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전적인 아메리칸 스타일의 의상과 잔뜩 힘준 헤어컬이 인상적이다. 왼쪽부터 안신애, 김은혜, 박소희(장소 : 아트씨컴퍼니)
- 고전적인 아메리칸 스타일의 의상과 잔뜩 힘준 헤어컬이 인상적이다. 왼쪽부터 안신애, 김은혜, 박소희
(장소 : 아트씨컴퍼니)

“부지런한 사람이 운 좋은 사람을 못 당하고, 운 좋은 사람이 열정적으로 일하는 사람을 못 당한다.”

유튜브를 통해 3인조 레트로 걸그룹 ‘바버렛츠’의 3분짜리 뮤직 비디오 ‘바버렛츠’를 보면서 오래된 아일랜드 속담이 떠올랐다.

귀에 익숙한 복고풍 멜로디와 하모니, 딱 봐도 ‘촌티’ 철철 넘치는 1950년대 복고패션. 하지만 이들이 만들어내는 선율은 열정으로 속이 꽉 차 있었고 젊은 몸매를 감싼 최신 옷감처럼 세련되게 표현돼 있었다. 익숙한 편안함과 신선한 충격이 묘하게 교차되는 3분짜리 동영상에서 다가오는 압도적인 인상은 “이 사람들 정말 자기들이 좋아서 노래하는구나”하는 것이었다. 2012년에 결성돼 아직 ‘신인’이란 타이틀이 어울리는 이들. “도대체 어떤 걸그룹인데 외국에서 이토록 많은 호응을 얻고 있을까?”란 궁금증이 떠올랐다. 

지난 4월8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한 카페에서 바버렛츠를 만났다. 맏언니 안신애(29)씨, 둘째 김은혜(28)씨, 그리고 막내 박소희(24)씨. 도트와 스트라이프- 아메리칸 스타일의 고전적 테마를 패션 코드로 한 의상과 잔뜩 힘준 헤어컬이 복고풍을 돋보이게 한다. 튀는 듯 자연스러운 듯, 촌스러운 듯 세련된 듯한 것이 그녀들만의 패션 색깔이기도 하다.

이들은 스스로를 ‘시간여행 걸그룹’이라 불렀다. 3명의 멤버는 음색도, 취향도, 성격도 서로 달라보였다. 질문을 던지자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가위 바위 보로 대답 순서를 정하는 모습이었다. 그녀들의 고(高)퀄리티 화음의 비밀은 저렇게 잘 맞는 ‘짝짜꿍’이 아닐까, 생각했다.

“아직 얼떨떨해요. 좋은 꿈을 꾼 것 같기도 하고… 신기하고 값진 경험이었죠!”

바버렛츠는 지난 3월17일부터 나흘간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에서 열리는 세계 최대의 음악 페스티벌인 ‘사우스 바이 사우스웨스트’(SXSW)에 한국대표로 초청됐다. SXSW에 참석하기에 앞서 캐나다에서 단독공연을 가졌다. 3월 말엔 홍콩에서 열린 아시아뮤직페스티벌(HKAMF) 신인 아티스트 경연에 참가해 준우승을 차지했다. <이코노미조선>과 만난 건 귀국 후 일주일 후였다.

3월 북미·홍콩 순회공연 성공적으로 마쳐
“너무 좋았어요. 캐나다에선 ‘토론토 센터 포 디 아츠’(Toronto Centre For The Arts)와 ‘리스 팰리스’(Lee’s Palace)에서 단독공연을 했어요. 한인 관객이 절반이고, 유튜브를 통해 알고 오신 분이 절반이었어요. 300석 소극장인데 전석 매진이었죠. 센터 포 디 아츠에는 한국 뮤지션 중 이문세에 이어 두 번째로 무대에 오른 것이래요. 미국 ‘SXSW’는 분위기 자체가 모든 뮤지션의 꿈이잖아요. 그 엄청나게 많은 아티스트들 중에서 현지 매체 주목도 받았고요.”

바버렛츠의 리더이자 맏언니 안신애씨는 “돈 주고 살 수 없는 값진 경험이었다”며 북미투어 소감을 전했다. 미국의 손꼽히는 음악산업박람회이기도 한 ‘SXSW’엔 한국콘텐츠진흥원 신청 후 선정돼 초청 공연을 다녀온 것이었다. 한복을 입고 복고 헤어 메이크업을 한 채로 1950~60년대 소울이 가득 담긴 노래를 하는 이 아시아 여성들은 캐나다와 미국 현지 언론으로부터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해외 팬들과의 만남은 정말 신나는 경험이었습니다. 기억에 남는 일들이 정말 많은데, 캐나다 공연 땐 한 스윙댄스 동호회가 무대 앞에서 저희 노래에 맞춰 아예 커플 댄스를 추더라고요. 그야말로 축제의 현장이었습니다.”(안신애)

지난 3월17일, 미국 텍사스 주 오스틴 컨벤션 센터에서 이들이 아동문학가 윤석중이 작사하고 가수 이난영이 노래한 ‘봄맞이’, 김시스터즈의 1950년대 노래 ‘김치깍두기’를 부를 때 객석을 가득 메운 중장년층 미국관객들이 일제히 입을 모아 따라 부르기까지 했다고 한다.

바버렛츠가 오른 무대는 SXSW뮤직 페스티벌에서 매년 새로운 트렌드를 소개해 온 기획 무대 ‘넥스트 스테이지’ 공연이었다. 미국으로 떠나기 며칠 전에 급히 준비한 한복을 입고 선 세 사람이 복고풍의 하모니를 부르는 무대가 미래의 음악 트렌드를 소개하는 부문에서 가장 인기를 끈 이색적인 순간이었다.

바버렛츠의 공연은 SXSW에 참가한 한국 음악인 가운데 가장 폭발적인 반응을 얻어냈다. 제임스 마이너 페스티벌 총감독은 “바버렛츠가 SXSW 홈페이지와 애플리케이션의 아티스트 관심도에서 크레용팝, 에픽하이를 꺾고 K팝 1위를 차지했다”면서 “미국의 젊은 음악인이 하지 않는 틈새 장르를 공략한 것이 성공요인이며 앞으로 활약이 기대된다”고 말했다.

크레용팝, 에픽하이 꺾고 K팝 관심도 1위
한 현지 언론인은 “페스티벌 홈페이지를 통해 바버렛츠를 우연히 알게 됐고 이내 이들의 매력에 빠졌다. 우리도 잊고 있던 우리 옛 음악을 동양인들이 이렇게 잘 소화한다는 게 신기하다”고 논평했다. 이런 활약에 힘입어 바버렛츠는 SXSW 공식 폐막 파티에까지 초청됐다.

김은혜씨는 “미국 공연 때 저희 자작곡인 ‘가시내들’을 불렀는데 외국인 관객들이 따라 부르더라”며 “이미 저희를 알고 오는 팬들이 많아서 신기했다. 페이스북을 통해서 우릴 알고 12시간씩 운전해 온 팬들도 있었다”며 공연 분위기를 전했다.

바버렛츠는 동영상 공유사이트 유튜브를 통해 이미 북미권에 팀 색깔을 많이 알린 덕에 해외 팬이 상당히 많다. 이 팀이 지난해 유튜브에 공개한 로넷츠의 커버영상 ‘비 마이 베이비’는 현재 9만건 이상의 뷰(view)를 기록하고 있다. ‘비 마이 베이비’는 1963년 미국 여성 트리오 로넷츠가 발표한 곡으로, 빌보드지 탑 100 차트에 2위를 기록한 히트곡이다.

바버렛츠가 직접 제작한 이 커버영상을 접한 유명 아티스트가 이들과 음악작업을 하기 위해 내한하기도 했다. 슬래시 메탈계의 대부로 꼽히는 미국 록메탈 그룹 메가데스(Megadeth) 출신의 기타리스트 마티 프리드먼이 우연한 기회에 인터넷을 통해 바버렛츠를 발견하고 한국까지 찾아온 것이다. 평소 모타운(Motown)풍의 복고사운드(1950~60년대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유행하던 음악)를 좋아하던 그는 바버렛츠를 지난해 8월30일 NHK 월드(World)의 프로그램 ‘아시아 뮤직 네트워크’에 소개하기도 했다.

이 때문인지 이제 막 시작한 신인그룹임에도 불구하고 바버렛츠의 해외 팬층은 구성이 다양하다. 한인 관객보다 외국인 관객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실용음악과 나와서 인디 싱어송라이터로 무명 시절을 보냈어요. 그러다가 스마트폰 어플에 시대별로 음악 틀어주는 걸 듣게 됐는데 1950~60년대 노래를 듣다보니 클래식 걸그룹에 꽂혔죠. 그게 2012년이었어요.”(안신애)

팀의 리더 안신애씨의 제안으로 결성된 바버렛츠는 처음부터 걸그룹을 의도하고 탄생된 것은 아니었다. 안신애씨는 같은 재즈바에서 보컬 아르바이트를 하던 김은혜씨를 만나 “복고풍 음악을 한번 공부해보자”며 제안을 했었다고 회상했다. 팀의 막내인 박소희씨는 원래 안신애씨가 실용음악 학원 강사로 있을 당시 학원 원생이었다.

“저는 실용음악과 다니면서 여느 또래와 같이 아이돌 가수를 꿈꾸기도 했어요. 평소 제가 즐겨 듣던 음악은 그냥 어쿠스틱한 팝이나 재즈 팝 쪽이었는데, 신애 언니가 같이 연습해보자고 해서 갔다가 바로 덥석 물었죠. 1950~60년대 걸그룹 음악에 대해 이 팀에 합류 전까진 생각해본 적 없었지만 들어보니까 굉장히 매력적이더라고요. 그 감수성이 제겐 맞는 것 같아요.”(박소희)

“저도 요즘 노래 가사보단 옛날 노랫말에 더 공감이 되는 것 같아요. 요즘 노래에서 많이 쓰는 첨단 표현들, 저랑 좀 안 맞아요. 그에 비해 옛날 노래는 좀 더 직설적이고 솔직한 느낌이에요. ‘내 눈을 봐요~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이런 게 더 귀엽지 않나요?”(김은혜)

“어느 날 정신 차리고 보니 이렇게 셋이 딱 모여 있었다”는 김은혜씨의 농담 섞인 말처럼 이들은 자연스럽게 음악공부를 통해 팀워크를 만들어 갔다. 바버렛츠를 결성한 후에도 1960년대 레트로 음악을 함께 듣고 분석하며 음악을 공부해나갔다.

이들이 직접 지은 ‘바버렛츠’란 팀명은 이들이 추구하는 복고풍 아이덴티티를 보다 부각한다. ‘Barberettes’란 신조어는 ‘이발사’를 뜻하는 영어단어 ‘바버(barber)’의 여성형 느낌이다. 19세기 후반 미국 경제가 불길처럼 일어나고 있을 때 미국 전역엔 ‘이발소’, 즉 ‘바버샵(barber shop)’이 곳곳에 생겨났다. 당시 마을 사람들이 모여 새 소식을 접하거나 잡담을 나누며 시간을 보내는 일종의 커뮤니티센터였다.

당시 이발소에서 일하던 사람 중에는 흑인이 많았는데, 이들은 일을 하는 동안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절묘한 화음을 이루곤 했다고 한다. 노래 잘 하는 바버들이 있는 이발소가 인기가 있어 손님유치를 위해 노래 잘하는 이발사를 ‘스카우트’하는 상황도 빈번했다.

바버샵 사운드는 1929년 미국 경제대공황과 함께 사라졌다가 1950년대 경제활성화와 더불어 전문적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발달하면서 다시 등장한다. 이번엔 주로 백인 남성 4인조로 간단한 반주를 동반한 아카펠라 하모니로 재현돼 인기를 끌었는데, 이때 ‘이발소 음악’(barbershop music)이라는 장르명이 붙여졌다. 이렇게 해서 ‘바버샵 뮤직’은 미국인들에게 좋았던 옛날(good ol’ days)에 대한 향수의 아이콘이 됐다.

바버렛츠의 음악은 여러 모로 이 바버샵 뮤직과 연관된다. 팀명부터 탄탄한 화음을 기초로 하는 아카펠라 사운드, 단순하지만 뚜렷한 복고풍의 멜로디, 촌스러운 듯 생기발랄한 복고풍의 무대 메이크업 등은 ‘굿 올 데이즈’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미장센이다.

하지만 동시에 바버렛츠의 음악은 혁신이고 미래지향적이다. 과거의 음악엔 없던 파워와 비트가 담겨 있다. 현대 기술문명이 빚어낸 복잡한 음악 요소들을 과감히 버리고 단순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미래를 마주하자는 유혹처럼 느껴진다.

작곡부터 헤어·메이크업까지 직접, 실력파 걸그룹
“더 좋은 레트로 음악을 들려드리기 위해 1950~60년대, 그리고 1970년대까지 유명 가수들 음악은 장르 가리지 않고 참고하는 편이죠. 피터 폴 앤 메리 등 포크 가수 음악도 찾아 듣고 돌리 파튼, 엘비스 프레슬리 음악도요.”(김은혜)

“옛날 가수들 사진이나 영상을 보면서 헤어랑 메이크업도 따라 해보고…. 재밌어요. 인형놀이 하는 기분이에요.”(박소희)

세계를 놀라게 하는 뛰어난 가수들이 백가쟁명(百家爭鳴) 하는 요즘의 한국 음악계에서 가창력과 화음의 조화로 인정받는 것만도 쉽지 않을 텐데, 바버렛츠는 거기에 비주얼적 요소로도 매력을 더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이 모든 것들을 멤버들이 하나하나 직접 챙기는 것도 바버렛츠의 실력 중 하나다.

특색 있는 뮤지션으로 성장하기 위해 성공적인 첫발을 내디딘 바버렛츠는 또 한번의 모험을 앞두고 있다. 오는 6월 프랑스 칸에서 열리는 세계 최대 규모의 음악산업박람회 ‘미뎀’(MIDEM)에 한국 대표로 초청받아 떠난다. 북미 공연을 떠나기 앞서 서울에서 가졌던 쇼케이스 ‘출정식’에서 관객들과 했던 ‘보고회’ 형식의 콘서트도 챙길 예정이다.

“이렇게까지 많은 호응을 받을 줄 몰랐어요. 저희들을 이렇게까지 좋게 봐주시는 덴 사실 유튜브 같은 SNS의 힘이 컸어요. 그런 게 아니었으면 저희들 힘으로 외국에까지 홍보할 수는 없었겠죠. 앞으로도 SNS를 통해 팬들과 소통을 꾸준히 해나갈 거예요. 물론 음악활동도 열심히 이어가야겠죠. 좋은 음악으로 곧 찾아뵙겠습니다.”(안신애)

 

※ 김경민 기자
1986년 생. 2010년 서울대 인류학과를 졸업하고 <주간조선>에 입사해 2014년까지 취재기자로 활동했다. 탈북자 문제 전문기자로서 <주간조선>에 탈북자 인터뷰 기사를 연재했고, 다방면의 문화계 인사 인터뷰를 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