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7년 4월, 뉴욕 맨해튼에서 한 남성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한국에서 주얼리사업으로 성공가도를 달려왔기에, ‘아메리칸 드림’도 단숨에 이룰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알아볼수록 현지 사정은 만만치 않았다. 당시 뉴욕에선 주얼리기업 모네(Monet)가 큰 인기를 끌고 있었고, 지방시·스와로브스키·마조리카 등도 확실히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그만큼 세계 패션의 중심지 뉴욕은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시장이었다.
뉴욕과 뉴저지를 잇는 조지워싱턴브리지를 건너던 도중, 남성은 문득 차창 밖을 내다봤다. 다리 위에서 멀찍이 내려다본 맨해튼은 아주 작아보였다. 그다지 위압적이지 않았다.
“여기서 보니까 맨해튼도 만만해보이네. 그래, 한 번 해보자.”
한국 주얼리업계의 성공신화 최영태 나드리 회장의 미국시장 도전은 그렇게 시작됐다. 당시 그의 나이 40세였다.
나드리(Nadri)는 전 세계에 3549개 매장을 거느리고 있는 주얼리기업이다. 대표브랜드 ‘나드리’와 더불어, △아드리아나 오르시니(Adriana Orsini) △엘리엇 다노리(Eliot Danori) △에바 나드리(Ava Nadri) 등 주얼리브랜드를 갖고 있다. 이들 브랜드는 노드스트롬, 삭스피프스애비뉴, 딜라즈, 메이시스 등 미국 내 유명 백화점에 입점해 있다. 할리우드 스타 제니퍼 로렌스, 가수 비욘세 등이 착용할 정도로 나드리는 인기가 있다. 지난 2013년에는 뉴욕 삭스피프스애비뉴의 홀리데이 윈도 디스플레이에 쓰인 주얼리제품이 모두 아드리아나 오르시니라는 사실이 알려지며 화제가 됐다. 2014년에는 패션잡지 액세서리즈 선정 톱100브랜드에 2년 연속 꼽히기도 했다. 브랜드명 나드리는 순우리말 ‘나들이’를 소리나는 대로 일은 데서 따왔다.
무역선 타고 세계무대 꿈꿔
7월8일 오전 10시(현지시간), 미국 뉴저지주(州) 포트리시(市)에 위치한 나드리 본사를 찾았다. 5층 사무실에 들어서니 다양한 피부색의 직원들이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때, 최 회장이 집무실에서 걸어 나왔다. 전형적인 호남형(豪男型) 인상이었다. 최 회장은 해기사(海技士·항해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가지고 있는 면허자격자) 출신이다. 1977년 경남 통영에서 수산고등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무역선에 올랐다. 주로 우리나라와 동남아를 오가는 배에 탔다. 그가 해기사로 일했던 이유는 사업자금을 모으기 위해서였다. 열세 살 때부터 그의 장래희망은 사업가였다. 최 회장은 “무역선을 타고 대양을 누비며 ‘나도 언젠가는 나만의 브랜드를 가지고 세계로 나가겠다’는 꿈을 꿨다”고 옛일을 떠올렸다. 특히 미국은 당시 해기사들에게 동경의 대상이었다.
해기사 경험으로 그가 얻은 건 이 뿐만 아니다. 그 때 배운 물리·수학 지식은 훗날 제품 연구개발의 밑거름이 됐다. 최 회장은 “사람들이 종종 ‘바다사람이 어떻게 주얼리사업을 하게 됐냐’고 묻는데, 오히려 해기사가 되기 위해 배웠던 과학지식이 제품 질을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브랜드 경쟁력 지킨 게 성공비결
“사업에 성공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누구든 같은 돈으로 이왕이면 더 좋은 물건을 사고 싶지 않겠습니까? 즉, 고객이 만원을 내고 1만2000원을 얻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 제품을 안 살 이유가 없죠.”
나드리는 미국 소비자들 사이에서 ‘감당할 만한 사치’(Affordable luxury)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설립자 최영태 회장이 강조한 고품질·저가격 원칙은 지금의 나드리를 만든 근간이다. 지난 1984년 서울 남대문에서 처음 주얼리사업을 시작했을 때부터 최 회장은 이 원칙을 한 번도 저버린 적이 없다. 원자재부터 최고급만 취급했다. 다른 업체들이 아크릴소재를 쓸 때, 나드리는 큐빅 지르코니아를 썼다. 제품 완성도도 최대로 높였다. 제품을 마감할 때 대부분 업체들은 보석 뒷면을 금속으로 완전히 덮는 것과 달리, 나드리 제품은 뒷면을 개방했다. 빛이 앞뒤로 통과해야 보석의 반짝임이 극대화되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만들면 원가는 물론 제작기간도 몇 배 늘어난다. 그럼에도 제품가격은 올리지 않았다”며 “장사시작 1년 만에 나드리를 상표 등록할 수 있었던 이유”라고 말했다.
사세(社勢)는 무서운 속도로 뻗어나갔다. 가게 한 칸으로 시작했던 나드리는 5년 만에 주변 상가를 다 인수할 정도로 성장했다. ‘남대문 최고의 주얼리업체’라는 유명세가 퍼진 1989년, 스와로브스키사(社)에서 공동브랜드를 만들자는 제안을 보내왔다. 그러나 최 회장은 정중히 거절했다. 나드리만의 브랜드 경쟁력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단기적으로는 스와로브스키 상표를 다는 게 이익일지 모르지만, 브랜드를 잠식당하면 회사 운명은 끝”이라고 거절 이유를 밝혔다. 나드리는 차입경영을 하지 않기로 유명하다. 부채를 쓰면 필연적으로 단기이익에 매달리게 되기 때문이다. 지금도 나드리는 완전자기자본기업(All-equity firm)이다. 최회장은 “‘나드리’라는 깃발을 달고 전 세계를 항해하는 게 목표였기에 뚝심을 지킬 수 있었다”고 밝혔다.

2. 뉴욕 삭스피프스애비뉴의 홀리데이 윈도 디스플레이는 방문객들이 줄 서서 관람할 정도로 인기 있는 행사다. 나드리 브랜드 아드리아나 오르시니는 지난 2013년 홀리데이시즌에 이곳의 모든 디스플레이를 장식했다.
(사진제공 : 나드리)
언어장벽도 뛰어넘은 품질의 힘
1997년 6월, 나드리는 뉴욕 맨해튼 36가에 둥지를 틀었다. 무작정 뛰어든 미국시장이었지만 품질만큼은 자신 있었다. 그 해 하반기, 미국 내 모든 주얼리기업이 제품을 선보이는 미국 주얼리박람회(The jewelry show)에 참가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언어와 문화가 달라도 좋은 제품을 알아보는 사람이 반드시 있으리라는 믿음 때문이다. 최 회장이 미국시장에 던진 승부수는 역시 품질이었다.
결과는 대성공. 대형 백화점체인 노드스트롬에서 입점을 요청하는 연락이 왔다. 당시 나드리 입점을 추진했던 마가렛 마이어스(Margaret Myers) 노드스트롬 여성전문 총괄부사장은 <이코노미조선>에 보내온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도 나드리 쇼를 처음 본 순간을 잊을 수 없어요. 제품의 질이 월등했죠. 미스터 최(최영태 회장)는 영어를 할 줄 몰랐고, 나 역시 한국어를 할 줄 몰랐어요. 그러나 나드리 제품을 원하는 내 마음이 언어장벽을 뛰어넘을만큼 더 컸습니다.”
딜라즈 오너 “소비자들이 나드리 가치 알아”
1998년 1월 노드스트롬 입점을 신호탄으로 나드리는 기세를 이어나갔다. ‘인조 보석인데도 다이아몬드보다 더 반짝인다’는 입소문이 번졌다. 재고가 쌓일 겨를도 없이 생산물량이 매번 동날 정도로 인기가 폭발적이었다. 늘어나는 수요에 맞추기 위해 미국진출 3년 만인 2000년, 중국 칭다오(靑島)에 생산공장을 열었다. 주문자상표부착(OEM)이 아닌 직영공장이었다. 이 같은 수직계열화는 몸집이 커가는 와중에도 고품질·저가격 원칙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 주디 해리슨(Judy Harrison) 모네주얼리 전(前) CEO(최고경영자)는 “최고급 품질을 내면서 가격대는 저렴하게 맞출 수 있는 기업은 나드리가 유일하다. 수직계열화로 이뤄낸, 제조공정의 엄청난 효율성은 누구도 모방할 수 없다”고 평가했다.
심지어 원가가 가격을 넘어선 상황에서도 나드리는 가격수준을 일정하게 유지했다.
“아쿠아마린이라는 소재로 제품을 만든 적이 있습니다. 원가가 제품가의 4배였죠. 당연히 손해를 봤습니다. 그러나 브랜드에 대한 신뢰도를 잃고 싶지 않았습니다. 나드리는 고객과의 약속을 지킨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죠.”
끊임없는 제품혁신도 성공가도에 박차를 가했다. 가령, 나드리 진주목걸이는 배열이 완벽하기로 유명하다. 진주목걸이를 제작할 때, 진주 사이사이에 매듭을 묶는 과정을 거친다. 그런데 기존의 매듭으로는 진주배열에 오차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최 회장은 “열흘 밤낮을 매달린 끝에 진주를 일정하게 배열하도록 하는 매듭을 개발해냈다”면서 “진주의 색상과 크기에 대해서도 고민이 많았다. 지금의 나드리 진주목걸이는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탄생했다”고 말했다. 윌리엄 딜라드 3세(William T. Dillard III) 딜라즈그룹 소유주는 <이코노미조선>과의 전화통화에서 “나드리의 끝없는 혁신을 높이 평가한다. 소비자들도 나드리의 가치를 알고 있다”며 “현재 나드리는 딜라즈에서 가장 잘 나가는 주얼리 브랜드 중 하나”라고 밝혔다.
“내 역할은 무대를 꾸미는 연출가”
최 회장은 유능한 인재들이 뜻을 펼 수 있게 해야 세월이 지나도 흔들리지 않는 ‘영생(永生)기업’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는 “혼자서는 기업을 영속시킬 수 없다. 내가 연출가가 되어 주연들이 훨훨 날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다. 최 회장 스스로 자신이 조직도 맨 밑에 있다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최 회장의 말이다.
“나드리라는 무대를 만들어놓으니 실력 있는 인재들이 문을 두드렸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마음껏 꿈을 펼치라고 말합니다. 직급이나 경력에 제한을 두지 않고, 좋은 아이디어라면 무엇이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나드리는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공모전도 열고 있다. 뉴욕주립대 산하 패션디자인 명문대학인 FIT대학 주얼리디자인부서의 마이클 콘(Michael Coan) 학장은 “대부분 기업들에게 공모전은 잠깐 생색내기용이지만 나드리는 장기적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학생들의 아이디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실제로 제품에 적용한다”고 말했다. 콘 학장은 “우리 대학 학생들 대다수가 나드리에 취직하길 희망한다. 나 역시 학생들에게 나드리를 추천한다”고 덧붙였다.
최근 최 회장의 관심사는 우리의 전통 공예품이다. 특히 통일신라시대 유물에 관심이 많다. 그는 “통영 충렬사 홍살문을 본떠 만든 쇼케이스로 미국시장을 휩쓸었듯이 우리 고유 가치를 주얼리 디자인에 접목시켜 세계를 누비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 최영태 나드리 회장은…
1956년 경남 고성 출생. 77년 통영수산고등전문학교 졸업. 84년~현재 나드리 회장. 2015년 제102차 세계에스페란토대회 공식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