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로이 유적지에 있는 트로이 목마 모형.
- 트로이 유적지에 있는 트로이 목마 모형.

기원전 12세기, 서방의 그리스 연합군과 동방의 트로이 간 전쟁에서 그리스 연합군이 승리함으로써 서양문화의 모태(母胎)가 된 헬레니즘 문화가 태동한다. 헬레니즘은 헤브라이즘과 더불어 서양문화의 2대 원류(源流)로서 트로이 전쟁의 원인이 된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나에서 그 명칭이 유래되었다. 한편 트로이 전쟁의 와중에서 트로이 왕의 사위였던 아이아네스가 그 일족을 이끌고 불타는 트로이를 빠져나온다. 이들은 에게해, 지중해를 전전하다가 현재의 이탈리아 중부에 정착해 ‘알바롱가’라는 도시를 세운다. 이 도시가 훗날 로마의 모체가 되고 아이아네스는 로마의 건국시조가 되었다. 따라서 트로이 전쟁은 서양역사의 뿌리이자 자궁이다. 서양의 모든 역사책은 트로이 전쟁부터 시작한다.

그로부터 3000여년 후인 제1차 세계대전 때 멀리 트로이가 시야에 들어오는 다르다넬스 해협의 양안(兩岸)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오스만 투르크군이 연합군에 승리함으로써 러시아를 고립시켜 결국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고 그 후 세계사의 물줄기가 바뀌었다. 3000년을 뛰어넘는 두 전쟁의 격전지 탐사는 ‘트로이 가는 길’이다. 1871년 아마추어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Heinrich Schliemann)에 의해 발굴되어 신화의 영역에서 역사의 세계로 편입된 트로이 탐사, 오랫동안 별러왔던 길이었다.

2013년 5월10일 이스탄불의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있다. 아침 6시30분 현지인 가이드와 운전기사, 그리고 아내와 넷이서 숙소인 그랜드하얏트 호텔을 출발했다. 20여분을 채 못가 이스탄불 시내를 벗어나 그리스 국경 방향으로 난 고속도로에 진입한다. 근처 휴게소에 들러 터키식 아침식사를 했다. 뷔페식의 샐러드와 빵, 그리고 갓 구워 낸 터키 전통의 치즈토스트가 없던 식욕을 불러온다. 휴게소는 깨끗하고 시설이나 서비스의 질도 좋았다. 휴게소를 나서 1시간가량 달려 테키르타크(Tekirdag)를 지나자 날씨가 개면서 푸른 하늘이 보이기 시작했다. 청명하고 드높은 대기가 아름다운 대지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초록과 진한 황초색의 건물이 어우러진 산야는 눈의 피로를 덜어주면서 마음을 저 원초적인 어머니의 품으로 끌어 들이고 있었다.

그리스 국경 가까운 케잔 교차로에서 좌회전해 겔리볼루(Galibolu) 방향으로 향한다. 조금 달리니 지도상 잘록하게 들어간 지점에 다다르고 비로소 양쪽으로 바다가 보인다. 오른쪽은 에게해고 왼쪽은 마라마르해다. 양 바다는 다르다넬스 해협(터키에서는 차낙칼레 해협으로 불림)을 통해서만 연결된다. 오전 10시30분경 겔리볼루항 선착장에 도착했다. 겔리볼루는 인구 약 1만명의 항구도시로 차낙칼레주의 유럽지역과 같은 주의 아시아를 연결하는 해상교통의 주요지점으로 역사적으로 다르다넬스 해협의 장악을 위한 전초기지 역할을 한 곳이다. 6·25전쟁 때는 미국, 영국에 이어 가장 많은 전투 병력을 파견한 터키의 참전 군인들이 한반도의 부산항을 향해 출항한 곳이기도 하다.

- 이석연 변호사가 트로이 유적 입구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제공 : 이석연 변호사)
- 이석연 변호사가 트로이 유적 입구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제공 : 이석연 변호사)

터키 공화국 탄생의 배경지, 다르다넬스 해협
1차 세계대전 당시 이곳 겔리볼루에서 차낙칼레로 이어지는 다르다넬스 해협 양안의 장악을 둘러싸고 영국, 호주, 뉴질랜드, 프랑스 등의 연합군과 독일, 오스트리아 편에 가담했던 오스만 투르크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때 오스만 투르크의 무스타파 케말(아타튀르크)장군이 군지휘관으로서 진가를 발휘하여 전후 터키 공화국 수립의 주역으로 떠오른다. 1915년 5월부터 9개월 사이에 연합군과 터키군 장병 11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차낙칼레 전투에서 터키군은 연합군을 격퇴한다. 이곳 다르다넬스 해협에서의 터키군의 승리로 흑해로 진격하여 연합군 측에 가담했던 러시아 황제를 도우려 했던 연합군의 전략은 차질을 빚게 되고 이로 인하여 러시아는 고립되어 정정 불안 속에 결국 로마로프 왕조를 타도하는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으로 이어졌다. 만약 오스만 제국이 차낙칼레 전투에서 패했다면 연합국의 원조를 받은 러시아의 역사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오전 10시50분 페리에 승선하여 30분 후 양안의 아시아 쪽 지점인 차르닥항(港)에 도착했다. 페리 선상에서 멀어져가는 겔리볼루의 전경을 바라보니 더 없이 소박하고 평온한 모습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어 1차 세계대전의 격전지였음을 무색하게 한다. 멀리 겔리볼루 항구의 킬리트바히르(Kilitbahir) 언덕 위에 커다란 글씨가 터키어로 새겨져 있다.

“멈춰라. 여행자여, 그대가 아무 것도 모른 채 발을 들여 놓는 이곳은 한 시대가 가라앉은 곳이다.”

잠시 숙연한 마음이 든다. 이 차르닥에서 다르다넬스 해협을 오른쪽으로 바라보면서 랍세키, 차낙칼레를 거쳐 우회전하여 50여분 지나면 트로이에 닿는다. 해협 건너편 대지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있고 짙푸른 바다 빛이 마음을 씻어주고 심장까지 싱그러운 내음을 불어넣고 있다. 왜 다르다넬스 해협이 숱한 전투와 영웅들의 활동무대가 되었는지 이곳에 오니 깨닫게 된다. 바로 양안의 대지가 비옥하고 손에 닿을 듯이 가까운 양안의 지정학적 위치 때문이었음을. 길이 61km, 폭 1~6km의 다르다넬스 해협은 이스탄불을 양분하는 보스포로스 해협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군사·정치적 의의가 큰 곳이다. 이곳을 봉쇄(장악)하면 마르마르 해협을 거쳐 흑해로 나가는 길이 막혀 바닷길은 무용지물이 된다. 기원전 5~6세기 페르시아 제국의 다리우스 1세와 그의 아들인 크세르크세스가 그리스를 공격할 때 이곳 해협을 건넜으며 알렉산더대왕의 아시아 원정도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그런가 하면 그리스 신화의 영웅 이아손이 지휘하는 아르고(Argo) 탐험대도 이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과하여 흑해 연안의 콜커스 왕국까지 황금모피를 찾으러 떠났다가 다시 이곳을 거쳐 그리스로 돌아오지 않았던가! 터키 정부는 2023년부터 이곳 해협을 통과하는 모든 선박에 대해 통행세를 징수할 방침이라고 한다. 지금도 군함 3척 이상은 통과를 제한하고 있다.

- 연합군과 터키군 장병 11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1915년 차낙칼레 전투에서 터키군은 연합군을 격퇴한다. 사진은 차낙칼레 성터 모습.
- 연합군과 터키군 장병 11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1915년 차낙칼레 전투에서 터키군은 연합군을 격퇴한다. 사진은 차낙칼레 성터 모습.

한가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트로이
트로이에 진입하면서 주변을 보니 황량한 벌판이 아니라 짙푸른 나무와 비옥한 토지가 드러나는 평화로운 지역임을 금세 느낄 수 있다. 터키의 여느 관광지와는 달리 주변은 비교적 한가하고 차량도, 사람도 많지 않았다. 오히려 이것이 나에게는 더 위안이 되었다. ‘트로이 6’과 ‘트로이 7’의 성벽을 지나 성문 왼쪽으로 몇 계단을 오르면 트로이의 가장 높은 전망대에 다다른다. 멀리 다르다넬스 해협이 보이고 드넓은 평원이 푸른 하늘 아래 펼쳐지고 있었다. 북쪽으로는 트로이의 항구가 있었는데 그곳이 트로이 전쟁 때  그리스 함대가 정박했던 곳으로 보여진다. 지금은 평원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성 밑 바로 아래까지 바다였던 것이다. 슐리만은 바로 이 점을 인식하고 이곳이 트로이 전쟁의 현장이었음을 직감하면서 발굴작업을 감행했다.

어린 시절부터 호머의 <일리아스>에 나오는 트로이전쟁의 사실성을 굳게 믿은 슐리만은 사업가로서 많은 돈을 모은 40대 후반 트로이 탐사와 발굴에 나섰다. 당시 소위 전문가라는 학자들은 그를 비웃고 매도하면서 그의 발굴작업을 방해하고 심지어 자객을 보내 암살까지 하려고 했다. 드로 자하비 감독이 만든 ‘더 트로이(The Hunt for Troy)’는 슐리만의 트로이 발굴과정을 다룬 영화로서 3시간에 걸친 대작이다. 나는 두 차례에 걸쳐 이 영화를 보면서 깊은 감동을 받은 바 있다. 예나 지금이나 안정된 인생항로를 걷는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분야에 얽매이지 않고 영역을 넘나드는 사람들을 경멸한다. 그러나 역사는 바로 그런 아마추어와 아웃사이더들의 꿈과 열정에 의해서 발전해 왔다. 수단이 순수하다면 자격보다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닐까. 우리는 그런 꿈과 열정을 지닌 아마추어와 아웃사이더들을 고맙게 생각해야 한다.

이어 ‘트로이 2’의 성 앞에 가까이 다가가니 한 무리의 독일인 관광객이 가이드의 설명을 경청하면서 멈춰 있는 것이 보인다. 바로 슐리만이 프리아모스 보물을 발견했던 곳이다. 당시 슐리만은 보물이 묻혀 있는 것을 직감하고 인부들에게 마침 오늘이 자기 생일이어서 하루 쉰다면서 모두 돌아가도록 지시하고 아내 소피아와 함께 떨리는 손길로 보물들을 캐내기 시작했다. 그는 소피아에게 금제왕관과 금목걸이를 씌우면서 ‘당신이 바로 헬레나요’라고 하였다 한다. 공회당과 시장터가 있던 언덕에서 한참을 밑으로 내려가니 관람경로 맨 마지막에 동굴이 보인다. 이 동굴은 트로이 지하도를 통하여 바다로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트로이 멸망 시 아이아네스 등이 이 동굴을 통하여 바다로 탈출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실제 와서 보니 충분히 현실적인 근거가 있는 이야기다.

트로이 유적지 곳곳에는 빨간 장미처럼 보이는 이름 모를 꽃들이 간간이 피어 있고 짙푸른 숲이 우거져 금방이라도 옛 트로이인들이 튀어나와 얘기를 걸어올 것 같은 착시현상까지 느껴진다. 트로이는 분명히 살아 숨쉬고 있었다. 트로이 성곽은 주변에 수목과 산림이 어우러져 있고 멀리 평원을 아우르는 자태로 의연히 서 있었다. 누가 트로이를 허허벌판에 아무것도 볼 것 없고 목마조차도 조잡하여 없는 것보다 못하다고 폄훼하고 있었던가! 목마(木馬)를 보려면 차라리 차낙칼레 해변 공원에 있는 영화 ‘트로이’ 촬영 후 기증된 그 목마를 보러가는 것이 나을 것이다. 트로이 성 언덕에 한참을 서있으려니 트로이인들의 번영의 속삭임과 함성이 저 들판에서, 한편으로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3시간여 머물다 트로이를 떠나려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몇 번이고 뒤돌아 봤다. 마치 오랫동안 정든 사람, 정든 땅과 이별하는 듯한 아쉬움이 남아 있는 것처럼.

- 터키식 아침식사
- 터키식 아침식사

터키인들의 聖地 차낙칼레 지역
차낙칼레 시내의 한 아울렛의 식당에서 늦은 점심식사를 하고 다시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 맞은편(유럽지역)에 있는 ‘아베데’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15분 거리의 에게해 바다가 시원스럽게 보이는 곶(Cape)의 끝부분 마비다트에는 차낙칼레 전쟁기념탑이 있다. 오스만 제국이 1차 세계대전에 패하였음에도 터키 본토가 보전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차낙칼레 전투의 승리 덕분이었다. 다르다넬스 해협을 끼고 있는 겔리볼루, 차낙칼레 지역은 현재의 터키인들에게 성지나 다름없다. 그 바로 근처 안작(Anzac) 마을에는 1차 세계대전 때 전사한 호주와 뉴질랜드 군인들의 묘지가 있어 지금도 많은 호주인과 뉴질랜드인들이 찾고 있다. 특히 이 묘지에는 터키공화국이 건립된 직후 아타투르크 대통령이 안작을 방문하는 추모자들을 위하여 직접 쓴 글이 비문에 새겨져 있다. 그 내용이 힘들게 찾아와 표표히 떠나가는 나그네에게 깊은 여운을 남기고 있다.

“피를 쏟으며 생명을 던진 영웅들아, 지금은 친구의 나라 땅에 누워 있구나. 평안하게 누워 있으라. 우리 땅에 나란히 누워 있는 조니(서양인)들과 메흐멧(터키 병사)들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당신들, 아들들을 먼 나라에 보낸 어머니들, 눈물을 닦으라. 당신들의 아들들은 우리의 품속에 편안히 누워 있다. 생명을 이 땅에 바쳤기에 그들도 우리의 아들이다.”

오후 5시반 경 이스탄불을 향해 출발했다. 특히 에게비트에서 겔리볼루에 이르는 주행로는 다르다넬스 해협을 바짝 끼고 나 있어 짙푸른 해협의 정취를 청명한 하늘빛과 함께 맛볼 수 있었다. 건너편 아시아 쪽 대지가 더 가깝게 손짓하고 있다. 차에서 내려 아내와 함께 걸으면서, 멈추면서 풍광을 감상하려니 그지없이 삽상하고 흔쾌한 기운이 가슴 깊숙이 스며든다. 이 느긋함과 낭만과 한가로움이여! 여행의 멋과 품격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