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소설 <아주 오래된 농담>에는 ‘집밥’에 얽힌 의미심장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소설 속 주인공 남자는 부인이 정성을 다해 손수 준비한 집밥을 먹어보는 것이 간절한 소원이다. 하지만 부인은 온갖 핑계를 앞세우며 남편에게 절대로 집밥을 해주지 않는다. 부인에겐 집밥을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남편을 절대로 사랑하지 않음에 대한 응징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집밥을 통해 부인의 사랑을 확인하고픈 남편의 갈망과 한사코 이를 거부하는 부인과의 줄다리기 속에, 이들 부부의 좌절과 비애 그리고 절망감과 허망함이 압축적으로 그려져 있던 기억이 새롭다.

- 집에서 밥먹는 시간이 줄어들면서 가족의 가치도 그 의미를 빠르게 잃고 있다.
- 집에서 밥먹는 시간이 줄어들면서 가족의 가치도 그 의미를 빠르게 잃고 있다.

밥은 가족만이 해주는 따스한 돌봄
예전 방문교수 자격으로 1년간 이화여대에 머물렀던 연변대학 교수가 한 분 있었다. 특강을 하는 자리에서 ‘밥’에 얽힌 자신의 경험을 흥미진진하게 풀어 놓았다. 남편을 중국에 남겨두고 혼자 한국에 와 있노라니 한국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남편 밥은 누가 해주느냐”는 질문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 때마다 별 생각 없이 “밥은 남편이 알아서 해결한다”고 응수했단다.

그러면 다시 고개를 갸우뚱하며 “시어머님이나 친정어머님이 가까이 계시느냐” 묻곤 하기에, “시댁은 기차로 8시간 가야 하고 친정은 12시간이나 떨어진 곳에 있다”고 하면 대개 쯧쯧쯧 입맛을 다시거나 끌끌끌 혀를 차며 자신의 남편을 가엽게 여기는 통에 여간 당황스러운 것이 아니었단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흘러서야 한국인들에게 밥이란 단순한 밥이 아니라 보다 포괄적 의미에서 가족만이 해줄 수 있는 따스한 돌봄을 뭉뚱그려 칭하는 것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 집밥이 우리네 가족 풍경 속에서 빠른 속도로 퇴색해가고 있다. 일차 주범은 물론 사교육일 것이다. 자녀들의 초등학교 고학년 진입과 더불어 사교육이 본격화되면, 방과후부터 밤늦도록 이어지는 학원 스케줄로 인해 가족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함께 식사하는 기회가 1주일에 평균 1~2회 이하로 눈에 띄게 감소하게 마련이다.

학교 주변에선 김밥, 떡볶이류의 분식이나 햄버거, 피자류의 패스트푸드로 급히 배를 채우고 학원행 버스에 올라타는 풍경이 낯설지 않음은 물론이다. 뿐이랴, 도대체 성적이 뭐기에 자녀들 시험기간이면 식사준비 하는 시간도 아까워 동네중국집 배달 수요가 급증한다 하니, 이를 어찌 받아들여야할지 난감하기만 하다.

일전에 동료 교수로부터 실감나는 하소연을 들은 적이 있다. 자녀가 수험생이 되고 보니 아내의 심기가 극도로 예민해진 탓에 거의 1년 동안 집밥은 언감생심 꿈도 꾸어보지 못했다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고3 자녀가 시험 때니 되도록 집에 늦게 들어오라는 아내의 부탁을 받고는 밤 10시를 조금 넘겨 집에 도착했단다. 배도 출출하고 목도 말라 부엌에 들어가 냉장고 문을 열었더니, 마침 사과와 키위를 먹기 좋게 썰어 랩으로 씌워놓은 접시가 눈에 뜨이더란다. 반가운 마음에 과일 접시를 꺼내 랩을 벗기려는데, 어디선가 아내가 비호(飛虎) 같이 달려와 접시를 빼앗으며 하는 말이 “당신 것도 아닌데 왜 함부로 손을 대냐”며 야단을 치는데, 순간 눈물이 핑 돌만큼 서러웠다는 고백이었다.

상황이 이러하고 보니 ‘밥상머리 교육’은 이상적 꿈이요 비현실적 공상(空想) 정도로 들린다. 예전 할머니, 할아버지 모시고 함께 밥상을 받을 때는 어르신들께서 먼저 수저를 드신 후 아랫사람들이 숟가락을 들어야 한다는 식사예절도 배우고 입에 맛있는 것만 골라먹지 말고 골고루 영양섭취를 해야 한다는 교육을 받는가 하면, 세상엔 굶는 사람도 많거늘 음식 귀한 줄 알고 남김없이 먹어야 한다는 주옥같은 이야기도 들을 기회가 많았다.

할아버지, 할머니 앞에서 부모님 이야기 할 때는 존칭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옳은 말버릇임도 배웠고 세상물정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귀동냥 하면서 조부모 세대를 이해해드리고 부모 세대와 소통하는 방법을 자연스레 배울 수 있었다. 그 밥상이 사라진 지금, 우리는 최소한의 예의범절을 배울 공간마저 잃어버렸음에 틀림없는 것 같다.

집밥이 사라지게 된 또 다른 배경에는 가족 시간(family time)의 가치를 평가절하하고 대신 산업 시간(industrial time)의 생산성과 효율성을 중시하는 시장 자본주의의 위력이 자리하고 있다. 먹고 살기 빠듯한 세상에 맞벌이 가족이 대세를 이루다보니 저마다 ‘시간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이 자리를 비집고 들어온 것이 식생활의 상품화요 다채로운 외식산업의 번성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가족의 가치 빠르게 상실되고 있어
어느 덧 매식(買食)에 길들여진 우리 입맛은 집밥의 담백함이나 소박함보다는 달고 맵고 짠 자극적 음식이나 눈을 호사시키는 외식을 선호하게 됐다. 와중에 요즘 신세대 남편들은 어설프기 짝 없는 아내의 손맛도 불만이요, 싱크대 가득 쌓이는 설거지 더미가 자신 몫이 될까봐, “자기야, 오늘 외식할까?” 선수를 치기도 한다는 데야.

예전, 가장 인기 있는 시어머님은 된장, 간장, 고추장 바리바리 싸들고 오셔서 경비실에 맡겨두고 가는 분이란 유머가 떠돌곤 했는데 이것도 이젠 옛날이야기가 된 듯하다. 어차피 어머님 세대도 장 담그기를 그만 두신 마당에 집집마다 간직해온 밥상의 고유한 맛을 그리워하고 탐하는 세대 또한 빠르게 사라지고 있는 것 아니겠는지.

집밥이 사라짐은 집에서 밥먹는 시간이 줄어든다는 단순한 현상을 넘어 밥을 함께 먹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의 식구가 사라지면서 생활공동체로서의 가족 가치 또한 그 의미를 빠르게 상실해가고 있다는 뜻일 게다. 너나없이 빈곤했던 시절엔 밥 한끼를 나누는 동안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주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던 덕분에 배는 고파도 마음은 배부를 수 있었건만 먹고 마실 것이 풍족해진 지금은 배는 부르지만 마음은 허기진 것이 우리네 솔직한 모습 아닐는지.

최근 종편의 ‘삼시세끼’란 프로그램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것은 우리네 삶이란 그저 삼시세끼 해결하는 것으로 부족함이 없음에 대한 새삼스런 깨달음이요 무언(無言)의 지지이리라.

 

※ 함인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이화여대 사회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고, 미국 에모리대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가족과 생애주기 그리고 세대 공존을 주제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일상과 예술 속의 커뮤니케이션>(공저) <다양한 가족제도와 미완의 양성평등>(공저) <현대 한국인의 세대 경험과 문화>(공저) <60세 정년연장 의무화법에 대한 근로자 인식과 정책 니즈> <한국 가족연구 50년의 평가와 전망> 등 다수의 논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