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류 역사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승리로 끝난다’는 <역사의 종언>(1992년) 저자이자 세계적인 정치학자로 꼽히는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62) 미 스탠퍼드대 교수를 만났다. 5월4일 서울 강남에 위치한 한국고등교육재단 빌딩 내 강연장에서다. 그는 한국고등교육재단 초청으로 ‘민주주의는 쇠퇴하고 있는가?’를 주제로 열변을 토했다.
후쿠야마 교수는 스승인 고(故) 새뮤얼 헌팅턴 교수가 쓴 <제3의 물결:20세기 후반의 민주화>(1991년) 얘기를 꺼내며 강연을 시작했다. “20세기 후반 전 세계가 민주화 물결에 휩쓸렸습니다. 유럽에서 라틴아메리카, 아시아 등으로 민주주의가 확산됐습니다. 구조적인 힘은 사회·경제적인 변화를 가져옵니다. 세계경제는 2008년 금융위기 직전까지 엄청난 성장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인도, 중국 등 신흥국도 등장했습니다.” 이어 후쿠야마 교수는 “민주주의의 확산 정도는 지역별로 다르다”며 “유럽과 라틴아메리카가 가장 민주화된 지역이고 아시아는 성과가 그리 좋지 않다”고 말했다. 인구 기준으로 아시아의 민주주의 순위는 더 내려간다. 인구가 13억명에 달하는 중국이 사회주의 국가이기 때문이다.
후쿠야마 교수는 “전 세계에서 민주주의가 쇠퇴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날 강연의 주제다. 그는 “1970년 선거 민주주의를 실시하는 국가는 35개국에 불과했다”며 “2005년 120개국으로 증가하며 민주주의의 정점인 시대를 맞이했다가 최근 9년간 4~5개국이 줄었다”고 말했다.
민주주의 쇠퇴의 이유는 무엇일까. 후쿠야마 교수는 ‘중산층’을 주목했다. “중산층이 있었기에 전 세계에서 민주주의가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전 세계 60억 인구 중 수십억명이 중산층에 속한다. 중산층은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삶을 살거나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을 말한다. 이들은 자신의 삶에 거는 기대가 크고 정치참여 욕구가 강하다. 자국의 정치, 경제 상황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양한 형태로 민주화 운동을 일으켰다. 프랑스혁명, 우크라이나 오렌지혁명, 중동 아랍의 봄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중산층의 정치 참여가 갈수록 줄고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면서부터다.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데 국가, 민주주의를 생각할 겨를이 없는 것이다.
후쿠야마 교수는 사라지는 ‘법치주의’도 민주주의의 쇠퇴 요인으로 꼽았다. 여기서 법치주의는 권력을 제한하는 개념이다. 그는 소련을 예로 들었다. “1992년 소련이 해체됐을 때 많은 사람들은 ‘러시아가 진정한 의미의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되지 않을까’라고 기대했어요.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습니다. 2002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권력을 이양 받은 후 선거를 하고 있지만 야당을 억압하고 있습니다. 시민사회 집회와 언론의 자유도 허락하지 않습니다. 여당이 반대 의견을 내는 게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민주주의가 선거를 통해 리더를 뽑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설명이다. 권력 창출 이후 견제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선거를 통해 민주적 정당성을 등에 업은 권력이 견제 시스템을 없애고 법치주의를 훼손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후쿠야마 교수는 “민주개혁 성과가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이라고 정의했다.
국가의 ‘무능(無能)’도 민주주의의 쇠퇴 요인이다. 국민은 책임감 있는 정부를 바란다. 기대감을 가지고 지도자를 선출한다. 그러나 정부가 무능해 그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다. 후쿠야마 교수는 “국민은 안전, 교육, 복지 등 기본적인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정부를 바란다”며 “하지만 정부는 무능하거나 부패한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어떤 경우에는 아예 정부제도와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덧붙였다.
최근 국가부도 위기에 처한 그리스가 대표적인 예다. 후쿠야마 교수의 설명이다. “그리스는 1974년 민주주의 국가가 됐습니다. 이후 많은 시간이 흘렀죠. 그리스는 2010년 이후 장기간 재정위기로 경제가 파탄상태에 이르렀지만 공무원을 해고하지도 공공부문 지출을 줄이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포퓰리즘(대중인기영합주의)’ 때문이죠. 민주주의가 성장하기 위해선 효율적인 정부가 필요합니다.”
우크라이나도 정부의 무능으로 인해 민주주의가 역행한 사례다. 2004년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의 마이단 광장에 모인 수만명의 시민은 정부의 대통령선거 부정(不正)을 규탄했다. ‘오렌지혁명’이다. 선거는 다시 치러졌고 개혁 정치인인 빅토르 유센코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그러나 유센코 정부는 무능함을 드러냈다. 내부 분열에 시달리며 우크라이나의 심각한 부정부패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글로벌 금융위기에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그 결과 2010년 선거에서 2004년 오렌지혁명 원인을 제공한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민주주의, 권력 창출 후 견제가 중요
민주주의 국가인 인도도 마찬가지다. 후쿠야마 교수는 “인도는 공공서비스와 인프라를 제대로 구축하지 못했다”며 말을 이었다. “1990년 말 인도 북부의 빈곤층을 조사해보니, 학교 선생님이 월급을 받으면서 학생을 가르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어요. 이는 인도 경쟁력 약화 요인이기도 합니다. 이후 인도정부는 10년 동안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교사의 50%가량은 월급을 받으면서 일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태국의 경우, 1990년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했지만 여전히 부정부패가 만연해 있다. 중산층이 부의 재분배를 원치 않아서다. 이런 태국의 시스템은 시골 빈곤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결국 지난해 유혈사태로 이어졌다.
후쿠야마 교수가 2011년 쓴 <정치질서의 기원:불안정성을 극복할 정치적 힘은 어디서 오는가>를 보면, 미국 정치가 언급돼 있다. “미국 의회는 두 정당으로 심하게 분열돼 있기 때문에 법안 처리가 어렵다. 또 노동조합, 제약회사, 은행 등 수많은 집단이 로비를 해 자신의 이익에 장애가 되는 입법을 봉쇄한다. 이는 부당한 게 아니다. 그러나 어느 수준을 넘으면 ‘특권의 고수’로 문제가 될 수 있다.” 이런 모습은 한국 정치권에서도 나타난다. 보수와 진보의 경쟁은 갈수록 심화되고 있고 정치권을 상대로 한 입법로비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사진 : 조선일보 DB)
한국, 세계 민주주의 국가 지원해야
후쿠야마 교수에게 ‘한국의 민주주의’를 물었다. 그는 “한국 정치의 양극화는 미국과 다소 차이가 있다”며 “점점 복잡해지고 있다”고 짧게 말했다. 하지만 그는 “미국, 한국처럼 민주주의가 발전한 국가는 전 세계 민주주의 국가를 지원할 의무가 있다”며 말을 이었다. “권위적인 국가가 힘을 얻고 시민사회를 억압하는 게 오늘날 현실입니다. 민주주의 쇠퇴기에 있는 지금 미국, 한국 등 민주주의 국가들이 서로 협력해야 합니다.”
민주주의의 쇠퇴를 논하면서 중국을 빼놓을 수 없다. 중국은 공산당 지도하에 유지되는 국가다. 민주주의가 존재하지 않는다. 앞으로 민주주의가 들어선다고 전망하기도 어렵다. 중국은 어마어마한 경제성장을 이뤘다. GDP(국내총생산) 성장률이 지난 30년간 연평균 10%정도에 달한다.
후쿠야마 교수는 “중국경제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규칙과 원칙을 만들고 이를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사회기반시설을 구축하는 데는 중국식 권위주의 정부만큼 효율적인 체제가 없다. ‘한번 하자’고 하면 무조건 해야 한다. 그러나 법치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중국 관리자들은 중국 내에 법치가 존재한다고 말하지만 후쿠야마 교수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규칙을 근거로 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다”며 “중국은 강력한 국가가 있을 뿐 권력을 제한하는 법치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이런 중국 시스템은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며 중국의 반부패 캠페인을 예로 들었다. “중국정부가 뇌물을 받는 등 부패를 저지른 관리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부패의 증거도 없고 공정한 재판도 없었습니다. 현재 중국의 정치인과 경제인은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어떤 규칙을 지켜야 하는지 혼란스러워하는 거죠.”
후쿠야마 교수는 ‘나쁜 황제’도 우려했다. 그는 “법치가 없기 때문에 권력자의 횡포에 무방비일 수밖에 없다”며 “황제가 잘하면 나라가 잘되고 황제가 못하면 나라가 망하는 것이다”고 말했다.
앞으로 중국 내에 민주주의가 확산될 수 있을까. 후쿠야마 교수는 “긍정적으로 보면, 중국 중산층은 정치참여 욕구를 지니고 있다”며 “그러나 이들의 정치참여 욕구가 지속적일지는 의문이다”고 말했다. 그는 또 “중국이 현 체제를 가지고 꾸준히 경제성장을 이어간다면 민주화 가능성은 작을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 후쿠야마 교수는…
후쿠야마 교수는 1952년 미국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일본계 3세다. 일본어는 못한다. 그는 코넬대(고전학), 예일대(비교문학), 하버드대(국제정치학 박사)를 졸업한 후 미 국무부 정책기획실 차장, 워싱턴 랜드연구소 선임연구원, 조지메이슨대 교수, 존스홉킨스대 국제관계대학원 학장 등을 지냈다. 현재 스탠퍼드대 정치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