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닷없이 큰 아들이 스시가 먹고 싶단다. 쉰이 다 된 아버지랑 말을 섞어 주는 게 고마워 스마트폰 검색에 들어간다. 유명한 스시집들을 꿰고 있지만 차려입기도 귀찮고 비용도 부담돼(10대 아들 셋이 먹어대는 양이 만만치 않다) ‘녹색창’에 의지해본다. 대기업이 운영하는 스시 뷔페가 근처에 있다. 다행이다. 자리를 안내 받으며 스캔을 시작한다. 샐러드가 10여 종이다. 스시와 롤의 숫자가 스물을 넘어선다. 우동, 소바에 디저트 그리고 음료까지 구성이 탄탄하다. 탄성을 지르는 아들 녀석들 앞에서 걷는데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1시간 가까이 음식을 밀어 넣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다. 이렇게 주고도 남을까?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핀다. 손님들의 표정이 밝다. 이들 중 상당수는 분명 단골이 될게다.

장소를 옮겨보자. 연남동(서울시 마포구)에는 유난히 기사식당이 많다. 늘 그렇듯 식당 앞에는 하얀색, 주황색, 검정색 택시들로 가득이다. 메뉴도 정말 다양하다. 생선구이, 감자탕, 복국, 콩나물국밥, 순대국, 두루치기, 동태찌개, 보쌈….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택시기사들과 식도락가들의 발목을 사로잡아 빌딩을 세운 이가 한 둘이 아니다. 오늘 주인공도 그 중 한 명이다. 감나무집 장윤수 대표. 우리 나이로 올해 예순이다. 돼지불고기 백반으로 수도 서울을 평정한 기사 식당계의 대모(代母)다. 다들 그렇게 부른다.

- 서울 연남동의 감나무집은 MBC <무한도전> 멤버들이 택시기사 역으로 출연해 이곳을 방문한 뒤로 널리 알려지는 바람에 일반 손님이 급증했다. 공깃밥은 물론 계란프라이도 무한리필이다.
- 서울 연남동의 감나무집은 MBC <무한도전> 멤버들이 택시기사 역으로 출연해 이곳을 방문한 뒤로 널리 알려지는 바람에 일반 손님이 급증했다. 공깃밥은 물론 계란프라이도 무한리필이다.

소면, 어리굴젓 등 감칠맛 나는 반찬 가득
1970~80년대 유명 여가수가 살이 좀 찐다면 그이와 같은 모습일 게다. 목소리는 문주란씨와 같은 계열이다. 쇳소리가 진하게 배어 있다. 늘 웃는 얼굴이지만 눈매는 매섭다. 그녀가 차리는 밥상은 일반 기사식당과는 많이 다르다. 엉성하게 대충 내는 법이 없다. 덕분에 셈을 마치고 돌아서는 고객들의 표정이 밝다. 만족하지 않았다면 다시 오지 않았겠지. 이 집을 찾는 이들 대부분은 ‘무한도전 돼지불백’을 찾는다. MBC 간판 프로그램인 ‘무한도전’이 이 집 메뉴에 등장하는 이유는 차차 설명하기로 하자. 테이블에 놓인 찬들을 슬쩍 살펴본다. 주인공인 돼지불백(이하 불백)은 시쳇말로 기름이 좔좔 흐른다. 밥공기 옆으로 소면이 보인다. ‘불백’에 국수라…. 주인장이 꽤 연구한 모양이다. 국수 좋아하는 한국인의 DNA를 십분 반영했다. 나처럼 ‘혈중국수농도’가 높은 이들이라면 대환영할 구색이다. 벌건 찬이 하나 있어 포커스를 맞춰보니 어리굴젓이다. 입맛 없을 땐 찬 물에 밥 말아 굴젓 한 점 올리면 그만인데 무엇보다 반가운 건 계란프라이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게 막 부친 것임에 틀림없다. ‘정성을 가득 채웠다’는 상투적 표현은 어딘가 어색하다. 그보다는 ‘고객들의 기호를 꿰뚫어 보았다’가 맞을 듯하다.

귀동냥으로 단골들의 식사법을 배웠다. 아무래도 시작은 소면이다. 뭉친 면을 휘휘 풀어 국물에 적신다. 딱 한 입 거리다. 그릇째 입에 대고 후루룩 넘긴다. 목 넘김에 따라 붙는 멸치향이 전문점의 그것에 밀리지 않는다. 반숙한 계란프라이를 밥 위에 올린다. 숟가락으로 서너 번 찔러 노른자를 흘려 내린다. 그 위로 굴젓을 딱 두 점만 올린다. 벌써 양 볼에 침이 고인다. 넉넉하게 떠올려 입에 넣는다. 차가운 어리굴젓이 입천장에 닿으며 바다 내음을 뿜는다. 노른자에 도포된 밥알이야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지금껏 돼지불백을 바라만 봤던 이유는 따로 있다. 무한리필 되는 공깃밥 덕분에 여유를 부린 셈이다. 찬(饌)으로 어느 정도 양을 채우고 메인으로 포만감을 극대화시키겠다는 심사. 국가대표급 돼지불고기를 한 점 깨물어본다. 불향과 함께 몸이 둥둥 뜬다. 이 집 돼지불고기에 무한도전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이유는 이렇다. 유재석을 포함한 멤버들이 택시기사 역으로 경쟁을 벌였다. 사납금을 채우기 위한 서바이벌 리얼리티 콘셉트였다. 모든 멤버가 식사를 위해 모였던 장소가 바로 감나무집이었다. 여섯 명이서 10인분을 넘게 먹으며 혀를 내둘렀다. 경쟁하듯 불고기를 탐했고 시청자들은 넋이 나갔다. 그날 저녁부터(24시간 영업이라 가능) 사람들이 몰렸고 택시기사들은 줄을 서야 하는 웃지 못 할 진풍경이 그려졌다. 그날 이후 ‘무한도전 불백’이라는 신조어가 탄생했다.

- 장윤수 대표는 지금도 매달 일본과 홍콩을 다니며 벤치마킹 투어를 한다.
- 장윤수 대표는 지금도 매달 일본과 홍콩을 다니며 벤치마킹 투어를 한다.

‘무한도전’ 등장으로 더욱 입소문 나
감나무집을 찾은 이들은 두 번 놀란다. 맛에 놀라고 푸짐한 양에 놀란다. 공깃밥과 찬은 물론이고 심지어 계란프라이도 몇 번이고 리필이 가능하다. 최고 기록은 7개였다. 입에 닭똥 냄새가 날 정도로 원 없이 프라이를 먹던 젊은 고객은 그 뒤로 친구들을 데리고 오는 열성 팬이 되었다. 스시 뷔페에서도 묘사한 이런 가공할 만한 ‘퍼주는 기술’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장윤수 대표는 그동안 수도 없이 망했다. 유학 보낸 아이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외식업에 뛰어들었다. 첫 아이템은 경양식 레스토랑. 제대로 만든 돈가스, 함박스테이크, 비후까스(당시에는 다 비프라 하지 않고 비후까스라 칭했다)는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손님이 밀려드는 통에 화장실 갈 시간도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대기업 계열의 패밀리 레스토랑이 근처에 생기며 손님이 줄기 시작했다. 그곳의 인기는 실로 대단했다. 결국 문을 닫았다. 다시 시작한 곳은 일산. 당시 대형 갈비집들이 성공 가도를 달릴 때였다. 야심차게 재개한 갈비집도 열자마자 인기를 끌었다. 퍼주는 데는 일가견이 있던 장 대표의 전략은 이번에도 적중했다.

매일매일 매출 신기록을 써내려갔다. 그러나 달콤한 꿈도 잠시 이번에는 O157균(식중독을 일으키는 대장균의 일종)이 그녀를 공격한다. O157균이 대한민국 외식업계를 뒤흔들며 외식을 삼가자는 캠페인까지 등장할 정도였다. 그렇게 두 번째 철퇴를 맞는다. 그대로 주저앉을 수 없어 주위에 손을 벌렸다. 든든한 지원군들 덕분에 재오픈이 가능했다. 광우병, 조류독감 등 유행병과는 거리가 먼 아이템을 골랐다. 한국인들의 외식 메뉴 10위 안에 늘 랭크되는 순대국이었다. 두 번의 실패가 자양분이 되었으리라 믿고 이를 악물었다. 반응은 뜨거웠다. 돈을 세느라 잠을 설칠 정도였다. 행복했다. 이대로만 밀고 나가면 빚도 모두 갚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했던 3차 공격은 건물주가 주도했다. 이런 핑계 저런 핑계를 대며 나가달라고 압력을 가했다. 사돈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픈데 세입자가 돈을 버니 얼마나 부럽고 미웠겠는가. 권리금도 못 챙기고 쫓겨난 세상은 매서웠다. 억울하고 분했지만 해결 방안이 없었다. 그 뒤로도 몇 번을 더 망했다. 마지막 남은 연남동 집을 함바집으로 개조하는 데까지 얼마나 많은 밤을 눈물로 지새웠는지 모른다. 이번이 마지막이라 다짐했다. 외국으로 야반도주해야겠다는 결심을 뒤로 하고 시작한 함바집에 그때까지 축적한 노하우를 전부 다 쏟아 부었다. 인사동 한정식 식당에서 했던 정성으로 밥을 지었고, 밤새 육수를 만들던 순대국집의 열정으로 국물을 냈다. 일산 갈비집에서 했던 그대로 고기를 재웠고, 경양식집의 세련됨으로 샐러드를 만들었다. 손님이 오리라 확신했다. 그렇게 믿고 진을 뺐다. 기다리면 되겠지….

열기만 하면 성공신화를 쓰던 지금까지와는 판이했다. 도통 손님이 오질 않았다. 엉뚱한 곳에서 문제가 터졌다. 인근에 있던 연세맨션을 리모델링하는 공사였다. 사대문 안에서는 전례가 없을 정도로 규모가 큰 현장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서대문구 북가좌동 사천교에서부터 마포구 동교동 로터리 근처까지 길게 뻗은 아파트의 구조가 문제였다. 인부들이 한 곳으로 모이기에는 공사장이 길어도 너무 길었다. 빨리 한 끼 해결하고 쪽잠으로 눈을 붙여야 하는 인부들의 라이프 사이클과는 거리가 있었다. 실패하면서도 늘 비싼 수업료라 여겨왔는데 이건 해도 너무 한다 싶었다. 더 흘릴 눈물도 없었다. 눈물샘이 마른 지 오래다. 이때 지원 병력이 도착했다. 군에서 전역을 한 남편이 기사식당이라도 해보자며 그녀를 다독였다. 힘이 났다. 그래 한 번 해보는 거야. 그날로 남편은 군복 대신 파카를 입었고 지휘봉 대신 경광봉(警光棒)을 쥐었다.

남편의 제안으로 기사식당 문 열어
그날을 잊지 못한다. 평생 국가를 위해 몸 바쳤던 남편이 기사식당의 주차원이 되던 날을. 택시가 주차장으로 들어오면 국빈 대접하듯 모셨다. 모름지기 기사식당은 주차장에 택시가 꽉 차 있어야 제 맛이다. 그래야 기사들이 더 모이는 법. 행여 서둘러 나갈까 말을 붙이고 모자란 찬을 건넸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하지 않았던가. 슬슬 입소문이 났다. 휴대폰 문화가 자리를 잡으며 기사들의 회식자리가 되었다. 그들에게 집보다 편한 아지트가 되었다. 그렇게 소문이 퍼져나갔다. 7전8기의 용장(勇將) 앞에 광우병도 조류독감도 피해갔다. 참 먼 길을 돌아왔다 싶어 넌지시 물었다.

“참 대단하시네요. 어떻게 그 어려움 속에서도 포기를 안 하셨대요?”
“산전, 수전, 공중전에 심리전까지 겪었지 뭐. 그래도 새끼들 굶길 수 있나?”
짧은 대답이었지만 강렬했다.

“망한 게 도움이 되었나요?”
“난 망했다고 생각한 적 한 번도 없다니까. 다 배운 거잖아. 그 덕에 내가 못하는 요리가 없다니까.”

감나무집이 인기를 끌자 단골들이 그이를 부추겼다.
“우리 집이 너무 멀어요. 동네에 분점 좀 내주면 좋잖아. 기름 값도 아끼고…”

장 대표는 판단이 빠르다. 여러 번 망해 본 사람에게서는 드물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래, 감나무집 메뉴를(돼지불백, 낙자볶음, 생선구이, 오징어볶음 등) 도시락으로 만들면 되겠구나’라고 판단했다. 배달 비즈니스는 매장이 크지 않아도 되고, 유동인구가 적은 뒷골목도 좋고. 그래서 시작한 게 ‘수 도시락’이다. 감나무집의 메뉴와 레시피를 그대로 적용할 수 있었다. 주방의 요리와 찬을 도시락 용기에 담기만 하면 되는 제2의 비즈니스를 덤으로 얻었다. 수 도시락은 프랜차이즈가 아니다. 모두가 직영이다. 10개가 넘는 매장은 일사불란하게 장윤수 대표의 지시를 받는다.

“망해보지 않고 어떻게 성공할 수 있겠어요? 쓰러지면서 근육이 생기는 거예요.”

지금도 매달 일본과 홍콩을 다니며 벤치마킹 투어를 한다. 장윤수가 만든 김치를 알리고 싶고 젓갈을 소개하고 싶고 무한도전 불백을 맛 보여주고 싶어서다. 추측컨대 그녀가 동남아시아에 진출한다면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둘 것이다. 15억이 넘는 시청자들이 무한도전을 알고 있지 않은가! 유재석, 정형돈, 정준하, 노홍철, 하하, 길이 극찬한 돼지불백을 맛보지 않고는 못 배길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