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매대행업체를 운영하는 정 모씨는 지난 5월 초 경찰로부터 출석통보서 한 장을 받았다. 전기용품안전관리법 내 안전인증 규정을 위반했다는 이유였다. 현행 전기용품안전관리법 제18조에서는 수입, 판매, 대여업자의 경우 법이 정한 안전인증을 받도록 하고 있으며, 만약 이를 어길 경우 시·도지사가 강제로 개선, 파기, 수거를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발단은 정씨가 운영하던 한 구매대행 사이트에서 비롯됐다. 인터넷 사이트에서 유럽의 고가 가전제품을 대신 구매해주고 있는 정씨는 수개월 전 모 해외 유명 진공청소기 회사로부터 한 통의 이메일을 받았다. 내용에는 “절차대로 안전인증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귀하가 판매하는 것은 명백히 불법”이라면서 “만약 이를 시정하지 않을 경우 관련 기관에 신고하겠다”고 적혀 있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정씨는 그러나 수개월 후 이 회사의 신고로 현재 경찰 조사를 받고 있다.

해외직구 불만 커진 데 따른 대안 지적도
해외구매대행업 모임(cafe.daum.net/globas)을 주관하고 있는 김명일 운영자는 최근 회원사 관계자들이 보내는 이메일에 답장을 해주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낸다. 회원사들이 털어놓은 불만은 “정부가 병행수입, 배송대행은 봐주고 있으면서 유독 구매대행 업체들만 규제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돌파구를 찾아야 하냐”는 것이다. 특히 지난 6월4일 ‘어린이제품 안전특별법’ 시행 이후 업체들의 불안감은 더 커졌다. 이번에 시행된 어린이제품안전특별법 제30조에는 ‘어린이제품 판매중개업자 및 구매·수입대행업자는 안전인증, 안전 확인 및 공급자적합성 확인의 표시 등이 없는 안전관리대상어린이제품의 판매를 중개하거나 구매 또는 수입을 대행하여서는 안 된다’고 명시돼 있다.

법안의 취지는 최근 해외직구(직접구매)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제품 안전에 대한 우려가 커지는 것을 막는 데 있다. 공정위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소비자원에 접수된 해외 의류·신발 관련 불만상담은 총 1520건으로, 전년(940건) 대비 61.7% 늘어났다. 이는 전체 온라인 해외구매 소비자 피해상담의 55%에 해당하는 규모다.

이러자 관련업계는 즉각 반발하고 있다. 이번 조치가 그동안 정부가 추진해오던 ‘수입방식 다변화 정책’에 역행한다는 것이다. 정부는 그동안 수입 물가 인하의 수단으로 유통구조 개선 및 병행수입 활성화를 적극 추진해왔다. 주요 물가 관련 회의 때마다 정부는 수입물가 상승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복잡하고 비효율적인 유통구조와 독과점에 있다고 보고 병행수입과 해외직구 확대를 적극 지원해왔다.

현재 국내 해외직구 시장은 크게 병행수입, 배송대행, 구매대행으로 나뉜다. 병행수입은 수입업자가 해외 유명 브랜드와 계약을 맺고 물건을 떼어다 국내로 들여오는 방식이다. 배송대행은 소비자가 직접 아마존, 이베이 등 해외 유명 쇼핑 사이트에서 물건을 구입한 뒤 전문 업체에 맡기는 것을 말한다. 유명 사이트에서 직접 항공편을 이용해 국내로 들여오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전체 해외직구의 10% 미만이다. 대부분은 해외 현지에 법인이나 창고를 가진 배송대행 업체로 물건을 보내 한꺼번에 국내로 들여오는 것이 일반적이다.

해외직구 시장에서 또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것은 바로 구매대행이다. 현재 국내 직구 시장은 구매대행업이 전체 50%를 차지할 정도로 시장 규모가 가장 크다. 지난 5월 말 현재 병행수입 통관인증업체는 447개에 이른다. 2012년 8월 통관인증제도를 도입한 이후 2013년 말 105개를 기록한 지 1년 5개월 만에 4배가량 증가했다. 구매대행은 형식으로만 보면 병행수입과 배송대행의 중간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정부가 배송대행업과 관련 규제를 마련하고 있는 것도 이들 업종이 사실상 관련법의 사각(死角)지대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보고 있어서다.

관련업체들이 어린이제품 안전 특별법 시행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은 이들 품목이 구매대행 업체들의 주 수익원이었기 때문이다. 한 구매대행업체 관계자는 “유아용품으로 벌어들이는 수입이 전체 매출의 30~40%에 달하기 때문에 이번 조치로 상당한 피해가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관련업계에서는 어린이안전제품특별법 외에도 식품위생법, 건강기능식품법 등에서 구매대행과 관련한 규제가 점차 강해지고 있는 것에 우려하고 있다. 김명일 운영자는 “건강기능식품법이나 화장품 관련 법률은 판매자(구매대행업체)에게 해당 교육 이수까지 요구할 정도”라면서 “배송대행을 통한 해외직구에 비하면 규제가 지나치게 엄격하다”고 말했다.

- 구매대행은 그동안 해외직구 시장의 한 축을 담당해왔다. 사진은 아마존 물류창고.
- 구매대행은 그동안 해외직구 시장의 한 축을 담당해왔다. 사진은 아마존 물류창고.

구매대행 죽이면 해외직구 시장도 타격
전문가들은 지금처럼 여러 가지 업태가 뒤섞인 구매대행 업종을 구분하는 관련 규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허진영 법무법인 조율 변호사는 “현재 구매대행 시장은 해외 유명 제품을 재고로 놓고 인터넷에서 판매하는 수입판매업과 소비자의 제품 구매를 대행하는 본래의 구매대행업이 뒤섞인 형태”라면서 “수입판매업 형태의 구매대행을 지금처럼 방치할 경우 탈세의 온상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렇다고 지금처럼 마구잡이식 규제책을 들이댈 수도 없다. 자칫 이제 막 싹을 틔우려는 해외직구 시장이 뿌리조차 내리지 못하고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20~30대 위주인 해외직구 시장이 확대되기 위해서는 구매대행업이 반드시 필요하다. 40대 이상이 외국어로 된 인터넷 사이트에서 물건을 구입하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과세체계 및 운송시스템이 복잡한 현재의 배송대행 서비스는 온라인 쇼핑에 익숙하지 않은 40대 이상 인터넷 사용자들에게는 여전히 ‘넘기 힘든 벽’이다. 해외 물품을 값싸게 구입하려는 국내 중장년 소비자들의 수요가 늘어나기 위해서는 물건을 대신 사주는 형태의 구매대행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용현 국가기술표준원 연구관은 “이번 어린이제품 안전특별법은 안전인증을 받은 제품만 유통할 수 있도록 하는 데 법의 취지가 있다”면서 “수입 구매대행까지 규제하려는 것은 아니다”라고 법 제정 취지를 설명했다. 허 변호사도 “법률마다 수입 시 요구하는 기준이 제각각이기 때문에 이번에 아예 순수구매대행과 수입판매업을 구분하는 법적 기준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관련업계에서 말하는 순수 구매대행은 관련 용품을 재고로 쌓아놓지 않고 선 주문, 후 구입·배송하는 형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