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퓨리>는 잠수함전투를 그린 독일영화 <보트>의 탱크판
⊙ “앤젤리나와의 결혼을 아이들이 원했기 때문에 했다”

영화 <퓨리>에서 고참 상사 역을 맡아 열연한 브래드 핏(Brad Pitt・50)과의 인터뷰가 뉴욕에서 있었다. 브래드 핏은 영화에서 1945년 4월 2차대전 종전 직전 미군의 셔먼탱크를 몰고 독일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
“늦어 미안하다”며 보무도 당당하게 인터뷰장에 들어선 콧수염을 한 핏은 작은 모자에 엷은 갈색 선글라스를 썼는데 50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젊어 보였다. 씩씩한 청년 같았는데 제스처와 함께 악동 같은 미소를 지으면서 농담을 섞어 차분하면서도 진지하게 질문에 대답했다.
그는 11월 중순 영화에서 신참 사병으로 나온 로간 러만과 함께 한국을 방문했다. 핏은 뉴욕 인터뷰가 끝나자 마자 영화 홍보차 런던으로 날아갔다.
—영화에서 당신의 전우들로 나온 배우들과의 관계는 어땠습니까.
“데이빗 에이어 감독은 우리를 급박한 상황에 넣어 우리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강점과 약점을 배우도록 했습니다. 영화를 찍는 3개월 동안 우리는 맹훈련을 해 탄탄한 동아리로 뭉쳤지요. 각기 성격과 배경이 다른 우리는 일종의 이산가족으로 전쟁의 정신적 타격과 전쟁의 공포가 가져다주는 심리적 부담을 짊어져야 했습니다. 그중에서도 나는 지도자여서 내 약점을 전우들에게 보여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우들 앞에서 스트레스를 해소할 방법이 없었는데 행여 내가 평화와 고요를 찾으려 해도 전우들이 이를 허락하질 않았어요. 그것이 영화 내내 우리들의 관계였습니다.”
—여기서 독일어를 할 줄 아는 미군으로 나와 독일군을 때려잡는데 <인글로리어스 배스타즈(Inglourious Basterds)>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 당신의 전쟁영화입니다. 원래 독일어를 잘했습니까. 독일에 대해 많이 아나요.
“독일어 하느라 땀깨나 흘렸습니다. 나는 독일 미술의 열렬한 팬입니다. 이 영화는 사람들이 한 이념에 얽매였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영화는 인간의 공포에 흠집을 내는 전쟁의 충격을 다루고 있습니다. 한 해에는 전장에서 서로 상대방을 살육하던 사람들이 다음해에는 함께 커피와 맥주를 마신다는 일을 생각하면 신기해요. 이것이야말로 우리들 인간상황의 황당무계함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난 독일어를 좋아하는데 부드럽게 말할 땐 아주 아름다워요. 제겐 고운 음악 같습니다. 제대로 배우려고 합니다.”
—2차대전 참전 군인들의 자문을 받았는지요.
“네. 벌지전투에서부터 여러 전투에 참여했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눴지요. 그들에 의하면 독일 탱크가 우리 것보다 성능이 월등했다고 합니다. 그들의 포탄은 우리 탱크를 관통할 수 있을 정도로 막강했대요. 그래서 우리 탱크 병사들이 많이 전사했는데 많은 군인들이 탱크 안에서 소사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독일보다 나은 점은 수적 우세와 탱크를 수리하는 기술 부문이어서 탱크가 고장나면 잽싸게 고쳐 다시 전선에 내보냈다고 들었습니다. 그들의 말에 충실한 영화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전쟁은 지금도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는데 이런 현상과 2차대전은 어떤 상관 관계라도 있다고 봅니까.
“그것에 대한 명답은 모르겠습니다. 그때와 지금에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때는 전쟁 명분이 뚜렷했던 반면 지금은 그것이 애매모호하다는 점입니다. 여하튼 나는 이 영화처럼 탱크부대를 자세히 묘사한 영화를 본 적이 없습니다. 이 영화는 잠수함전투를 그린 독일영화 <보트>의 탱크판이라고 하겠습니다. 나는 영화를 찍는 동안 《서부전선 이상 없다》를 읽었습니다. 책은 독일 보병의 얘기이지만 그것이 우리의 얘기와 너무나 같다는 데 놀랐습니다. 공포에 대한 군인들의 대처와 그들이 목격한 참상을 그렸는데 결국 얘기는 위대한 인간성에 관한 것이라고 봅니다.”

부인 앤젤리나는 호주에서 또 다른 영화 찍어
—유럽에서 이 영화를 찍을 때 당신의 부인 앤젤리나는 호주에서 또 다른 전쟁영화를 찍으면서 서로 사랑의 편지를 교환했다고 들었는데요.
“우린 동시에 일하질 않는데 이번엔 스케줄이 잘못돼 나는 유럽에서, 앤젤리나는 태평양에서 일하게 됐습니다.(앤젤리나는 연말에 개봉할 태평양전쟁 실화인 <언브로큰>을 감독) 그래서 우리는 옛날에 군인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썼듯이 이메일과 스카이프로 편지를 교환했습니다. 옛 상호 의사전달 수단이 없어지고 다른 방법으로 소통한다는 것이 신기했어요.”
—얼마 전의 결혼을 축하합니다. 그 후로 뭐 변한 것이라도 있나요.
“이제 진짜로 결혼한 남자처럼 느껴집니다. 우린 아이가 여섯이나 있어서 결혼은 이미 지나간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아이들이 우리가 결혼하기를 원했어요. 그래서 우리 가족을 위해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결혼 후 그것이 단지 하나의 축하행사가 아니라 서로의 언약을 더욱 깊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 영화는 수상 시즌에 앤젤리나의 영화와 경쟁을 할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내 영화는 종종 내 친구들의 것과 상을 놓고 경쟁을 하는 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나로서나 내 친구로서나 다 축하할 일이지요. 앤젤리나의 영화는 엄청난 난관을 이겨 낸 인간정신의 승리에 관한 것으로 규모가 크고 매우 훌륭합니다. 이에 반해 이 영화는 일종의 가족의 일상사를 다룬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린 서로 결코 경쟁하지 않아요. 나는 앤젤리나가 모든 상을 다 타기를 바랍니다. 앤젤리나의 영화는 정말로 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다른 세상을 보여주려 얼마간은 프랑스에서 살아
—당신과 앤젤리나는 어떻게 서로 스케줄을 조절합니까.
“언제나 누군가는 아이들과 같이 있도록 번갈아 가면서 일하도록 짭니다. 내가 배우로 일할 때는 앤젤리나가 감독으로 일하는 식이지요. 그런데 이번에는 어쩔 수가 없었어요. 다시는 그렇게 안 하려고 합니다. 어쨌든 이번에는 우리가 서로 아이들을 반씩 나눠 돌보면서 시간이 나면 서로 방문하는 식으로 보냈는데 시간 짜기가 쉽질 않았습니다.”
—당신은 제작자이기도 한데 제작자와 배우가 서로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감독일은 또 어떻습니까.
“감독은 시간을 너무 많이 요구하는 일이어서 다른 할 일이 많은 나로선 할 생각이 없습니다. 디자인 계통의 일을 하고 싶습니다. 제작자로선 뭔가 문화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을 만든다는 것에 자부심을 갖게 됩니다. 난 그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만들고자 하는 얘기를 신중히 고르지요. 한 얘기는 수백 가지의 다른 방법으로 묘사할 수 있는데 제작자는 이런 조각들을 짜 맞춘다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나는 내 견해와 취향에 맞는 얘기를 영화로 만든다는 주관이 뚜렷합니다. 난 어렸을 때 미주리주 남부의 오자크에서 자라면서 세계를 내게 보여준 영화를 사랑하게 됐는데 바로 이것이 내가 하고픈 일입니다.”
—당신이 젊었을 때 일본에서 청바지 광고에 나왔는데 그때 일본에 관해 특별히 기억나는 점이라도 있는지요.
“난 25세 이전엔 비행기를 못 타 봤기 때문에 그땐 일본을 비롯해 어디를 가든지 보는 것을 몽땅 몸에 흡수하려고 했지요. 그러나 지금은 스케줄에 매달려 살기 때문에 어느 한 특정 나라에 빠져들기가 힘듭니다. 다만 이제 우리는 한 대가족으로서 어디를 가든지 그 나라의 문화를 경험하려고 계획합니다. 일본에서 복어를 비롯해 별것 다 먹어 봤지요. 복어는 잘못 요리하면 먹고 죽는다는 것도 압니다. 그런데 섬게가 정말 맛있었어요.”
—불어를 얼마나 잘하며 왜 매년 얼마간을 프랑스 남부에서 삽니까.
“첫 번째 생각은 아이들에게 다른 세상을 보여주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을 비롯해 우리 가족이 모두 프랑스어를 배우고 싶었습니다. 아이들은 이제 다 프랑스어를 할 줄 알고 또 세상에 대한 안목도 넓어졌습니다. 유럽에 터전을 마련한 또 다른 이유는 유럽여행과 함께 아프리카와 아시아여행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남부를 정한 것은 그저 본능적인 감정에 따른 것이지요. 잘했다고 생각해요. 나의 불어도 꽤 괜찮습니다. 지금 나의 각본가이자 감독인 내 아내가 나와 함께 만들고 있는 영화에는 불어가 많이 사용되는데 그래서 그것을 완전히 터득할 결심입니다.”
—내년은 당신이 나온 <12마리의 원숭이> 개봉 20주년이 되는 해로 영화를 바탕으로 한 TV 시리즈가 시작되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난 TV를 많이 안 보긴 하나 시리즈를 제대로 만들었다면 나쁠 것 없겠지요. <12마리의 원숭이>는 당시 경험이 아직 일천했던 나로선 뭔가 다른 것을 시도해 보려는 노력의 하나였습니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 스스로를 밀어 보고 싶었습니다.”
—당신은 지금 아내가 감독하고 공연도 하는 영화 <바이 더 시(By the Sea)>에 나오고 있는데 아내는 세트에서 어떤 주인 노릇을 합니까.
“엄청나게 엄격해요. 여러분들도 다 아시지요. 유럽을 무대로 슬픔을 다루는 부부에 관한 아름답고 우아하며 또 내밀한 얘기입니다. 굉장히 도전적인 작품입니다. 아내가 하는 일에 큰 자부심을 느낍니다. 훌륭한 감독입니다. 결혼 14년에 접어든 부부의 미래에 대한 회의와 그들 주변 사람들에 관한 매우 고상한 얘기입니다.”
—어렸을 때 가족이 한식탁에 앉아 저녁을 먹었나요.
“그럼요. 우리는 언제나 저녁을 함께 먹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시간이야 말로 각자의 느낌과 하루의 일을 얘기하는 시간이었지요. 그러나 우리도 다른 모든 가족처럼 어쩌다 식탁에 모여 다툴 때가 있었습니다. 그에 대해 더 이상 자세한 얘기는 할 수 없군요. 그러나 보통은 오만가지 얘기를 하는 다정한 시간이었습니다.”
본능에 따라 사는 것이 나의 생활지침
—앤젤리나와 함께 한국에 간다는 말을 들었는데 사실인지요.
“앤젤리나의 <언브로큰> 스케줄을 몰라 함께 갈지는 모르겠지만 난 가려고 하고 있습니다.(그후 실제로 11월 중순 방문했다)”
—이제 50세인데 25세 때 생각한 50세의 자신은 어떤 모습이며 지금 자신의 미래에 대해 확신을 느낍니까.
“나는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고 또 나의 아이들과 아내로부터 무엇을 원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명확히 알고 있습니다. 난 5년 또는 10년 앞을 계획하고 살지는 않습니다. 난 언제나 본능에 따라 살았고 또 그것을 믿습니다. 그 본능에 따라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했습니다. 그것이 나의 생활지침입니다.”
—당신은 작년에 오스카작품상(12년 노예생활)을 탔고 앤젤리나는 영국여왕으로부터 훈장을 받았는데 삶에 얼마나 만족합니까.
“아내가 훈장 받은 것 정말로 훈훈한 일입니다. 우리 가족의 아름다운 날이었지요. 우리 가족이 모두 왕실 접견을 했는데 아이들이 고개를 숙여 ‘여왕 폐하’라고 인사를 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정말로 기쁜 일이었습니다.”
—당신 아내보다 12살 많은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장확히 말해 11살 반입니다. 그러나 우린 다 같은 성숙한 나이입니다. 그것이 우리 부부 간 조화의 비결이지요. 우린 전연 다른 점을 못 느껴요. 난 언제라도 젊음과 지혜를 바꿀 용의가 있습니다.”
—오는 크리스마스를 어떻게 보낼 것인지요.
“아직 거기까진 생각하지 않았지만 일을 잠시 접어 놓고 가족이 함께 여행을 하고 싶습니다.”
—밀폐된 탱크 안에서 무엇을 생각했습니까.
“탱크 안은 사실 평화로웠어요. 마치 수영장 물에 머리를 담근 기분이었습니다. 냄새가 나는 좁은 공간 안에 다섯 명이 비비고 앉아 있었지만 곧 익숙해졌습니다. 사흘이 지나니 아주 편하더라고요. 그곳은 결국 각자의 집이 되었지요. 마치 자궁 안에 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어떤 날은 아침에 탱크 안에 들어가 저녁에 나올 때도 있었는데 점심도 그 안에서 먹었습니다.”
—배우로서 어떻게 당신의 연기를 연마합니까. 영화를 봅니까.
“영화를 봅니다. 각본을 읽고 감독을 만나기 전까지는 영화 출연에 마음을 안 둡니다. 일단 출연을 정하면 준비를 하는데 준비야말로 모든 것입니다. 준비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좋은 연기와 진짜로 좋은 연기의 차가 납니다. 그래서 나는 역을 위해 연구하고 조사하기를 부단히 합니다.”
—앞으로 더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가 무엇입니까.
“영화인과 아버지 그리고 남편과 아내의 동반자로서 나를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디자인에 대한 열망을 이루고 싶습니다.”
—배우로서 어떻게 성장했다고 생각합니까.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의 기능과 재능을 발전시키는 것이지요. 난 요즘 재능 있는 젊은 배우들이 자신들의 재능을 충분히 개발하기도 전에 스스로를 소모하는 것에 대해 우려합니다. 배우란 자기 기능을 부단히 연마할 때 비로소 성공할 수가 있습니다. 배우고 이해하는 것이지요. 한 장면의 분위기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것은 마치 수수께끼를 푸는 것과도 같은데 난 지금도 카메라 앞에 서면 이 수수께끼를 푸는 일에 몰두하곤 합니다.”
朴興津
⊙ 70세. 서울대 사범대 독어교육과 졸업.
⊙ 《한국일보》 기자, 인천과 이천서 교직. 《미주한국일보》 부장·편집국장 역임.
現 《미주한국일보》 편집위원, 할리우드 외신기자협회(HFPA)·LA영화 비평가협회(LAFCA)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