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 6월호에는 북방민족사학자 주몽예씨의 "칭기즈 칸은 고구려-발해 왕가(王家)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다소 \'도발적인\' 기고문이 한편 실렸다. 주몽예씨는 칭기스 칸 연구를 위해 29개국 언어로 된 사서를 읽고 이를 전부 비교대조한 결과 이러한 결론을 도출하였다고 한다. 그의 기고문에 대한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주몽예씨의 본명은 최근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1. 2권》을 펴낸 전원철 박사인 것으로 밝혀졌다. <조선pub>은 그가 칭기스 칸 연구에 뛰어든 계기와 <월간조선> 기고문에서 못다한 이야기를 들어보기 위해 직접 만나 보았다. 인터뷰 분량이 길어 3회에 걸쳐 나누어 게재한다.
 
"칭기스 칸은 발해 왕가의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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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정복자' 칭기스 칸.
2015년 6월호 <월간조선>에는 아주 흥미 있는 기고문 하나가 실렸다. 주몽예라는 북방민족사학자가 쓴 <칭기스 칸은 고구려-발해(渤海) 왕가(王家)의 후손이다!>이라는 장문의 기고문이 그것이다.
 
이 기고문에서 필자는 우리가 그 동안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던 문제를 제기했다. 바로 12세기에 아시아-중동-유럽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했던 몽골의 영웅 칭기스 칸이 고구려-발해 왕가의 후손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주몽예씨의 기고문을 보면, 막연히 ‘몽골과 우리는 서로 관련이 있다’는 식의 주장을 펼친 것이 아니다. 그는 매우 구체적으로 칭기스 칸은 발해(渤海) 고왕(高王) 대조영(大祚榮)의 아우인 대야발(大野勃)의 제19대손이라는 것을 칭기스칸의  ‘족보’  계보를 통해 증명하고 있다.
 
뿐만 아니다. 그는 역사언어학적 고증을 통해 칭기스 칸의 어릴 적 이름인 테무진은, 그가 강인하고 위대한 인물이었음을 가리키는 ‘철인’ 이라는 일반적인 풀이와는 달리, 고구려 3대 대무신왕(大武神王)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혔다. 또 칭기스 칸이라는 칭호도 일반적으로 ‘왕중의 왕’ 이라는 일반적 풀이와는 달리, 대조영의 호칭이었던 ‘진국공(震國公)’ 또는 ‘진국왕(震國王)’에서 나온 것으로, 곧 ‘발해국왕’이라는 뜻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월간조선> 기고문을 <조선pub> 사이트를 통해 소개하자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그가 칭기스 칸을 연구하게 된 배경과 <월간조선> 기고문에서 못다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주몽예씨를 직접 만났다.
 
 고구려-발해=고려-금나라-원나라 제국(諸國)-청나라가 한 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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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민족사학자 전원철 박사.
사실 ‘주몽예’는 필명이다. 그의 본명은 전원철이며, 주몽예는 ‘주몽의 후예’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는 최근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1. 2권》 (비봉출판사)을 펴냈다. 책에 소개된 그의 약력을 살펴보니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외무부 유엔국 유네스코담당자문관,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 체첸전쟁 현장주재관을 거쳐, 미국에서 법학박사를 딴 후, 미국로펌에서 변호사로 근무했다고 되어 있다.
 
2권으로 이루어진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은 <월간조선> 기고문에 미처 소개하지 못한 칭기스 칸 선조의 역사를 추적한 광범위한 연구결과를 담고 있다. 그 결과 그는 단지 ‘세계정복자’로 알려진 몽골의 위대한 인물 칭기스 칸의 선조가 우리의 고구려-발해 왕가임을 증명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동안 수수께끼로 남아왔던 우리 역사의 여러 잃어버린 고리들을 찾아내 보여준다.
 
《몽골비사》 등에는 칭기스 칸의 선조계보가 나오는데, 학자들은 그것이 칭기스 칸에서 3~4대를 제외하고는 허구나, 전설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왔다. 또 학자들은 그 계보에 나오는 인물들의 시대나 그들이 살던 장소, 그들이 행한 일들의 실체도 전혀 이해하거나 규명한 바가 없었다.
 
그런데 전 박사는 이 계보에 나오는 인물들 하나 하나가 실존인물이며, 그들이 살던 시기, 심지어 연도까지 규명해내고, 그들이 살던 곳이 막연히 ‘몽골의 그 어디쯤’이라는 식이 아니라, 우리 땅 어디 어디라고 구체적으로 오늘날의 지명까지를 알려주고 그들이 살면서 이룬 일들을 입증하고 있다. 놀라운 일이다.
 
우리 역사의 여러 잃어버린 고리들을 보면, 그는 ‘고구려는 우리, 말갈(발해)은 퉁구스족’이라는 주류학설을 뒤엎고 발해를 세운 칭기스 칸의 선조인 대(大)씨 가문은 고구려왕가의 서자(庶孼) 집안이며, 고구려와 발해는 한 가계에서 나온 우리 역사라는 것이다. 또 발해가 망하는 시점 직전에 고려를 세운 왕건(王建)은 ‘신라의 개성호족’으로 알려진 바와는 달리 발해 왕가의 외손임을 밝힌다.
 
구체적으로 왕건은 금(金)나라 시조 함보(函普)의 아버지 금행(今幸)의 외증손이라고 밝힌다. 왕건은 거란이 발해를 무너뜨리자, 격노하면서 예물로 보내온 낙타들을 만부교 다리 아래에서 굶어 죽게 하면서, 거란과의 국교수립을 거부했다. 이 때 그는 “발해는 내 친척의 나라”라는 말을 하면서, 망명해 온 발해 세자 대광현 일행을 자신의 왕씨 종적(宗籍, 족보)에 올리는데, 그 이유는 한 집안 종씨였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왕건이 몸소 보인 그 미스터리한 선언(발해는 내 친척의 나라)과 행동(발해 세자를 자신의 족보에 올린 것)이 이해가 될 수 있다. 또 926년 발해가 무너진 우리 북한 땅에서는 정약용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가 명백히 보여주듯이 서기 948년 고려 정종 3년(定宗 三年)때부터 이미 여진(女眞)이 들어섰는데, 이는 발해의 계승국이었음을 보여준다.
 
금 시조 함보는 이때에서 약 3세대 전에 장차 ‘여진’으로 불리게 될 발해 반안군(盤安郡)으로 들어갔는데, 발해가 망한 뒤 4세대 후에 함보의 4대손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가 금나라를 세웠다.
 
이와 관련, 최근 수년간 몇몇 학자들이 신문, 방송 인터넷, 논문 등에서 주장하여 금 태조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의 가계가 신라 왕족이라고 하는 견해가 광범위하게 퍼졌는데, 전원철 박사는 책에서 이 견해는 철저히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금나라를 세운 ‘완안아골타’의 7대조 함보(函普)와 그 아버지 금행(今幸)은 남국 신라가 망할 때 936년대의 인물이 아니라, 북국 발해가 엄연히 존재할 때인 840~50년대의 발해 왕족들로 각각 대야발의 5대와 4대손이라고 밝힌다.
 
또 그는 신라 왕가의 후손이라고 우리 학자들이 믿어온 청나라의 시조 아이신교로(愛新覺羅:애신각라) 누르하치 역시 고구려-발해-고려와 한 가문인 금나라 황족의 후손이라고 한다. 결국 고구려-발해=고려-금나라-원나라제국-청나라가 한 가계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중국이 주장하는 동북공정의 주장과는 정반대로 그들 왕조를 창조한 것이 우리 민족이라는 이야기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놀라운 발견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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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징기스칸>의 한장면.

한낱 소수의 양치기 야만 유목인이 세계정복?
 
우리는 그동안 칭기스 칸에 대해 몽골 초원의 여러 유목민을 통일한 ‘좀 더 힘 있는’ 야만적 유목민 부족 출신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수천 년 간 초원에서 양이나 치던 민족이 갑자기 부족 통일을 이루고, 여러 문명 세계를 정복한 동기와 힘의 원천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해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필자인 전원철 박사의 말대로 칭기스 칸이 고구려-발해의 후손이라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칭기스 칸과 그의 원정대는 더 이상 ‘말을 탄 야만 유목인’이 아니며, 그가 벌인 정복활동도 그저 영토 확장이나 재물 약탈, 혹은 ‘그저 별다른 이유 없이’ 힘을 과시하기 위해 벌인 게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전원철 박사는 “그 이전에는 세계지도에 없는 땅에서 느닷없이 전 세계를 떨게 한 ‘세계 정복자’가 탄생했다”며 “아무런 문화, 전통, 기술, 조직력의 배경이 없던 한 줌도 안 되는 소수의 한낱 양치기 유목민 무리 따위가 자기보다 인구면에서 1000배가 더 되고, 또 당시의 온 세상을 지배하던 여러 개의 문명세계를 그렇게 단시일 내에 정복하는 일을 과연 이룰 수 있었을까?”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결국 세계를 정복한 칭기스 칸의 몽골족은 뛰어난 무기 제조술과 오랫동안 집적된 문화와 정보전달체계, 그리고 윤리와 도덕을 겸비하여, 더불어 잘 정비된 사회조직을 가진 고구려-발해-후고구려의 유민들이었기 때문에, 또 여기에다가 그들이 유목민의 말 타는 기술을 잘 조합했기에 그런 대업을 이룰 수 있었다는 것이 전 박사의 주장이다.
 
그동안 주몽예라는 필명을 사용해 온 이유에 대해서 전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부터 근 11~2년 전 제가 ‘지나(China)국’ 또는 ‘중화인민공화국’이라고 부르고 ‘중국’이라고 부르기를 거부하는 그 나라의 관보인 <광명일보>가 ‘고구려역사는 중국변방의 역사이다’라는 제목으로 이른 바 ‘동북공정’을 발포하는 충격적인 글을 발표했습니다.
 
그 때 ‘중국이 우리 고대사를 통째로 빼앗으려 한다’며 온 나라가 수년째 격노하며 들끓었고, 두 나라 간의 심각한 외교문제가 되었던 것을 모두 기억할 것입니다. 저는 당시 미국에 있을 시절이었는데, 저도 그 소식을 전해듣고 그 충격적인 글을 찾아 읽어 보고 분노했습니다. 도대체 누가 그 글을 썼는지를 원문을 통해 찾아보니, 그 글의 저자가 ‘변방의 무리’라는 뜻인 ‘변중(邊衆)’이라는 필명을 쓰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중국(中國)이라는 왕조는 역사상 존재한 적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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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철 박사가 최근 펴낸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 1, 2》.
전 박사는 이를 보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변방의 무리(邊衆)’따위가 어찌 ‘주몽의 후예’에게 조상을 훔쳐갈 음모를 꾸미는가, 비록 땅은 빼앗겼지만, 조상까지 빼앗길 수는 없다. 우리는 모두 주몽의 후예이다‘라는 뜻으로 ‘주몽예’를 저의 호를 삼기로 했습니다.”
 
나아가 전 박사는 “우리가 중국을 일반적으로 ‘중국(中國)’이라고 부르는데 이도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중국’이라고 불러서는 안 됩니다. 이 나라의 정식 명칭은 영어로는 ‘Peoples’ Republic of China, 곧 ‘지나(차이나) 인민공화국’이고, 정식국명도 ‘중화인민공화국’이므로 ‘중공국’ 또는 ‘지나국’이라고 약칭하여 부를 수는 있어도 ‘중국’이 될 수는 없습니다. 아니면 좀 귀찮아도 정식국명을 써서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부르는 게 좋습니다.
 
왜냐하면 ‘중국(中國)’이라는 이름을 국명으로 쓴 이른 바 ‘중국왕조’는 전혀 없으며, 원국, 명국, 청국으로 썼을뿐이고, 이 왕조의 외교무대에서 간혹 ‘중국(中國)’이라는 말을 썼을 때에는 이 칭호는 단지 외국을 속국으로 간주하고 자기를 종주국이라고 간주하는 입장에서 그들이 외국인들에게 대해 스스로를 높여 쓰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걸 따라서 그렇게 칭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전 박사는 “우리가 스스로 ‘지나국’을 ‘중국’이라고 부르는 순간 우리는 그 속국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번에 펴낸 저서에서도 ‘주몽예’라는 호를 계속 쓸 것을 고집했으나, 소설도 아니고 중요한 역사적 진실을 밝힌 작업인 만큼 본명을 밝혀야 한다는 주변의 권고를 마침내 수락하여 진짜 이름으로 책을 냈다고 밝혔다.
 
“칭기스 칸의 집안은 자기 조상이 패배한 전쟁의 기록을 후손이 절대 잊지 않도록 기록하였고, 마침내 승리의 기록으로 만들었습니다. 비록 부끄러운 역사일지라도 과거를 알지 못하는 우리에게 무슨 미래가 있겠습니까? 비록 발해와 후고구려가 망해 이 땅을 떠났지만 우리 피붙이로 났던 그들이 나중에 전세계를 자기 것으로 만든 그 역사의 발굴을 통해 우리가 우리의 과거를 똑바로 알고, 또 우리의 미래 비전이 제시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책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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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박사의 서가 책꽂이에는 온갖 언어로 쓰여진 고대 사서의 원서가 잔뜩 있었다. 몽골, 투르크, 페르시아, 부랴트, 아랍어 등 여러 언어로 된 칭기스 칸 선조의 계보에 관한 책들. 손 옆의 두꺼운 책은 페르시아어 본 《승리의 서( 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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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꽂이 일부를 좀 더 확대한 모습. 두꺼운 페르시아어 본 《승리의 서( 書 )》 옆에 인도 구르칸 조의 《아크바르의 서》>와 그 옆의 주베이니의 《선별된 역사》 등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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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랴트어 본 《몽골비사》, 타타르어 본 《승리의 서( 書 )》, 《투르크의 계보》 등이 꽂혀 있다.  

 
29개 언어로 된 고대 사서를 전부 독파
 
그는 칭기스 칸 선조의 계보를 연구하고, 《칭기스 칸》이라는 책을 쓰기 위해 혼자 29개 언어로 된 사서들을 전부 독파했다고 했다.
 
서양에서 옛날에 발간된 라틴어 기록들을 비롯하여, 중세 투르크어와 페르시아어 사서는 물론, 동방의 《몽골비사》 등 중세 몽골문, 청대 만주어 본, 《요사(遼史)》, 《금사(金史)》, 《원사(元史)》 및 우리의 《삼국사기》, 《고려사》 등 각 사서들의 내용을 교차 체크하여, 인명 및 지명을 각 시대별 언어의 변천과정을 통해 면밀히 분석하였다는 것이다.
 
“저는 《몽골비사》, 《집사》, 《사국사》, 《투르크의 계보》 등 서방사서에 기록된 칭기스 칸의 선조의 ‘계보(shejare, 족보)’를 동방 및 우리 사서들과 교차 체크하여 그 인물들의 이름 소리만 대충 맞추어 나가는 식이 아니라, 그들이 살았던 곳의 지명, 그들의 활동시기와 연도, 행적, 족보상의 계보까지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우리 사서에서 확인하여 칭기스 칸의 계보를 추적했습니다. 그 결과 사서들의 내용이 서로 정확히 일치했기 때문에 이를 책으로 엮은 것입니다.”
 
십수개 민족어로 쓰인 중요 원본사서의 해독만 하더라도 전문역사가나 전공자조차도 엄두를 내기 어려울 작업이다. 하지만, 그는 이들 원서의 해독뿐 아니라 그 내용을 대조, 비교, 교차확인까지 해내기는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드는 연구·작업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대해 전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맞습니다. 사실 여러 가지 언어를 이해하는 여러 동서양 역사학자들 여럿이 모여 함께 모여 함께 해야 할 연구를 혼자 해낸 셈입니다. 그 결과 1162년 칭기스 칸 탄생 이래 853년간 숨겨진 비밀, 아니, 그 선조로부터 치면 고구려 멸망 후 1300년 동안 숨겨진 세계사적인 대비밀이 드러났다고 자부합니다. 이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국의 한 학자는 제가 이룬 연구 성과를 보고 ‘세계사 1000년 간을 다시 써야 할 대발견’이라는 찬사를 보냈습니다.”
 
결국 <월간조선>에 기고한 그 ‘담대한’ 기고문은 자신이 수년간 연구한 결과를 사학계의 전문학자가 아닌 일반독자도 비교적 알기 쉽게 정리한 그 책의 일부를 요약한 내용이었던 셈이다.
 
'몽골'은 칭기스 칸 선조의 나라인 ‘말갈’(=물길), 즉 ‘말 고을’에서 온 말
 
소위 일류 대학을 나와 좋은 직업을 가지고, 무리없는 생활을 누리던 그는 왜 모든 일을 제쳐두고 갑자기 칭기스 칸 가계 연구에 뛰어든 것일까? 전 박사는 우선 몽골과 칭기스 칸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990년 우리나라가 몽골과 국교를 맺었는데, 당시는 저는 군복무를 마치고 대학원을 갈까 취직을 할까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당시 한국에 유학온 몽골학생을 알게 된 계기로 몽골어에 관심이 생겨 공부를 하였고, 그를 통해 몽골어판 《몽골비사》를 구입해 읽게 되었습니다.
 
《몽골비사》를 읽으면서 제 마음속에 의문이 생겼는데, 왜 《몽골비사》는 <몽골사>나 <칭기스 칸사>라고 하지 않고 ‘비밀스러운’ 이라는 수식어를 달았을까 하는 것 하나와, 칭기스 칸의 선조라고 하는 ‘부르테 치노’에 대한 의문 때문입니다. 보통 학자들이 부르테 치노를 몽골어로 ‘잿빛 푸른 이리(蒼狼)’라고 푸는데, 몽골인들은 이 때문에 자신들이 ‘푸른 이리의 자손’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저는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믿었고, 항상 부르테 치노는 과연 누구일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머리를 떠나지 않은 이 물음을 끈질기게 추적했고, 그 결과 몽골족의 선조라고 하는 ‘부르테 치노’는 그 동안 학계와 항간에 알려진 전설적 ‘푸른 이리’와는 전혀 다른 말로, 고구려-말갈어인 ‘부여대씨랑’(夫餘大氏郞: 부려-테치-농)이라는 말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치노’(氏郞: 씨랑)라는 말은 오늘날 ‘씨족의 종친회장’ 격으로 고구려-원나라-북원을 거쳐 몽골어로 ‘지농’이라는 말로 계승되었다는 것.
 
“‘몽골’이라는 말도 처음에는 칭기스 칸이 자신의 종족만을 칭하는 명칭이었는데, 이후 그가 통일한 몽골고원의 종족들을 통칭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사실 테무진 이전에는 테무진이 통일한 지역은 이름조차 없던 땅이며, 종족의 이름도 메르키드, 케레이트, 타타르, 나이만 족 등 여러 종족이 살고 있어서 하나로 특정되지 않았습니다.
 
몽골은 칭기스 칸은 선조의 나라인 ‘말갈’(=물길), 즉 ‘말 고을’의 옛 소리인 ‘몰-고을’, 곧 ‘몰(말, 馬)-고을(邑, 城)’에서 생긴 말입니다. 고구려는 여러 개의 고을(구려)과 ‘일곱 개의 말 골(말갈)’로 이루어져 커진(高) 나라 ‘커구려(고구려)’였고, 결국 ‘말갈’, 곧 옛소리로 “몰골”이 몽골의 어원입니다.”
 
전 박사는 “칭기스칸은 몽골리아 땅의 여러 종족들을 통일한 뒤 자신의 나라 이름으로 ‘고구려-말갈’ 가운데 후자를 선택했다”며, “그 이유는 자신의 선조가 바로 말갈(발해) 왕족이었고, 또 그가 나라를 세울 당시에 동쪽에서는 이미 자신과 같은 선조에서 나와 혈통을 나누는 왕건의 ‘고려(고구려)’가 이미 존재해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고려’라는 국명과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몰골(말갈)’의 전음인 ‘몽골’을 자기 국명으로 택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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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 페르시아어 본의 도분 바얀과 알란 코와기 . 책에 연필 글씨는 전 박사가 독서 중 참고하기 위해 표기해 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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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비사》 불어판 주석서. 전 박사가 부르테 치노, 고와 마랄, 보카 등 칭기스 칸 선조의 이름을 불어로 푸른늑대, 흰암사슴, 숫소, 등으로 모두 잘 못 번역해 두었으나, 불어권에서는 가장 유명하다고 지적하는 책.

칭기스 칸 계보에 등장하는 '투르크어 고어'는 우리 옛말
 
-우선 <월간조선> 기고문을 읽어보지 못한 독자들을 위해 정리를 한번 해주시죠. 어디에 칭기스 칸이 ‘고구려-발해 왕가의 후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는 겁니까?
 
“칭기스 칸의 선조에 대한 기록은 우선 중세 몽골어로 쓴 《몽골비사》를 비롯하여, 《집사》 《사국사》 《투르크의 계보》 《칭기서의 서》 등 페르시아, 중세 투르크어, 타타르어 된 서방사서와 《셀렝게 부랴트종족의 역사》 등 부랴트어로 쓰인 사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모든 사서의 원문을 모두 비교 대조하고, 텍스트의 행간을 해독하여 우리 《삼국사기》, 《고려사》와 《신·구당서》 등 동방사서를 교차 대조하여, 칭기스 칸 선조의 실체를 찾아낸 것입니다.”
 
-그런 책에 기록이 있다면, 왜 그 많은 서양의 칭기스 칸 연구가, 동양의 학자들이 그 동안 그런 사실을 밝혀내지 못한 것인지요.
 
“역사학자들이 당대의 언어를 모르면 모든 시대의 역사 연구가 그렇듯이, 위에 열거된 책을 읽어도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칭기스 칸의 선조 계보에 관한 사서는 중세 페르시아, 투르크어, 몽골어, 타타르어, 한문 등 여러가지 옛 언어로 되어있습니다. 이 여러 나라 언어를 우선 이해해야 그 사서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이 사서들이 특히 각 언어들의 중세어로 기록되어 있다는 어려움도 있죠.
 
또 단지 언어를 이해한다고만 해서 이 사서들의 비밀을 알 수는 없습니다. 칭기스 칸의 선조의 계보는 동방과 서방이라는 엄청난 거리를 두고 서로 다른 곳에서 서로 다른 시기에 기록되었지만, 서로 매우 일관되게 기록되어 왔습니다. 그 계보 속의 선조들이 살았던 정확한 지방과, 민족, 그 언어, 그 역사를 모르고서는 이 사서들의 비밀을 절대 캘 수가 없습니다.”
 
전 박사는 “예컨대 페르시아어나 투르크어로 된 사서는 그 언어를 쓰는 민족의 학자들이 읽으면, 외국어로 배워야 하는 우리보다는 비교적 쉽게 읽을 수는 있겠지만, 막상 그 언어를 쓰는 학자들도 그 사서의 진정한 내용을 알 수가 없다”고 설명했다.
 
“왜냐하면 그 사서들에 나오는 인명과 지명이 투르크어나 페르시아어 어휘들이 아니기 때문이죠. 당연히 그 뜻을 알 수가 없죠. 그들은 우리말과 우리 역사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 학자들이 그 이름들을 그 무슨  ‘투르크어 고어’ 라는 식으로 풀이했는데, 그들은 막상 그 투르크어 고어휘의 소리나 뜻이 무엇인지를 전혀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말한 그 ‘투르크어 고어’는 사실은 우리말이었다는 것을 그들은 몰랐죠. 몽골인들이 왜 하필 투르크어를 썼겠습니까? 또 서방 학자들은 칭기스 칸의 선조들이 오늘날의 몽골리아가 아니라 우리 땅에서 살았다는 점을 몰랐고, 우리 역사도 몰랐기에 그 역사적 진실을 캘 수가 없었던 겁니다.”
 
세계의 수많은 학자들이 칭기스 칸 가계의 비밀을 풀지 못한 이유
 
-우리나라 학자들이나, 박사님께서 ‘지나국’이라고 부르는 중국, 몽골 학자들은 왜 그 ‘역사적 진실’에 접근할 수 없었습니까.
 
“우리 역사학자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고 페르시아어나 투르크어, 타타르어, 몽골어, 만주어, 부랴트어 및 티베트어 등 그런 외국어로 적힌 사서를 읽을 어학적 지식이 없습니다. 대개는 한문이나 이 연구에는 별 도움도 되지 않는 일어, 영어 정도만 이해하는 학자들이 대부분입니다. 또 더러 이 언어들을 일부 이해하더라도 그 사서들에 적힌 내용이 우리 땅에서 벌어졌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한 거죠. 다른 나라 학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동안 칭기스 칸 관해서 수많은 책이 출판되었지만, 그동안 박사님과 비슷한 주장이라도 한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기존 대부분의 몽골 학자들은 서방 학자들이 완전히 오역하거나 잘못된 학설을 내둔 것을 그 무슨 선구적 업적이라고 이야기 하며, 서방 학자들이 오류 위에 세운 지식체계에 대한 권위를 맹종하면서 안일하게 답습해온 이유도 큽니다. 쉽게 말해 독자적 연구와 고민 없이 그저 프랑스의 어느 학자가, 독일학자 누구누구가, 러시아의 어느 전문가 누구누구가, 몽골의 어느 교수 누구누구가 이렇게 말한다는 정도의 지식으로 칭기스 칸을 연구해 왔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요즘 학자들은 그렇다 쳐도 중국 본토 학자들의 연구는 어떤지요.
 
“이미 칭기스 칸 당시부터 송나라 사신 등이나 역사가들이 잘못 알고 기록한 사실이 많습니다. 칭기스칸은 지금부터 약 852년 전에 탄생했지만, 그의 선조 이야기는 고구려가 망한 668년, 곧 지금부터 13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칭기스 칸과 그 선조들이 활동했던 지역의 지명과 인명, 직책 등은 모두 기본적으로는 우리말인 말갈어(고구려-발해어)에 뿌리를 둡니다.
 
그렇지만, 그 낱말들이 몽골어, 지나의 한어(漢語), 만주의 퉁구스어, 오늘날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의 투르크어, 아프가니스탄에서 이란에 이르는 페르시아어와 아라비아반도의 아랍어, 그리고 유럽의 라틴어와 이태리 토스카나 방언 등으로 전해지면서 많은 변화를 거칩니다. 이 때문에 칭기스 칸의 선조 계보를 적은 그 사서들이 기록된 해당 시대의 언어와 역사에 대한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그 사서들 속의 비밀은 결코 풀 수가 없었던 겁니다.”
 
전원철 박사는 “고대와 중세, 근세에 걸쳐 기록된 동서방의 어렵고도 다양한 언어로 기록된 사서를 하나씩 해독하면서, 거기에 기록된 선조들의 이름과 그 뜻, 그들이 산 시기와 한 행적 등을 동방사서와 대조하여 확인하면서 칭기스 칸의 뿌리를 찾아 들어갔다”며 “결국 칭기스 칸 선조가 기록된 책에 등장하는 인명과 언어, 지명이 모두 고대 우리말이었다는 것을 밝혀냈다”고 말했다.
 
따라서 그 동안 수많은 학자들이 칭기스 칸을 연구했지만, 칭기스 칸의 뿌리인 우리 고대사와 우리 옛말을 모르는 상태에서 아무리 연구를 해봐야 칭기스 칸 가계의 비밀코드가 풀릴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수많은 지명과 인명, 관직이 현재 몽골이나 투르크어에서 비슷한 단어에 연결시켜 해석하거나, 예전의 학자들이 궁여지책으로 풀어놓은 뜻을 오늘날까지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2편에서 이어짐)