 각종 행사에 참석하는 관계로 그는 매년 한달가량을 환자 진료에 나서지 못한다.
그가 현재 대한한의학회 정회원인 대한스포츠한의학회 설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것은 이러한 독특한 이력 때문이다. 지난 1984년 설립된 대한스포츠한의학회는 한의학과 스포츠를 접목시키기 위해 다양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학술단체다. 현재 대한스포츠한의학회에는 6개월 과정으로 진행되는 팀 닥터(Team Doctor) 프로그램을 비롯해 다양한 교육과정이 마련돼 있다. 지난 1996년 도입된 공인 팀 닥터 프로그램은 2014년 말까지 764명의 수료자를 배출했다. 이들은 현재 축구, 야구, 농구, 배구 등 다양한 종목의 팀 닥터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해 열린 인천아시안게임에서 대한스포츠한의학회는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로부터 공인을 받아 선수촌 내 진료소를 설치, 운영했다. OCA로부터 공인 받은 것은 인천아시안게임이 처음이다. 이 원장은 기간 중 선수촌 한의원 진료단장을 맡았다. 인천아시안게임 기간 동안 총 752명의 선수가 치료를 받았다. 서양의학이 아닌 동양권 의학 중에서 별도로 진료소를 연 것도 우리 한의학이 처음이다. 이에 대해 이민영 원장은 “드라마 대장금, 허준 등을 통해 한의학에 대한 인식이 아시아 전역으로 확산됐기 때문이며 여기에 부산아시안게임,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 등 국내에서 열린 주요 스포츠이벤트마다 보여준 한방치료의 높은 수준도 크게 기여했다”고 설명했다.
스포츠한의학이란 한의학의 치료 방법을 이용해 경기력 향상과 스포츠 상해의 예방·치료 및 재활에 도움을 주는 요소들을 개발·연구하는 학문이다. 가령 침구요법은 염좌, 경부근좌상, 요통, 타박상 등에 큰 효과를 기록하고 있다. 근육 염좌가 심할 때는 부항요법이 효과적이다. 이런 이유로 미국, 유럽 등지에서 동양의학과 스포츠재활의학을 접목하려는 시도가 활발하다. 이유는 무엇일까.
“경기현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어진 시간 내 손상된 부위를 얼마나 빨리 회복시켜 경기력을 향상시키느냐인데, 우리 한의학은 서양의학 못지않게 치료 속도가 빠릅니다. 보통 현장에서는 침과 부항, 테이핑을 활용한 치료가 많죠. 더군다나 한의학은 자연치료가 기본이기 때문에 부작용이 적어요. 최근 강화된 도핑 테스트 때문에 선수들이 경기 전 아파도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는 게 다반사인데, 그런 면에서 침, 부항을 활용한 한의학적 접근은 선수의 치료부담을 줄여주고 있어요. 물론 한약도 정해진 규정만 지키면 도핑테스트에 걸리는 일은 전혀 없습니다. 이미 우리 대한스포츠한의학회가 이에 대한 규정을 마련해 놓았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국제 스포츠계에서 이 원장은 ‘홍삼박사’로 불린다. 지난 2007년 이 원장은 경희대 한의과대 박사학위 논문으로 ‘홍삼이 흰쥐 펀치드렁크 증후군 모형의 학습 및 기억장애에 미치는 영향’을 썼다. 논문에서 이 원장은 머리 부분 충격에 따른 학습능력 저하를 막는 데 있어 홍삼이 뛰어난 효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

(사진 : 백산한의원)

홍삼의 펀치드렁크 개선효과 입증해내
그런 면에서 그의 박사학위 논문도 권투와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펀치드렁크(Punch-Drunk)는 머리가 지속적인 충격을 받을 경우 실어증(失語症)이나 우울증이 일어나는 대표적인 후유증이다. 복싱뿐만 아니라 각종 격투기나 축구선수 등 격렬하게 활동한 선수들에게서 자주 나타나고 있다. 그냥 방치할 경우 뇌세포 이상으로 이어져 프로복싱 전(前) 헤비급 세계챔피언 무하마드 알리처럼 파킨슨병에 걸리거나 혈관성 치매를 일으킬 수 있다. 그가 펀치드렁크를 주제로 논문을 쓰기로 마음먹은 것도 지난 2002년 호주에서 열린 한 타이틀매치에서 전설적인 복서 조 프레이저를 만나고 나서였다.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무하마드 알리와 함께 한 시대를 풍미했던 복서 아닙니까. 전형적인 인파이터(In-Fighter) 복서로, 저도 얼마나 좋아했는데요. 그런데 젊은 시절 머리에 너무 많은 충격을 받아서 그런지 휠체어에 앉은 채 정상적인 활동조차 못하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랐습니다. 그래서 논문을 쓴 거예요.”
지금도 이 원장은 주요 권투행사에 참석할 때마다 홍삼 엑기스 등을 해외 지인들에게 선물하곤 한다.
이 원장은 1996년부터 4년간 대한스포츠한의학회 회장을 역임한 뒤 현재는 명예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민간요법의 계량화를 통한 한방치료에 관심이 많다. 오늘날 대부분의 한의원에서 사용하고 있는 봉침치료법을 계량화시켜 국내 일선 한의원에 보급한 이도 이 원장이다.
“부상을 당해 한의원에 내원한 선수들을 보니 아픈 부위에 벌침을 맞은 사람이 많더라고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살아 있는 벌에게 침을 맞는 것은 효과가 제각각이라는 단점이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우선 벌마다 종류가 다를 뿐만 아니라, 양도 하나같이 달라 일정한 효과를 거둬야 하는 환자 치료용으로는 적합하지 않았어요. 살아 있는 벌에게서 뽑아낸 봉침액을 규격화시키는 일에 매진한 것도 한의학의 계량화를 위해서였죠.”
최근 국내 스포츠산업은 엘리트 육성 중심에서 생활체육으로 옮겨가고 있다. 과거 스포츠의학은 운동선수의 질병치료와 예방에 국한돼 있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개념이 넓어지면서 심장병, 고혈압 등 성인병 치료와 예방에 적극 활용되고 있다. 때문에 스포츠의학은 운동생리학, 운동역학, 생화학, 운동치료학, 영양학 등으로 영역이 점차 넓어지고 있다. 이 원장 역시 예전만 해도 태릉선수촌에서 활동하는 유명 스포츠 스타들을 치료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최근 들어서는 한의원 부근 초중고 체육부에서 활동하는 선수들을 치료하는 교의(校醫) 활동도 병행하고 있다.
최근 들어 스포츠한의학의 개념은 비만치료로까지 영역이 넓어진 모습이다. 의학적으로 비만은 유전, 호르몬, 물질대사의 영향 탓이다. 에너지를 섭취하는 것과 소비하는 것 사이에 불균형이 생기면서 이로 인해 지방 축적이 급격하게 늘어나는 질병이 바로 비만이다. 이 원장 역시 비만의 원인을 비허(脾虛·지라 기능이 허약해 소화가 잘되지 않고 식욕이 떨어진 상태), 간울(肝鬱·간 기능 저하로 원활하고 소통되지 못하는 상태), 식적(食積·불규칙한 식생활이나 과식, 혹은 위장기능의 저하 등으로 인해서 위장의 체기가 뭉쳐 있는 상태), 어혈(瘀血) 등으로 본다. 때문에 그는 이침법(耳鍼法), 체침법(體鍼法) 등을 병행해 사용한다. 이들 비만침은 환자의 위 활동을 약화시켜 식후 소화를 더디게 만든다. 동시에 소화, 호흡, 심혈관 및 내분비계 질환을 치료하는 데 효과가 있다. 또 지방 대사율과 열량을 높여, 몸 안에 쌓인 지방성분도 줄이고 있다.
“앞으로는 생활체육 시대 아니겠습니까. 이제 환자들이 전국 한의원 중 스포츠한의학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곳을 찾는 시대가 올 겁니다. 스포츠에 대한 이해가 높은 한의사일수록 치료 효과가 크기 때문이죠. 그런 면에서 볼 때 앞으로 스포츠한의학은 질병치료에서 건강관리 쪽으로 무게중심이 옮겨 갈 겁니다.”
그가 주요 한의학 세미나에 참석해 전국 한의사들을 상대로 한 강의에서 교의 등 지역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역설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원장은 최근 스포츠와 사상의학(四象醫學) 간 연관성을 살펴보는 것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사상의학이 뭐겠습니까. 사람마다 체질이 다 다르다는 거 아닌가요. 똑같이 밥을 먹는데 누구는 살이 찌고, 누구는 몸이 가뿐해진다고 하잖습니까. 외형적으로 볼까요. 어깨가 딱 벌어진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엉덩이만 큼지막한 사람도 있어요. 똑같은 일에도 불같이 화를 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무던히 참아내면서도 별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분도 있지 않습니까. 이게 체질이에요. 그런데 정작 스포츠에는 제대로 접목시키지 못하고 있어요. 유소년 축구팀에 가보면 죄다 희망하는 게 공격수예요. 화려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체질이 다르면 맡아야 할 역할도 다르거든요. 경우에 따라 어떤 사람은 공격보다 수비가 더 맞을 수 있어요. 그런 면에서 사상의학과 스포츠를 접목시키는 일은 국내 스포츠 수준을 높이는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이 원장에 따르면, 태양인은 허리와 하체가 약해 운동선수로는 체질상 맞지 않는 반면 태음인은 운동량이 많은 종목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일반적으로 태음인은 땀을 많이 흘려야 건강해지는 체질이다. 그런 점에서 바벨 등 기구를 활용한 운동이 좋다. 간단한 조깅을 하더라도 오랜 시간에 걸쳐 해야 효과를 볼 수 있다.
또 소양인은 지구력과 인내심은 부족한 편이나 민첩하고 승부욕이 강한 장점이 있기 때문에 권투나 탁구, 테니스 등이 적합하다. 소음인은 보통 기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체력소모가 많지 않은 운동법을 선택하는 것이 체질상 유리하다. 따라서 웨이트 트레이닝보다는 신체 각 부위를 골고루 활동시켜주고 적당한 근력을 유지시켜주는 요가가 적합하다. 이 원장은 “체질에 따라 자기에게 맞는 운동종목을 선택한다면 건강뿐만 아니라 부상예방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 이민영 원장은…
1982년 경희대 한의과대 졸업, 96~99년 대한스포츠한의학회장 역임, 98년 범아시아권투협회(PABA) 의무분과의원, 98년 세계권투협회(WBA) 의무위원, 現 WBA, PABA 공인국제심판, 85년~현재 백산한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