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말 서울 영등포구에 사는 김민재(37)씨는 황당하고 짜증나는 경험을 했다. 주말이고 마침 날씨도 좋아 세차를 하려던 참이었다. 늦은 아침을 먹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간 순간 차 조수석 문이 움푹 들어간 것이 눈에 띈 것. 이게 말로만 듣던 ‘문콕테러’구나 싶었다. 옆자리에 주차한 차량의 운전자가 문을 조심하지 않고 열면서 김씨의 차에 흠집을 낸 것이다.

여유롭게 세차를 즐기려던 그의 바람은 순식간에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짜증나는 감정을 애써 삭이면서 그는 곰곰이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이틀 전 먼지떨이로 차를 닦을 때만 해도 없던 자국이었다. 그 이후 김씨는 차를 계속 주차장에 세워뒀기 때문에 범인은 바로 김씨 옆자리의 차일 가능성이 높았다. 주위를 둘러보던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바로 CCTV였다. 한쪽 구석에 매달린 CCTV가 김씨 눈에 들어왔다. 그는 다음 날 CCTV에 녹화된 장면을 찾아보기 위해 아파트 관리사무소를 찾았다.

하지만 ‘사건의 현장’이 담겨있을 거라 기대했던 그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녹화된 장면은 화질이 좋지 않아 차량과 사람들의 구체적인 형태를 구별하기 어려웠다. CCTV가 설치된 곳에서 김씨의 차는 5m 정도 떨어져 있을 뿐이었지만 김씨 차에 ‘문콕 테러’를 가한 것으로 의심되는 옆자리 차의 모습은 어떤 차종인지 가늠하기조차 어려웠다. 움직임이 있어야만 촬영되도록 설정돼 있어서 문콕테러와 같은 사소한 움직임은 아예 찍히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더구나 김씨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1500가구가 넘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였음에도 CCTV가 주차구역의 한 ‘라인’당 불과 한 대뿐이어서 사각지대도 너무나 많았다. 관리사무소 측은 “범죄방지용으로 설치한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이 촬영장면을 가지고 문콕테러 범인까지 찾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씨가 실제로 확인한 CCTV 속 영상으로는 강력 범죄가 발생한다고 해도 범인을 찾아내기 어려울 듯 했다.

- 범죄 방지를 위한 CCTV 설치와 관련된 규정이 세밀하게 정해져 있지 않아 ‘문콕테러’를 포함한 지하주차장에서의 사건 사고가 반복되고 있다.
- 범죄 방지를 위한 CCTV 설치와 관련된 규정이 세밀하게 정해져 있지 않아 ‘문콕테러’를 포함한 지하주차장에서의 사건 사고가 반복되고 있다.

아파트 지하주차장 CCTV 녹화 안 되는 경우도 많아
김씨가 겪은 일이 비단 그만의 일일까. 실제 인터넷상에는 ‘문콕테러’를 당한 후 하소연하는 이들의 글이 상당수 올라와 있다. 대부분 ‘문콕테러를 당했는데 상대방을 어떻게 찾을 수 있겠느냐’는 글들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답글들은 ‘짜증나고 속상하지만 상대방 차주(車主)를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혹시 모르니 블랙박스라도 찾아보라’는 식이다. 그나마 블랙박스가 켜진 상태라도 문콕테러가 가해질 당시의 충격이 크지 않다면 영상에서 찾아내기도 쉽지 않다. 대부분의 문콕테러는 말 그대로 ‘문이 콕’ 찍힌 상태여서 차에 가해지는 충격이 크지 않은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경우 주차 시에는 배터리 소모 방지를 위해 블랙박스를 ‘주차모드’로 해두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문콕 당시의 상황이 녹화돼 있을 가능성은 낮다. 결국 김씨는 상대방 차주 찾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김씨는 “문콕테러를 서로 조심하고 배려하자는 내용의 글을 적어서 주차장 입구 문에 붙여두었다. 차를 볼 때마다 짜증이 나지만 현실적으로 문콕테러를 당하면 상대방을 찾는 것이 불가능하다. CCTV 영상을 실제로 보니 큰 범죄가 일어나도 찾기가 어려울 것 같다” 고 말했다.

김씨의 지적처럼 지하주차장에서 자주 발생하는 강·절도나 납치, 차량 접촉사고 후의 뺑소니 등에 대해서도 대처가 취약하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상당수의 CCTV가 노후와 고장 등으로 제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기자가 직접 찾아가본 서울 양천구와 경기 안양시의 아파트 세 곳 모두 CCTV 개수가 턱없이 부족했다. 서울 목동의 한 아파트에 살고 있는 A씨는 “주차장에서 옆차가 차 뒷부분을 긁고 지나가 움푹 들어갔다. 관리사무소에 CCTV 영상을 보여달라고 하자 곤란해 하기에 따졌더니 아예 녹화가 안 됐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설치 대수나 위치, 관리 등에 대한 명확한 기준 없어
이러한 상황은 범죄 방지를 위한 CCTV 설치와 관련된 규제가 세밀하게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반복되고 있다. 2010년 9월1일부터 시행되고 있는 ‘주택 건설기준 등에 관한 규정 및 규칙, 주택법 시행규칙’ 개정안에 따르면, ‘앞으로 건설하는 신규 아파트에는 승강기, 어린이 놀이시설 및 동별 출입구 등에 경비실 등에서 볼 수 있는 CCTV 설치를 의무화함’, ‘CCTV 촬영 자료는 1개월 이상 보관토록 함’이라고 명시돼 있다. 지하주차장(주차대수 30대 이상)의 경우 지난 92년부터 CCTV 등 방범시설 설치가 의무화된 바 있다. 그러나 설치 대수나 위치, 관리 등에 관해선 명확한 기준이 없기 때문에 대다수 CCTV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한 채 방치되고 있다.

주차장 및 이와 연결된 승강기 등의 장소에서 범죄가 잇따르면서, 지난 4월1일 국토교통부는 ‘건축물에서 발생하는 범죄를 사전에 차단하고 범죄에 대한 국민들의 불안감을 해소하겠다’는 취지의 ‘범죄예방 건축기준’을 고시했다. ‘범죄자의 침입 감시를 위해 주차장과 연결된 지하층과 1층 승강장, 옥상 출입구 및 승강기 내부에 폐쇄회로 텔레비전을 한 군데 이상 설치’하고 ‘바닥으로부터 170cm 높이에 있는 사물을 알아볼 수 있도록 설치하고 촬영된 자료는 1개월 이상 보관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촬영 화질에 영향을 미치는 ‘주차장 조명조도’를 ‘출입구는 300럭스, 보행통로는 50럭스, 주차구획 및 차로는 10럭스 이상’으로 한 것은 추가된 내용이다.

그러나 이 건축기준 또한 범죄를 막기엔 보완해야 할 점이 여전히 많다는 지적이다. 국토교통부 건축정책과 이경민 사무관은 “건축기준 고시 외에도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을 마련해 시행하고 있지만 CCTV 설치는 아파트 관리비 부분과도 직결되는 것이어서 일률적으로 적용하기엔 어려움이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