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은 최고성직자가 국가 최고지도자가 되는 신정공화국(Theocratic Republic)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다. 현재 공식적인 국가 최고지도자는 지난 1989년 사망한 아야툴라(Ayatullah) 호메이니 옹(翁)의 뒤를 이어 취임한 아야툴라 하메네이 옹이다. 그 아래 대통령 중심의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가 3권분립 형태를 취하고 있다. 정통 이슬람국가를 표방하는 이란은 나라 전체가 엄격한 이슬람 율법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단적으로 여성들은 집밖을 다닐 때 검은 천으로 몸을 두른 ‘차도르’(Chador)를 입어야 한다. 물론 외국여성도 이슬람 율법에 예외가 될 수 없다. 이영림(李榮林) 영림한의원 원장은 신정(神政)일치국가인 이란에서 18년간 지내는 동안 외국인, 그것도 여성한의사로는 드물게 ‘신이 보낸 천사’라는 찬사를 한 몸에 받았다. 손대는 환자마다 병이 감쪽같이 낫는다는 소문이 나면서 ‘골드핑거’(Gold-Finger)라는 별명도 얻었다. 그만큼 이 원장을 향한 이란인들의 애정은 각별했다. 오랜 타국 생활을 뒤로 하고 지난 1994년 영구 귀국한 뒤로부터 그는 효애(孝愛)실천·안보운동 등 다양한 사회봉사활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고(故) 팔레비 국왕부터 라프산자니 전(前) 대통령까지 이란 최고위층의 한방 주치의로 활동한 이 원장의 삶은 열정과 헌신으로 요약된다. 침술(鍼術) 하나로 이란을 사로잡은 이 원장을 만나 지나온 삶의 궤적을 따라가 봤다.

이란 최고위층 치료로 韓方 우수성 드높여
孝愛실천·안보정신 부활로 사회변화 꿈꾼다

- 사진 : 이경민
- 사진 : 이경민

1978년 12월10일. 평소처럼 이란의 수도 테헤란 시내는 조용했다. 이영림 영림한의원 원장은 여느 때처럼 아침 일찍 택시를 타고 시내 중심부에 위치한 타지리지 메디컬센터(Tajrish Medical Center)로 향했다. 새벽공기는 신선했고 거리는 이상하리만큼 한산했다. 당시 이란 정국은 혼란의 연속이었다. 집권세력인 팔레비왕조는 석유국유화로 벌어들인 막대한 자금을 가지고 근대화를 시도했지만, 이슬람원리를 중시하는 종교계와 잦은 갈등을 빚어야 했다. 이런 가운데 집권세력의 부정부패는 빠른 민심이반으로 이어지면서 이란혁명의 불을 댕겼다. 1978년 1월 성지(聖地) 곰(Qom)에서 시작된 반정부시위는 그해 9월 정부가 총파업에 돌입한 시민들에게 발포함으로써 전국적인 유혈혁명으로 번졌다. 

택시에서 내려 진료실로 들어간 이 원장은 창문 옆 베란다에 늘어선 정체불명의 병들을 보고 의아해했다. 자세히 다가가 보니 빈병에 휘발유를 담고, 거즈를 심지로 만든 화염병(火焰甁)이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이 원장은 남자간호사 캬레미를 불렀다.

“캬레미, 이리 와 봐요. 왜 여기에 저런 게 놓여 있죠?”
“쉿, 선생님, 모른 척 하세요.”
“이봐! 캬레미, 만약 산탄(霰彈)이라도 날아와 저기(화염병) 맞으면 당장 내가 다치는데 무슨 소리예요. 어서 다른 곳으로 치워요.”
“선생님, 걱정 마세요. 곧 10시가 되면 모두들 손에 무기를 들고 나와, 왕궁으로 향할 겁니다. 저건(화염병) 군인이나 경찰들에게 던지려고 준비해둔 것이니 안심하세요.”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남자간호사 캬레미는 시민혁명군에서 요직에 있던 인물이었다. 대화를 나누는 순간 이 원장은 예전에 자신이 그에게 한 말이 떠올랐다. 몇달 전 테헤란 시내에는 어린 아이들 몇 명만이 골목에서 나와 “팔레비는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고는 쏜살같이 사라지곤 했다. 이슬람 규율에 따르면, 14세 이하 어린이는 반정부시위에 나서다 붙잡혀도 처벌받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캬레미, 저거 뭐하는 거야? 애들만 나와서 구호를 외치고는 도망가고…. 강력하게 요구해야 정부도 생각을 바꾸는 거 아니겠어?’

이 원장은 자신이 내뱉은 말이 현실로 이어지나 순간 긴장이 됐다. 그로부터 몇시간 후 테헤란 시내로 수십만 명의 시민들이 쏟아져 나왔다. 총격전이 벌어졌는지 시내 곳곳에서 총성이 울려 퍼졌다. 어느새 병원은 부상당한 시민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그렇게 몇시간이 흘렀을까. 환자 치료에 여념이 없던 그가 시계를 봤을 때 시계바늘은 오후 3시로 향하고 있었다. 잠시 후 외래병동 책임자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닥터 리(이영림 원장), 당신 지금 여기서 뭐하는 겁니까? 지금 상황파악이 안 돼요? 다른 의사들은 모두 몸을 피해 집으로 갔는데, 닥터 리는 지금 여기서 환자나 보고 있을 때예요?”

정신없이 환자 치료를 하다 보니 퇴근시간이 다가온 줄은 꿈에도 몰랐다. 병원 밖 거리는 시위대로 옴짝달싹 하지 못했다. 시위대를 뚫고 집으로 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것 같았다. 콜택시를 부르자 캬레미가 뛰어나왔다.

“선생님, 이대로 나가시면 큰일납니다. 왕실과 한통속인 외국인 의사로 오인(誤認) 받을 수 있으니, 의사 가운을 입고 이 가방을 드세요. 그리고 누가 물어보면 왕진(往診)간다고 말하세요.”

병원 밖 사정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성난 군중은 왕실과 관련된 사람은 보이는 즉시 폭행할 기세였다. 이 상황에서 여자 혼자 몸으로 시위대를 뚫고 집까지 가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순간 ‘구원천사’가 나타났다. 한 택시운전사가 성난 군중을 향해 “이 분은 우리나라에 병든 사람을 치료하러 온 아주 훌륭한 의사십니다. 지금 시급을 다투는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나서는 것이니 길을 비켜주세요. 하늘이 보내준 ‘골드핑거’예요. 손만 대면 어떤 병에 걸렸는지 아는 ‘골드핑거’요.”

순간 5㎞ 가량 되는 군중이 물길 갈라지듯 두 갈래로 나눠졌다.

격동의 혁명 현장에서 되레 이란인 지지 얻어
이란혁명 전에 이 원장의 명성은 수도 테헤란 시내에 자자했다. 뾰족한 침(鍼)만 맞으면 아픈 곳이 씻은 듯 낫는다는 소문이 만들어낸 찬사가 바로 ‘골드핑거’였다. 일부 양방(羊方) 의사들로부터 ‘피시쿠’(이란어로 점쟁이)라는 시기 질투도 받았지만, 뜸이나 약재 처방 없이 오로지 침 하나만으로 환자를 치료한다는 것에 대한 이란인들의 경외심(敬畏心)은 대단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도 우리에게 이란은 거리로나 정서적으로 먼 나라다. 페르시아의 역사를 간직한 나라 또는 열사(熱沙)의 땅에서 구슬땀을 흘리는 건설역군 정도를 떠올리는 게 고작이었다. 신정일치 체제로 운영되다보니 이란은 유달리 중동에서도 사회풍조가 폐쇄적인 곳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이런 사회 속에서 외국인, 더군다나 미혼여성 혼자서 살아간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그가 이란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그래서 더 궁금했다.

“부산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제가 이란과 인연을 맺게 된 특별한 계기가 뭐가 있었겠습니까? 당시 한국에 계시던 이란대사님 때문이었죠. 견비통(肩臂痛·어깨 또는 어깨에서 팔에 이르는 부위가 아프고 저린 신경통)으로 고통 받고 있던 그 분을 치료해 드린 것이 인연이 됐던 겁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 그 분이 저를 찾아오시더니, 당시 국가원수인 팔레비 국왕이 쓴 저서 <백색혁명>의 번역을 의뢰하시지 않았겠습니까. 번역 일이라고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던 제게 말이죠. 대사님이 가고 나서 책을 쭉 훑어 봤어요. 책 속에는 산림과 방목지의 국유화부터 외교정책까지 매우 광범위한 내용이 실려 있더군요. 얼핏 보기에 우리나라 새마을운동과도 비슷하겠다 싶어, 은사님이셨던 고(故) 신상주 교수(경희대 의대)님과 공동으로 번역을 했습니다.”

백색혁명은 지난 1953년 미국의 지원으로 민족주의자 모사데크(Mossadegh·1880~1967)를 축출하고 복귀한 팔레비(Pahlevi·1919~80) 국왕이 친미(親美)노선을 걸으며 추진한 개혁정책을 일컫는다. <백색혁명>에는 토지개혁, 산림개발, 교육확대 등 근대화정책의 필요성을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이후 진행된 그의 이란 방문은 한국어판 출간에 따른 감사의 표시로 진행됐다.

한달 일정으로 진행된 이란 체류기간이 끝나갈 무렵 그는 보사부 차관이 병원장으로 있는 병원을 방문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던 병원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편두통(Migraine·한방용어로 담궐두통)이 너무 심한데, 이것도 침으로 고칠 수 있나요?”
“그럼요. 증상이 어떠신데요.”
“머리를 앞으로 숙이면 눈이 빠질 것처럼 아파요. 마치 난쟁이가 머릿속에 들어가 송곳으로 쿡쿡 쑤셔대는 것 같은데, 한 번씩 통증이 오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요.”
“그동안 치료는 안 받으셨나요?”
“에이, 웬걸요.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의학이 발달한 나라는 죄다 가서 치료를 받았는데, 전혀 차도가 없었어요.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편두통(치료)은 한의학으로 안 되겠죠?”
“무슨 말씀이세요. 한의학으로 충분히 치료가 가능합니다. 한국에 있을 때 제가 얼마나 담궐두통을 많이 치료해 봤는데요.”

1. 이영림 원장이 지난해 12월 열린 서초안보포럼 이사장 취임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2. 이영림 원장이 1981년 5월 이란 테헤란 타지리지 메디컬센터에서 이란 환자에게 침을 놓고 있다. 3. 이영림 원장(왼쪽 두번째)이 1990년 8월 타지리지 메디컬센터에서 동료 의사들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1. 이영림 원장이 지난해 12월 열린 서초안보포럼 이사장 취임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2. 이영림 원장이 1981년 5월 이란 테헤란 타지리지 메디컬센터에서 이란 환자에게 침을 놓고 있다.
3. 이영림 원장(왼쪽 두번째)이 1990년 8월 타지리지 메디컬센터에서 동료 의사들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팔레비 저서 번역 계기로 이란 방문
이 원장은 보사부 차관인 병원장의 편두통을 침 시술 7회 만에 깨끗하게 치료했다. 15년간 앓았던 편두통이 침 일곱 번 맞고 깨끗하게 나았다는 소문은 곧 테헤란 시내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병원장을 치료하고 나니 제가 묵던 호텔방으로 전화가 빗발처럼 쏟아지는데…. 그 중에는 종합병원장을 지낸 저명한 의학박사도 있었어요. 돌이켜 보면 이란사람 중 담궐두통 환자가 많았던 거 같아요. 제가 몸담고 있던 병원에 찾아오는 사람들이 대부분 중상류층인데, 식사에 초대받아 가보면, 고단백 식단 위주였어요. 특히 치즈를 너무 많이 먹었어요. 아무래도 그래서 담궐두통이 많았던 게 아니었나 생각돼요. 그런데 이란 사람들에게 담궐두통(편두통)은 불치병이었나 봅니다. 일종의 천형(天刑)이었던 거죠. 그런 와중에 제가 침만으로 담궐두통을 치료했다고 하니, ‘기왕 못 고치는 병, 한번 경험이나 해보자’는 심산에 호텔로 전화를 걸어온 거죠.”

당초 한달 계획으로 떠났던 이란 방문은 뜻밖의 환자 치료로 예정보다 무려 두 달이나 늘어났다. 당시 그는 한국에서 운영하고 있던 한의원(제안한의원) 문을 잠시 닫고 왔기에, 더 이상 이란에 머무는 것은 힘들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그의 귀국 소식은 이란정부 입장에서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동양에서 온 여(女)한의사에게 “헬리 맘눈”(감사합니다), “골반에 쇼마”(저는 당신의 제물입니다)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테헤란 시민들도 아쉬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귀국을 준비하던 어느 날 이 원장은 이란정부로부터 공식 제안을 받았다. 그가 처음 편두통을 치료했던 병원장은 “국왕 폐하와 왕실 일가분들은 닥터 리(이영림 원장)가 이란에 오래 머무르시길 희망합니다. 닥터 리, 왕실 주치의(主治醫)가 돼 주십시오. 이건 이란정부의 공식요청입니다.”

당시 이 원장을 위한 이란정부의 예우는 특별했다. 우선, 근무지가 이란 왕실재단에서 운영하는 타지리지 메디컬센터였다. 급여는 당시 한국에서 버는 것보다 배 이상 많았다. 231㎡(70평) 규모의 아파트와 승용차까지 제공됐다. 근무시간은 오전 7시30분부터 오후 1시30분까지며 그 외 시간은 다른 직업(Two Job)을 갖는 것도 허용됐다.

라프산자니 前 대통령 집안과 친분 두터워
이 원장의 진료 및 치료는 단순하면서도 명료하다. 지금도 그는 환자가 찾아오면 얼굴색(찰색)과 진료실로 들어오는 걸음걸이부터 살핀다. 그런 다음 맥진(脈診)을 하면 거의 모든 질병의 원인을 찾아낸다. 이란에서도 진찰 패턴은 똑같았다. 명쾌한 치료 덕분에 침대 12개로 구성된 침구과(鍼灸科) 진료실은 1년 전에 예약을 잡아야 할 정도로 환자들로 북적였다. 왕실의료기관이지만 일반인에게도 문호가 개방돼 있어서다.

환자 중에는 왕실 및 대통령 등 최고위 권력층도 포함돼 있다. 왕실이나 대통령 집무실에서 요청이 오면 왕진(往診)을 다녀오는 것이 관례였다.

그 중에서도 그는 라프산자니 전(前) 이란 대통령과 각별한 인연을 갖고 있다. 자택에서 괴한에게 저격을 당해 타지리지 메디컬센터에서 치료 중이던 라프산자니를 만난 이 원장은 이 후, 부인인 하쉐미 여사의 만성질환인 알레르기성 질환을 치료하면서 가까워졌다. 하쉐미 여사와는 ‘형제’처럼 지낼 정도로 가까웠다.

건설회사 사장은 당시 이 원장의 또 다른 공식직함이었다. 오전 근무를 마치고 나면 그는 자신이 세운 현지 건설회사인 동남건설로 직행했다. 당시 동남건설은 이란 내 고압선 가설을 주로 하는 전문건설업체였다. 

“병원 내 다른 의사들을 보니 퇴근 후 인근에 있는 다른 병원으로 가서 일을 한다든지, 투잡을 뛰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나도 ‘뭘 할까’를 고민했는데, 우연히 한국에서부터 알게 된 지인을 만나 건설업에 뛰어들었어요. 당시 한국의 대형 건설회사가 700만달러짜리 공사를 할 때 우리가 3000만달러 공사를 수주했으니 대단했죠.”

‘골드핑거’가 이 원장의 명예를 드높였다면, ‘동남건설 CEO(최고경영자)’는 부(富)를 안겨다줬다. 그렇게 바쁘게 살아가던 그는 꿈에 그리던 고국으로 영구귀국을 결심했다. 미혼여성이 타국생활을 오랫동안 했으니 그럴만도 할 것이다. 그게 1994년 무렵의 일이다.

18년 만에 돌아온 고국은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도 달라져 있었다. 시내 한복판이 어느새 고층빌딩으로 뒤덮였는가하면 고층아파트들도 곳곳에서 지어지는 등 한눈에 봐도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뤄낸 듯 했다. 하지만 부작용도 보였다. 물질만능주의와 땅에 떨어진 도덕성은 압축성장시대가 만든 어두운 그림자였다.

“인재를 만들려면 누군가는 희생을 해야 하는데, 18년 만에 한국에 돌아오니 인성교육이 너무 엉망이 돼 있었어요. 양보라고는 눈 씻고 봐도 찾을 수 없고….”

이 원장이 희생정신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지나온 그의 삶과 연결돼 있다. 간(肝)디스토마에 걸려 사형선고를 받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꿈 많은 소녀였다. 7년에 걸친 디스토마균과의 힘든 싸움은 몸과 마음을 지치게 했지만, 반대로 그에게 ‘한의사’로의 길로 안내해준 길잡이가 됐다. 당시 부산에서 명성을 떨치던 송학의원 배석수 원장에게서 침술을 전수받은 그는 경희대 한의과대 재학시절부터 ‘침(鍼) 잘 놓는 한의대생’으로 유명했다. 간디스토마 치료 때문에 늦깎이로 경희대 한의대에 입학한 그에게 한의학은 ‘자신에게 새 생명을 전해준 은인’과도 같았다. 그가 귀국 후 오랜 고민 끝에 효애실천운동본부를 설립한 것도 땅에 떨어진 효(孝)와 사랑(愛)을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정신생활의 기본은 ‘효’예요. 더러워진 정신의 때를 닦아내기 위해서는 ‘효’가 바로서야 합니다.”

- 이영림 원장은 ‘굳건한 안보의식 속에 미래번영이 있다’는 생각에 서초안보포럼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사진 : 염동우)
- 이영림 원장은 ‘굳건한 안보의식 속에 미래번영이 있다’는 생각에 서초안보포럼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사진 : 염동우)

전액 私費로 효애실천운동 본부 설립
지난 2001년 설립된 효애실천운동본부는 전액 이 원장의 사비로 운영되고 있다. 회원들을 상대로 회비조차 받지 않는다. 당초 귀국 후 충남 금산에 선진국형 요양병원을 세울 생각이었지만, 그보다는 사회정신 개조가 더 시급하다는 생각에 효애실천운동본부부터 설립했다. 현재 효애실천운동본부는 효도실천운동과 효도역군 발굴, 교육기관을 통한 효도교육, 관련홍보물제작, 세미나 등을 추진하고 있다. 이밖에도 효애실천운동본부는 국립현충원 25묘역(1700여 기)도 손수 관리하고 있다.

아울러 그가 역점을 두는 것은 안보분야다. 그는 ‘굳건한 안보의식 속에 미래번영이 있다’는 생각에 서울 서초구 유력 인사들이 참여한 서초안보포럼에서 현재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선친이 독립운동을 하셔서 그런지 제가 사회의식이 좀 남다릅니다. 이란에 있을 때도 조국 대한민국을 잊어본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주변 이란 친구들이 귀화를 하라고 할 때도 전혀 생각지 않은 게, 조국은 제겐 생명과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건설현장에서 사선(死線)을 넘나들며 일을 한 덕분에 경제적으로는 보탬이 됐지만, 인생 자체가 공수래 공수거(空手來空手去) 아닌가요. 남은 인생, 조국과 함께 살아야죠.”

 

▒ 이영림 원장은…
1941년 경북 청도 출생, 74년 경희대 한의과대 졸업, 80년 이란 파라(Fahra) 대학 신경외과 의학박사, 76~94년 이란 타지리지 메디컬센터(왕실병원) 근무, 94년~현재 서울 영림한의원 원장, 2014년~현재 서초안보포럼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