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匿名)은 짜릿하다. 면전에서 욕하는 ‘앞담화’보다 안 보이는 곳에서 소곤대는 ‘뒷담화’가 더 스릴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평판이 중시되는 사회에서 남에게 말 한마디 할 때마다 ‘이 말을 해도 괜찮을까’를 걱정하느라 속 끓일 현대인에게 계급장 떼고 툭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공간이 주어진다면 어떨까? 철저한 익명이 보장되는 공간, 익명SNS가 요새 화제다.
- 직장인들끼리 서로의 고민을 토로하는 익명게시판 앱 ‘블라인드(BLIND)’가 직장인 사이에서 큰 인기다.
- 직장인들끼리 서로의 고민을 토로하는 익명게시판 앱 ‘블라인드(BLIND)’가 직장인 사이에서 큰 인기다.

학교 화장실이나 지하철역 화장실 변기에 앉아 있다 보면 심심치 않게 벽의 곳곳에서 낙서를 찾아볼 수 있다. ‘오늘도 파이팅’과 같은 응원 메시지에서부터 사회를 비판하는 글, 그리고 음담패설까지 변기를 공유했던 사람들 간의 대화가 활발하다. 비좁고 어두운 화장실에 대화와 토론의 장이 열릴 수 있었던 것은 익명성이 철저히 보장되기 때문은 아닐까. 아무도 내가 그 글을 썼다는 사실을 모르기에 표현의 자유가 완벽히 보장되며, 심지어 글쓴이도 이 글이 누구를 대상으로 한 글인지 모르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피드백을 받을 수 있다는 매력도 있다.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익명 글로 나를 표현할 때 왠지 모를 희열을 느낄 수 있는데, 대나무 숲으로 달려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외쳤던 이발사가 느낀 후련함과 일맥상통할 듯싶다.

익명(匿名·이름을 숨김)이라는 특성은 매력적이다. 사람은 대화를 나눌 때 무의식적으로나 의식적으로나 본인의 평판을 생각하게 된다. 이 이야기를 함으로써 내가 남에게 어떻게 비칠까, 나의 사회적 위치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괜찮은가를 끊임없이 고민한다. 이런 인간 본연의 심리 때문에 자기가 정말 하고 싶은 말들이 입 밖으로 나오기 전에 걸러진다. 하지만 익명이 보장된다면 사회생활을 할 때 쓰는 가면을 벗고 좀 더 진솔하게 속마음을 표출할 수 있다. 특히 더욱 더 철저한 가면이 요구되는 곳이 바로 직장이다. 이런 직장인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앱이 최근 인기를 끌고 있다. 바로 직장인을 위한 익명게시판 ‘블라인드(BLIND)’다.

- 한국에는 이미 대형 커뮤니티 내의 익명게시판이 활성화돼 있어 사용자가 익명SNS를 사용할 유인이 크지 않다.
- 한국에는 이미 대형 커뮤니티 내의 익명게시판이 활성화돼 있어 사용자가 익명SNS를 사용할 유인이 크지 않다.

눈치 볼 필요 없이 직장생활 고충 토로하는 익명 앱, ‘블라인드’
조현아 대한항공 전 부사장이 비행기를 돌린 ‘땅콩회항’ 사건의 전모를 만천하에 드러낸 글이 올라왔던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가 바로 블라인드다. ‘내려!’라는 제목으로 블라인드 내 대한항공 게시판에 올라왔던 화제의 글은 당시 비행기 내에서 일어난 상황을 자세히 묘사하며 조현아 대한항공 부사장이 전(前) 부사장이 되는 데 일조했다. 이런 대형 폭로성 글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블라인드’가 철저한 익명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블라인드는 6개월간의 준비기간을 거쳐 2013년 12월 처음 오픈했다. 같은 직장에 다니는 동료끼리, 그리고 같은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끼리 익명으로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익명게시판이라고 설명하면 정확하다. 블라인드 게시판은 ‘우리 회사’와 ‘모두의 라운지’라는 두 종류의 게시판으로 구성돼 있는데, ‘우리 회사’는 같은 회사 동료끼리, ‘모두의 라운지’는 같은 업계 사람끼리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이다. 회사 메일을 통한 인증절차만 걸치면 자유롭게 게시판을 이용할 수 있다.

하지만 국내에 존재하는 모든 회사의 게시판이 다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 220여개의 회사 게시판만 열려 있다. 문성욱 블라인드 공동대표는 “우리 회사의 게시판을 열려면 게시판을 열어달라는 오픈 리퀘스트(Open Request)가 일정 수준을 넘어야 하는데, 이는 의미 있는 대화가 오가려면 일정 정도의 사용자 수가 갖춰져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규모가 작은 회사는 전체 인원의 10% 정도, 대기업이라면 100~200명이 모여야 게시판이 열린다.

2013년 12월 서비스 오픈 당시 게시판은 NHN(네이버) 하나뿐이었지만, 지금은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220여개의 회사 게시판과 15개의 업계 라운지가 열려 있다. 이렇게 사용자 수가 급증할 수 있었던 것은 직장 내의 소문이 ‘발 없는 말’보다도 빠르기 때문이다. 문 공동대표는 “직장인만큼 소문이 빠른 집단도 없다”며 “한 회사가 잘되면 주변 업계 내 회사나 계열사에 금방 소문이 나서 오픈 리퀘스트가 급증한다”고 말했다

‘어떤 내용이 주로 올라오는가’라는 질문에 문 공동대표는 “익명서비스인 만큼 게시판 내에서 오가는 내용은 공개할 수 없다”며 대답을 피했다. ‘익명’이라는 콘셉트를 확실히 고수하는 블라인드의 공동대표 두 명은 사진촬영에도 응해주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업계 라운지에는 주로 업계 전문 분야에 관한 내용이 올라온다. 특히 IT(정보기술)회사는 판교에 몰려 있는 탓에 IT 라운지에는 판교 맛집이나 행사에 대한 정보 공유도 이루어진다. 회사 공간에는 당연히 회사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업무환경, 내부정책, 에티켓, 연봉 등 다양한 주제가 있는데, 사용자 중 혼기가 꽉 찬 젊은 남녀들이 많은 탓에 연애 이야기도 오간다. 심지어 게시판에서 만나 결혼에 골인한 커플도 있다.

블라인드 사용자가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은 ‘정말 익명이 확실하냐?’인데, 이에 대한 블라인드 측의 대답은 “걱정하지 말라”다. 특허출원까지 한 시스템으로 철저한 익명이 보장되며 지나칠 정도로 복잡한 암호화 덕에 시스템을 누군가가 통째로 들고 간다고 해도 아무런 정보도 얻어내지 못할 것이라고 문 공동대표는 호언장담했다.

아무래도 익명이라 온갖 언어폭력이 난무하는 난장판이 되진 않을까 싶지만, 이용자를 직장인으로 한정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회생활을 하는 직장인만 게시판을 사용할 수 있으며 회사메일을 인증함으로써 어느 정도의 사회적 자아를 남겨놓는데, 이로써 게시글 수위의 적정 수준이 유지되는 것이다.

- 블라인드 내 게시판에는 업무환경, 내부정책, 에티켓, 연봉 등 다양한 회사 관련 글들이 올라온다.
- 블라인드 내 게시판에는 업무환경, 내부정책, 에티켓, 연봉 등 다양한 회사 관련 글들이 올라온다.

미국에서도 실리콘밸리 중심으로 익명SNS 급성장
미국에도 익명SNS가 대세다. 익약(Yik Yak)은 위치를 기반으로 한 익명SNS로, 반경 1.5마일(2.4㎞) 이내에 있는 사람들끼리 메시지를 공유할 수 있어 대학교 캠퍼스를 중심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시크릿(Secret)은 사용자의 휴대폰 연락처에 저장된 지인들에게만 사용자가 게시한 글을 볼 수 있게 한다. 위스퍼(Whisper)는 아무런 제약 없이 불특정 다수와 익명으로 소통하는 서비스다. 최근 ‘시크릿’은 휴대폰 연락처 내 지인과 익명으로 소통한다는 기존 서비스 모델에서 익약과 같은 위치기반으로 서비스 모델을 피봇(Pivot·사업 아이템의 수정)했다. 지인끼리의 소통으로 제한을 둔 탓에 한 명이 이탈하면 너도나도 이탈해버려 이탈률이 기하급수적으로 늘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이처럼 익명SNS는 여러 방면으로 서비스 확장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이런 익명SNS, 과연 가능성 있는 시장일까? 전문가들의 대답은 “글쎄”다. 황병선 카이스트 소프트웨어대학원 대우교수는 “익명을 기반으로 한 서비스인 만큼 수익모델에 제한이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플랫폼의 특성상 일반적인 배너광고가 쓰일 수 있지만 정교한 타깃팅(Targeting)을 필요로 하는 광고는 어렵다. 사용자에 대한 자료수집이 어렵고 수집한다하더라도 이를 마케팅에 활용한다면 익명을 원하는 사용자들의 반발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또한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불특정 다수에게 광고를 할 광고주를 찾는 것도 현재로선 쉽지 않다.

그런 면에서 한국 시장에서 익명SNS가 뿌리를 내리기 더 힘들다는 분석도 있다. 익명SNS는 수익모델이 불명확한 만큼 인수·합병(M&A) 외에는 투자금 회수(Exit)가 쉽지 않다. 해외의 경우 기존의 SNS나 메신저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이 그들이 커버하지 못하는 틈새를 메워 후발주자나 경쟁업체의 시장진입을 저지하기 위해 익명서비스를 제공하는 스타트업을 인수할 수 있다. 하지만 전례가 흔치 않은 한국에서는 거의 유일한 수익창출 방법인 인수·합병(M&A) 조차도 쉽지 않다. 새로운 서비스가 나오면 M&A로 기술을 취하기보다는 서비스를 카피해 기존의 서비스에 추가하는 행태가 만연하기 때문이다.

해외에서 큰 인기를 끈 휘발성(揮發性) SNS ‘스냅챗(Snapchat)’이 한국에서 성공하지 못한 것도 그 이유에서다. 스냅챗은 사용자가 촬영한 사진이나 영상을 친구에게 보내는 서비스인데, 사진·영상 메시지를 받은 사람이 메시지를 볼 수 있는 시간을 1초에서 10초까지 설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른 SNS와 차별화된다. 지정된 시간이 지나면 전달된 메시지는 영구 삭제된다. 스냅챗은 하루에 2억개가 넘는 메시지가 전송될 정도로 성공했지만 한국에서는 히트를 치지 못했다. 대신, ‘카카오톡’이 출시한 사진공유기반 SNS ‘카카오스토리’에 이와 유사한 ‘펑쪽지’라는 기능이 추가됐다.

전문가들, “국내에서 익명SNS 성공할 수 있을지는 의문”
이런 구조적인 차이 외에도 사용자가 SNS를 사용하는 목적이 다르다는 점도 있다. 류한석 IT칼럼니스트는 “한국인에게 SNS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용도로 쓰인다. 카카오스토리나 페이스북에 한국인 사용자는 ‘어디에 갔다’, ‘뭘 먹었다’라는 내용의 포스트를 주로 올리는데 이는 남들이 내가 어딜 갔고 무엇을 먹었는지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반면, 익명SNS는 이런 부분을 충족시켜주지 못하기 때문에 인기를 끌기 힘들 것”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한국에는 이미 익명SNS의 기능을 하고 있는 대형 커뮤니티가 많다. 디씨 인사이드(DC Inside), 일베(일간 베스트), 오유(오늘의 유머) 등과 같은 커뮤니티 내에서 아이디만 공개하고 소통하는 준(準)익명게시판이 이미 존재한다. ‘뽐뿌’라는 사이트에는 아예 익명으로 운영되는 게시판도 있다. 이미 이런 준익명·익명 게시판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사용자들이 익명SNS에 새로 가입할 유인이 충분치 않다.

익명서비스가 뿌리를 내리기 힘든 한국 시장에서 예외적으로 블라인드가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블라인드가 틈새를 잘 공략했기 때문이다. 류한석 칼럼니스트에 따르면, 한국에서 아무리 익명으로 진행되는 의사소통이 활발하다고는 하지만 자신이 속해 있는 조직에 대한 의견만은 자유롭고 솔직하게 말하는 행위가 금기시된다. 이는 조직을 비판하면 찾아내서 응징하는 ‘보복문화’ 때문인데 철저한 익명성 보장을 통해 직장인들의 말문을 트이게 한 서비스가 바로 블라인드라는 것이다.

한국에서 익명SNS가 크게 성장하기에는 헤쳐 나가야 할 장애물이 많다. 하지만 ‘익명 소통’이라는 충분히 매력적인 콘셉트를 갖춘 서비스이기에 성장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이런 익명SNS가 어떻게 사용자들을 사로잡을지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