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남성은 물론 여성들에게도 가장 인기 있는 아이템 중 하나는 단연 시계다. 불과 몇 년전까지만 해도 어떤 차를 타고, 어떤 가방을 드느냐가 그 사람의 경제적인 품격(?)을 나타냈다면, 요즘엔 시계가 이 모든 것을 대변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때문인지 명품 시계를 착용하는 연령층이 점차 낮아지고 있다. 결혼 예물로 1000만원대 이상 고가의 명품 시계를 하는 사람들도 늘었다. 시계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것을 공부하고, 또 구입하는 등 시계에 큰 비중을 두고 생활하는 것을 두고 ‘시계 생활’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최근 억만장자들의 특이한 ‘시계 생활’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수천억원 이상의 재산을 소유한 억만장자가 수천만원 혹은 수억원대 이상의 명품 시계가 아닌 몇만원짜리 시계를 착용했기 때문이다. 세계 부호 1위인 빌 게이츠와 러시아 석유재벌이자 첼시FC의 구단주 로만 아브라모비치가 대표적이다.
빌 게이츠는 카시오, 스와치, 파슬 등 몇만원짜리 전자시계를 주로 착용한다. 지난해 보도에 따르면, 빌 게이츠는 10달러 정도의 스와치 시계를 찬다. 세계 최고의 부자인 빌 게이츠가 고가의 명품 시계에 관심이 없는 것은 그가 세계 최고의 부자이자 동시에 세계 최고의 자선가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재산의 95%를 기부하기로 약속했다. 재산의 사회 환원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빌 게이츠에게 수천만원짜리 명품 시계는 그 자체로 사치품일 수 있다. 또한 2000년대 초반부터 이미 미래형 스마트시계를 출시, 이를 마이크로소프트의 주력상품 삼아 세계 시계시장을 공략했던 빌 게이츠에게 고가의 기계식 시계는 더 이상 매력이 없었을 것이다.
로만 아브라모비치 역시 전자시계 마니아다. 구글에서 ‘로만 아브라모비치’를 이미지 검색하면 축구장이든, 시상식 같은 격식 있는 행사에서든 항상 폴라(Polar) 시계를 찬 것을 알 수 있다. 폴라 시계는 1977년 론칭한 브랜드로, 시계 안에 스포츠, 생리학, 전자공학 등 각종 전문지식이 통합돼 있다. 약 91억 달러의 자산가인 그가 찬 폴라 시계의 가격은 약 100달러다.
로만 아브라모비치가 10만원 상당의 폴라 시계를 착용하는 것은 빌 게이츠가 몇만원짜리 전자시계를 차는 이유와는 달라 보인다. 세계적인 축구 클럽 첼시의 구단주인 로만 아브라모비치는 평소 운동을 즐기기 때문에 심박수 측정이 가능한 폴라 시계가 매우 유용할 수 있다. 또 그가 시계 이외의 것에서 검소와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고 있는 것도 이유의 하나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2013년까지는 세계 최고 규모였다) 요트의 소유주가 바로 로만 아브라모비치다. 이클립스라는 이름의 요트 가격은 무려 15억 달러(1조5000억원)로, 이 요트를 유지하는 데만 한 해 794억원 정도가 든다고 한다.

생각만큼 무겁지 않은 억만장자들의 손목
한 인터넷 신문에서는 빌 게이츠와 로만 아브라모비치를 포함해 면세점 듀티프리쇼퍼스(DFS) 공동 창업자인 척 피니, 홍콩의 갑부 리카싱(李嘉誠) CKH홀딩스 회장도 몇만원짜리 전자시계를 찬다고 소개하며 “자산 1조원 이상을 보유한 억만장자들의 손목은 생각만큼 무겁지 않다. 빌 게이츠 등 과시보다는 실용성을 중시하는 자수성가 부호들 중 저가의 전자시계를 선호하는 이들이 있다”고 보도했다.
자수성가든 상속이든 자기 돈으로 물건을 구매하는 것을 욕할 사람은 없다. 억만장자가 수억원대 시계를 사거나, 그것을 컬렉팅하는 것도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오히려 수백억 이상의 자산을 보유한 억만장자가 몇만원짜리 시계를 차는 일은 가뭄에 콩 나듯 매우 보기 힘든 일이기에, 화제가 되는 것이다. 여전히 대부분의 억만장자들은 최고급 시계를 착용한다. 20세기 최고의 펀드 매니저라 불리는 조지 소로스와 다국적 기업인 GE의 사장 및 회장을 지낸 경영인 잭 웰치는 파텍필립을 착용한다. 2014년 기준 세계에서 9번째로 재산이 많은 오라클의 창업자 래리 앨리슨도 초호화 요트부터 시계까지 사치스러운 생활로도 유명하다.
억만장자들이 100달러 미만의 저렴한 시계를 차는 것이 뉴스가 되는 반면, 전 세계 유명 정치인들이 최고급 시계를 착용하면 그것 역시 뉴스가 된다. 자신이 차고 있는 수천만원짜리 블랑팡 시계를 공장 노동자에게 풀어준 일화로 유명한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블랑팡뿐 아니라 브레게, 파텍필립 등 고급시계 마니아다. 러시아의 대통령이자 동시에 세계에서 3번째(2014년 기준)로 재산이 많은 사람이기에 한 피스에 수천만원 이상을 호가하는 시계를 차는 것을 뭐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의 재산 대부분이 1999년부터 러시아 총리로 활동하면서 지금까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것과 최근 러시아가 심각한 경제위기를 맞고 있는 것을 볼 때 그의 시계 컬렉션은 오히려 사람들에게 반감을 사기 쉽다.
이탈리아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前) 총리와 프랑스의 니콜라 사르코지 전(前) 대통령 역시 각각 바쉐론 콘스탄틴과 파텍필립을 착용한다. 푸틴 대통령과 니콜라 사르코지 전 대통령,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가 소유한 시계의 공통점은 모두 퍼페추얼 캘린더 기능이 내장돼 있다는 거다. 파텍필립이나 바쉐론 콘스탄틴은 기본 기능만 탑재된 시계의 가격이 최소 3000만원대다. 거기에 가장 복잡한 기능 중 하나인 퍼페추얼 캘린더 기능이 탑재되면 그 가격은 최소 1억원 이상이다.
누가 어떤 시계를 차든, 개인의 자유다. 그러나 억만장자 기업인들이 몇만원짜리 시계를 차고 기부를 하며 자신들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데 힘쓰고 있는 반면, 국민들의 생활 안정과 경제 등을 위해 일해야 하는 정치인들이 수천, 수억원대의 시계를 자랑하듯 착용하고 다니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그러니 뉴스가 되는 것이고, 그들의 이름이 고급 시계 브랜드의 고객 리스트에는 오를지언정, 존경받는 정치인 리스트에는 오르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 이은경 시계 컨설턴트 · <시계, 남자를 말하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