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터키공화국은 1952년 ‘건국 1400주년’ 기념행사를 가졌다. 중국 역사서 <자치통감>에는 AD 552년 돌궐의 수장인 토문(土門)이 유연(柔然)을 격파하고 그 수장 두병가한을 자살하게 했다고 적혀 있다. 돌궐이란 투르크(터키)족을 말한다. 돌궐은 흉노의 일파로서 사마천의 <사기>에는 정령(丁靈)으로 언급되고 있다. 흉노의 역사를 이어받은 터키족이 바로 돌궐족이다. 그 후 돌궐은 몽골계 민족인 유연에 속해 있었으나 552년 토문(이리가한)이 유연을 격파하고 독립했기 때문에 터키공화국은 그 해를 건국의 해로 본 것이다. 그렇지만 그 장소는 현재의 아나톨리아에서 멀리 떨어진 중앙아시아의 알타이 산맥 부근이었다.
터키족은 우리 한민족과 같은 알타이 문화권에 속한다. 아득한 옛날 두 민족은 중앙아시아에서 한 핏줄로 살다가 그들은 서쪽으로, 우리는 동쪽으로 이동해 왔다. 흉노로부터 시작한 터키족은 돌궐족, 위구르족으로 이어지고 그들의 일파가 다시 서쪽으로 진출해 아나톨리아 반도에 정착해 셀주크투르크 제국, 오스만 제국에 이어 1924년 오늘의 터키공화국을 건설한 것이다. 때문에 터키에서의 국사는 흉노로부터 시작하는 민족사를 의미한다. 반면 현재 터키 국토인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명멸했던 히타이트, 우르라트 왕조, 프리기아 왕조, 사산조 페르시아, 비잔틴 제국의 역사는 세계사로 가르치고 있다. 터키는 우리와 고대사의 일정부분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진한 민족적 동류의식을 느끼게 한다.

6년 만에 다시 찾은 이스탄불
비행기 상공에서 내려다 본 이스탄불 부근의 짙푸른 초원과 산야(山野)는 마치 한국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이스탄불 시내의 스카이라인과 도시의 모습이 정겹게 눈에 들어온다. 한양대학교 이희수 교수는 이스탄불이란 단어만 떠올려도 가슴이 마구 뛴다고 한다. 누구든 이스탄불을 한번 방문하기만 하면 그 매력에 빠져 심하게 열병을 앓는다고도 한다. 나 역시 열병을 앓다가 6년 만에 다시 이스탄불과 해후하게 됐다. 인류역사의 축소판, 아시아를 가로질러온 실크로드의 대(大)여정이 마무리되는 바로 그 이스탄불과 말이다.
공항에서 곧바로 구 시가지에 있는 한식당 서울정에 들러 저녁식사를 하였다. 6년 전 그때보다도 음식의 맛과 질이 향상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스탄불의 날씨는 흐린데다가 제법 쌀쌀하기까지 하다. 이집트의 열기 속에 뛰어들어 막 나온 탓에 체감온도가 더 낮게 느껴졌으리라. 이스탄불 신도시인 탁심 지역의 그랜드 하얏트 호텔에 체크인한 후 모처럼 헬스클럽에서 1시간가량 운동을 했다.
이튿날 일찍 기상해 밖을 보니 하늘이 잔뜩 찌푸려 있고 어제 저녁보다 더 한기가 느껴진다. 그러나 비만 오지 않는다면 시내 관광하기에는 적합하겠다 싶다. 신학과 역사를 전공했다는 한국인 가이드와 함께 먼저 술탄 아흐멧 지구로 갔다. 술탄 아흐멧 모스크(일명 블루 모스크)를 둘러보고 이어서 바로 옆의 하포드롬 광장을 찾았다. 광장에 버티고 있는 4개의 구조물은 저마다의 사연을 담고 있다. 광장 남쪽에 웅장하게 서 있는 25.6m의 오벨리스크는 3일 전 방문했던 룩소르 카르낙 신전에서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운반해온 것으로, 상형문자가 아름다운 부조작품처럼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집트를 찾은 여파일까, 어쩐지 상형문자가 낯설지 않고 배워서 조금이라도 해독하고 싶은 충동이 이집트에서부터 내내 일고 있었다. 가운데의 청동뱀기둥(8m)은 콘스탄티누스 1세가 그리스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서 가져온 것으로 윗부분이 잘려 나갔다. 십자군(4차)의 소행이다. 제일 안쪽에 있는 돌로 만든 오벨리스크는 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7세가 만든 것으로, 원래는 황금으로 장식되어 있었으나 십자군들이 금장식을 뜯어가는 바람에 돌탑만 볼품없이 서 있다. 광장 한쪽의 8각형 건축물은 독일의 빌헬름 2세가 기증한 것으로, ‘독일의 샘’이라고도 불린다.

007 시리즈 배경이 됐던 지하저수궁전
광장을 벗어나 아야소피아 성당과 술탄 아흐멧 모스크 중간 지점에 있는, 007 시리즈 영화의 배경이 됐던 지하저수궁전으로 발길을 돌렸다. 336개의 다양한 석주(石柱)가 받치고 있는 지하저수지에는 배가 떠다닐 정도로 물이 차 있다. 지하저수지 가장 안쪽에 거꾸로 처박혀 있는 2개의 메두사 머리 부근에 많은 사람들이 붐벼 발을 들여놓기가 힘들 정도였다. 6년 전에 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어 아야소피아(성소피아 성당) 경내를 관람하려 했으나 30여분은 족히 기다려야 할 것 같아 오후로 미루고 톱카프사라이 구내에 있는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을 찾았다. 술탄 아흐멧 지구뿐만 아니라 시내 전체가 사람의 물결로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고 있다. 6년 전 그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였다. 내일 찾을 트로이를 떠올리면서 트로이관(館)을 비교적 자세히 훑어보았다. 수메르 문명, 앗시리아 문명, 히타이트 문명 등 이집트 문명에 버금가는 세계4대 문명 중 하나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진수를 엿볼 수 있었다.
특히 점토판에 새겨진 쐐기문자(설형문자)로 된 길가메시 서사시와 함무라비 법전이 눈길을 끌었다. 이 박물관의 백미(白眉) 중의 하나로서 그 동안 알렉산더의 석관(石棺)으로 알려진 석관은 최근 알렉산더의 부장인 아브달로니모스(Abdalonymos)의 것으로 밝혀졌다. 무엇보다도 이 박물관이 자랑하는 걸작품은 설형점토 문자판에 새겨진 카데쉬 평화협정문이다. 기원전 13세기 중반 고대 이집트의 람세스 2세와 히타이트의 무와탈리쉬왕 사이에 맺어진 협정문은 인류 최초의 평화조약으로 알려져 있다. 오늘날 국제조약 문구에 상투적으로 등장하는 ‘동맹국 또는 회원국 일국에 대한 위협은 전체 동맹국 또는 회원국에 대한 위협으로 본다’는 규정의 효시는 바로 위 평화협정문이다.
부근에 있는 한 호텔 옥상의 터키음식점에서 보스포러스 해협을 바라보면서 생선요리로 점심을 때우고 아야소피아를 찾았다. 사람의 줄이 없어지고 좀 한산한 모습이었다. 기원후 4세기 맨 처음 세워진 후, 두 차례 지진과 방화로 소실된 것을 6세기 중엽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6년이라는 불가사의한 짧은 기간에 재건한 후 1500년을 버텨온 저력에 걸맞게 내부와 외부 모두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비록 532년 발생한 니카반란으로 불명예의 시절을 겪기도 했으나 정신적(무형), 물질적(유형)으로 위대한 인류문화유산을 남겨 그 이름을 만고에 빛내게 되었다. 바로 로마법을 집대성한 유스티니아누스 법전과 아야소피아 사원이다.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은 우리의 민법전에도 많은 조항이 반영될 정도로 지금까지 세계 각국 법전의 기본이 되고 있다.
나는 아야소피아 경내를 관람하다가 한 무리의 한국 여행객들과 조우했다. 그들 중 누군가가 아야소피아 벽면의 손상된 모자이크 성화(聖畵)를 보면서 오스만 제국이 저렇게 손상시켰다고 제법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이 들렸고 일행 대부분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러나 이는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손상된 모자이크 성화는 제4차 십자군 원정 때 같은 기독교인인 라틴 기사들의 물욕이 빚어낸 소행이었다. 오스만 군대는 그 위에 회칠을 해서 그 형상을 가렸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카파도키아 동굴 벽화(성화)의 파괴 역시 비잔틴 제국 시절 성상(聖像)파괴운동의 결과였다.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킨 메흐멧 2세는 신앙에 있어 관용적이었으며 절대 광신적이지 않았다. 그 전통은 오스만 제국 말기까지 이어졌다. 비록 아야소피아를 비롯한 이스탄불의 8개 기독교 교회를 모스크로 개조했지만 성직자를 살해하거나 개종을 강요하지 않았다. 성당을 파괴하지도 않았다. 이슬람의 우상숭배 금지에 따라 회반죽으로 성화를 가리도록 했을 뿐이다.

오스만 제국의 진정한 힘은 관용과 공존의 정신
이는 스페인에서의 레콩키스타(국토회복운동) 이후 기독교 통치자들이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과 코르도바의 메스키타 모스크의 중앙 핵심 부분을 헐어내고 기독교 성당을 세운 것과 대비된다. 비록 메흐멧 2세가 관례에 따라 3일간(실제는 하루)의 약탈을 허용했으나 일반 민중에게는 해를 끼치지 않았다. 반면 제4차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 이교도인 주민들을 대량학살 했을 뿐 아니라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아야소피아 내를 철저히 약탈했다. 메흐멧 2세는 정복 후 바로 겐나디오스 2세를 기독교회(동방정교)의 총주교로 임명했고, 기독교뿐만 아니라 유대교의 자치조직을 허용했다. 그 결과 이스탄불의 인구는 20세기 초까지 비(非)무슬림이 더 많았다. 이교도가 인구의 절반이 넘는 수도를 가진 제국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위대하고 관용적이다. 또한 피지배민족의 다양한 관습과 종교, 정체성은 밀레트라는 제도의 틀 속에서 보호·유지되었다.
이러한 공존의 정신이야말로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세 대륙에 걸쳐 최대의 제국을 건설했던 오스만 제국의 진정한 힘이었다. 그럼에도 서구 중심의 세계사에서 오스만 제국의 역사적 지위와 역할은 제대로 부각되지 못했고 그것마저도 부정적 측면을 애써 강조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아직도 서양이 공격하면 정복이나 위대한 승리이지만, 동양(훈족, 몽골족, 오스만 등)이 공격하면 찬탈이나 파괴가 되어야 하는 세계사 교과서의 서술 방식에 익숙해 있다. 한마디로 오스만 제국사는 세계사 교과서에서 찢겨나간 페이지가 되었다. 이제 오스만 제국의 성격과 통치 스타일(다양성을 바탕으로 한 관용성)은 재평가, 재정립되어야 한다고 본다. 나의 터키 기행은 이러한 문제의식이 한 몫을 했다.
이어 톱카프사라이(궁전)를 찾았다. 여전히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정원을 가로지르면서 날씨가 흐린 것이 다행이라고 몇 번을 생각했다. 잔뜩 벼르고 있었던 궁전부엌을 개조하여 만든 중국 도자기관은 벌써 4~5년 전부터 휴관이라고 하여 실망을 금치 못했다. 6년 전 왔을 때 나는 두 번이나 이곳을 찾은 적이 있다. 이곳은 현재 1만2000여점의 중국 도자기를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문득 터키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오르한 파묵이 쓴 <내 이름은 빨강>이라는 추리소설이 생각난다. 톱카프사라이에서 일어난 사건을 다룬 추리소설이다.
해거름에 지친 몸을 이끌고 찾은 곳은 신시가지인 탁심 지구 패라(PARA) 지역에 있는 패라 팔라스 호텔이었다. 내가 탐독했던 추리소설의 작가 애거서 크리스티가 <오리엔탈 특급살인사건>을 집필한 현장이다. 1차 세계대전 때에는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등 열강의 정보원들이 머물면서 첩보전을 벌였던 곳이기도 하다. 호텔 프런트에 그녀가 머물던 411호실을 볼 수 있느냐고 문의하니 지금은 보여줄 수 없다고 한다. 아마 투숙객이 있는 것 같았다. 그 방 앞에서 사진을 찍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